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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사다난, 인생이란 그야말로 재앙이다.
영욱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을 십분 이해했다.

“시민 여러분, 현 장소에서 조속히 대피해주시길 바랍니다! 아― 빌어먹을, 씹다 뱉을 귤껍질 같은 새끼. 야, 파란 대가리! 그쪽에 오범이 갔다. 빨리 똥통에라도 던져버려!”
“―그게 쉬워 보여?! 하라고 하면 뭐 이게 쉽게 되는 줄… 아! 도망쳤어! Z방향!

짜증 섞인 히어로들의 외침이 시내 한복판을 울린다. 제길, 일부러 가지 않던 길목 쪽으로 나온 거였는데. 영욱은 한 달간 자신을 지겹게 괴롭혀왔던 히어로들의 목소리와 폭파음 그리고 민간인들의 비명에 미간을 구겼다.

“이게, 벌써, 몇 번째였더라.”

선글라스 속 캄캄한 시야 아래, 별안간 초연한 눈빛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영욱이 곧장 몸을 돌려 시내를 빠져나간다. 그리고 그런 영욱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한 인영. 그림자에 사무쳐 곧 모습을 감춘다.

2
영욱은 시내를 빠져나오자마자 울리는 핸드폰을 주머니 속에서 집어 들고 피로한 낯으로 중얼거렸다.

“망할.”

화면을 비추는 ‘매니저’라는 발신자 네임.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길을 돌아가느라 정해져 있던 시간을 조금, 아니 많이… 초과해버렸다. 평소라면 양처럼 순할 자신의 매니저가 마치 어미 잃은 승냥이처럼 울부짖을지도 모른다. 그는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상황에 거친 한숨을 내쉬었다.

“…쉴까.”

이번 드라마가 끝나면.
영욱은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나이 26세. 꽤 젊은 나이에 배우로 데뷔한 그는 태도 불량, 실적 부실로 최근 하락세를 타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작품이 들어왔지만, 그에 대해 억울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생각해보아라. 가는 길목마다 빌런과 히어로들이 등장하고, 대치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건 아마 그의 목숨을 위협했으며―실제로 머리 위로 날라온 석재들에 큰 사고를 당할 뻔했었다― 몇 안 되는 휴식시간을 망가뜨리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당신은 제대로 된 정신상태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

영욱은 그러한 시간들을 보내며 순탄치 않은 자신의 인생과 나름의 타협을 나눴다.
포기하자. 근처 커피숍도 못가, 편의점은 물론이고, 백화점에 들어서면 건물이 무너지지, 그나마 괜찮았던 드라마 촬영지까지 위협받는다면….
어쩌면 잠시나마 연기를 포기하고 쉬는 게 답일지도 모른다.

일평생, 그러니까 인생의 절반을 연기에 쏟아왔던 영욱은 이번 드라마의 촬영이 끝나면 기나긴 휴식 기간을 갖겠다고 마음먹었다.

3
“쉬는 건 쉬는 거고. 맡은 일은 똑바로 해야죠! 벌써 몇 번째예요. 자꾸만 자리 이탈하면 회장님께 말해버릴 거에요. 물론, 시간을 맞춰서 영욱씨가 왔다면 제가 이런 말까지는 안 했겠죠!”
“미안.”
“미안하면 다예요? 그만 됐으니까 대본 읽어요. 말마따나 마지막으로 찍을 드라마일텐데, 최고로 뽑아내야죠.”

예상했던 대로 잔뜩 열이 오른 매니저가 영욱을 쪼아 올리며 너덜너덜한 대본집을 넘겼다. 하도 넘겨서 끝이 동그랗게 말린 대본집은 조금 뒤에 있을 촬영에 대한 설렘을 북돋아 주었다. 영욱은 금세 대본집에 실린 자신의 역에 빠져들었다. 그건 그의 장점 중 하나였으며, 아무리 별난 짓을 벌여도 미워할 수 없게 만드는 모습 중 하나였다. 영욱의 매니저, 이한은 그 모습을 보며 조금 전 ‘쉬고 싶다’며 답지 않게 슬픈 표정을 지어 오던 영욱을 떠올렸다.

‘그런 소릴 할 줄은 몰랐는데. 며칠 전까지만 해도 미친 듯이 연기에만 몰두했던 사람이 맞나? 지금 저 모습을 보면 잘못 들은 것 같기도 한 데 말야. 하지만 뭐…. 쉬지 않고 달려왔는데 잠시나마 편히 쉬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요즘엔 안색도 안 좋던데.’

이한의 눈이 새초롬해지며 대본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영욱을 관찰한다. 묘하게 생기 없고 그늘진 두 눈, 조금 바짝 마른 것만 같은 입술까지! 이한은 스물스물 벌어지려는 턱을 아물고 집요하게 눈을 굴려 나갔다. 핏기없는 혈색, 도드라진 이마, 눈썹을 살짝 덮는 까만 머리칼―아차. 영욱의 외모는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빠져 들어갈 것만 같은 매력이 있었다. 그 매력은 마치 그를 피폐하고 강인하게 보이도록 했으며, 없던 부성애를 끌어 올리기도 했다.

그런 점이 아마 그의 역할을 돋보이게 하는 거겠지. 이한은 영욱을 관찰하던 시선을 멀찍이 떼어버리며 그의 치장을 도울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을 불러모았다. 수년간 그가 맡아왔던 작품은 총 7개. 영화와 드라마를 포함한 7개의 작품 중 3개는 대히트를 쳤고, 히트를 친 세 개의 작품은 모두 그가 악역으로 등장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영욱씨, 슬슬 준비해주세요.”
“네.”

촬영팀의 스태프가 서둘러 치장을 마친 영욱을 데리고 장소로 이동한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이한은 근처 벤치에 몸을 붙이며 생각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악역이었을까?’

멀리서 철제 간의식 의자에 앉아 스태프들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고 있던 감독이 영욱을 발견하곤 환히 웃으며 반긴다. 영욱은 그런 감독의 손을 잡고 몇 번 악수하며 인사하다가, 금세 진지한 낯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신출내기 배우들이 이곳저곳에서 당황하며 인사해오는 모습이 보인다.

“A-1부터 11까지 가능한 NG없이. 어때, 가능하겠어?”
“네. 한 번 해보겠습니다.”
“그, 신지아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님.”

영욱이 맡은 역할은 한 사이비 종교의 교주. 남을 홀리는 신비한 능력으로 여주인공을 타락시키려 하는 인물. 지금 찍어야 할 씬은 빚쟁이들로부터 도망치는 여주인공의 앞을 가로막고 갈등의 발단이 될 만남을 가져야 한다. 영욱은 이 드라마의 여주인공을 맡은 신지아라는 배우의 앞으로 다가서며 슬쩍 눈웃음을 흘렸다. 마치 그가 맡은 배역의 모습처럼 다정하지만, 그만큼 난폭한 웃음이었다.

“저희, 열심히 해봐요.”

잔뜩 긴장해 영욱의 턱 쪽만을 바라보고 있던 신지아의 어깨가 움찔, 떨린다. 무섭다. 신지아는 분명 그의 목소리가 상냥하게 닿아옴에도 불구하고 본능처럼 떨려오는 심장께를 약하게 부여잡았다. 얇은 가디건 사이로 쿵, 쿵, 쿵…. 그녀는 좀 전까지만 해도 머리 속을 한가득 차지했던 대사의 나열들을 잊었다. 그리고 이한은 떠올렸다. 왜 하필 그가 악역이어야만 했는지에 대해서.

“천천히. 조금씩. 조급하지 않게.”

아이를 달래듯 말해오는 영욱의 말꼬리가 날카롭다. 신지아의 시선이 조금 올라가고, 영욱은 그런 눈에 다시 웃음지으며 말한다.

“파이팅.”

그는 극에서 제일 주목되어야 할 주인공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어떻게 띄워야 할지도. 그는 극이 시작하기도 전에 주인공에게 두려움을 심었다. 신지아의 커다란 눈망울이 불안한 듯 기차선 너머를 바라본다. 그리고 조금의 공백. 감독의 사인이 내려진다.

스탠바이― 큐!

벤치에 줄곧 몸을 기대고 있던 이한이 절박하게 기차선 위를 내달리는 여주인공의 모습을 보며 알만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렇게 주역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연출할 수 있도록 유도해주니, 감독의 입장이든 독자의 입장이든 그의 악역은 더할 나위 없는 황금으로 느껴질 테다. 뭐, 원체 그가 무섭게 다가온다는 이유도 한몫하겠지만….

“천직이네.”

배우의 입장에는 나쁠지 몰라도. 이한은 작게 중얼거렸다.

4
“아, 제가 무슨 잘못이요? 따지고 보면 저 파란 대가리가 제대로 능력을 못 쓴 탓 아닙니까? 무슨 얼어 죽을 Z방향. 그런 거 외치고 있을 때 난 불공이라도 하나 더 던졌겠다.”
“닥치면 안 될까, 휘발유야. 인생에 지지리 도움도 안 되는 놈. 실장님, 저 더 이상 이 놈이랑 팀 못해요. 더하면 오범 그 새끼를 잡는 게 아니라 제가 잡힐 것 같습니다. 멘탈이 터져서!”
“…둘 다 진정해.”

히어로 담당 부서의 A팀을 맡고 있던 최종길 실장은 입만 열었다 하면 붙어서 쌈박질이나 하는 놈들을 마주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둘을 부른 건 혼내기 위해서만이 아니야. 어젯밤 조사를 맡은 C팀이 도움을 요청해왔다.”
“조사? C팀이 무슨 조사를 하고 있더라―.”

붉은 머리의 히어로, 박태원이 줄곧 옆에서 알짱대며 짜증을 부려대는 김희원의 앞머리를 태우며 “아!” 소리를 내질렀다.

“제주도 썩은 귤파, 오범 그 새끼! 드디어 꽁무니를 잡은 거예요? 시발, 대체 어디라고 합니까? 지금 당장 출발해요.”
“아, 미친 휘발유 새끼야! 후, 후―. 내가 진짜 못 살아. 실장님, 오범 잡을 땐 박태원 이 새끼 데리고 가지 맙시다. 썩을, 내가 얼마나 관리한 머리칼인데!”

흥분한 듯 씩씩거리는 모양새로 최실장의 앞에 머리를 내민 박태원이 바짝 타올라 있는 김희원의 앞머리에 피식 웃어 보이곤 혀를 비죽 내밀었다.

“꼴에.”
“하, 씹할….”

순식간에 주먹 다툼으로 변한 광경에 참담해진 최실장은 요즘 들어 욱씬거리는 턱 부근을 꾹꾹 눌러내며 손을 튕겼다. 이 비글같은 놈들을 그나마 얌전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

“월급 삭감. 또 떨어지고 싶은가 보지?”
““….””

싸우던 모습 그대로 멈춘 박태원과 김희원이 잔뜩 구겨진 최실장의 미간을 흘깃거리며 얌전히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아쉽겠지만 너희들이 기대하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야. 하지만 이게 맞다면 분명 오범을 잡을 수 있겠지.”
“다른 이야기요?”
“그래.”

오범의 거주지나 정보들을 기대했던 박태원의 어깨가 조금 가라앉는다. 최실장은 테이블 위로 종이 하나를 슥 밀어내며 입을 열었다.

“이영욱. 지금은 그 기세가 죽었지만 한창 잘나가던 배우다. 하지만 C팀의 한 요원이 발견한 모양이야. 때는 10월 31일, 11월 2일, 3일, 6일, 8일, 9일, 10일….”

최실장은 연거푸 날짜를 나열하기 시작하더니 이내 숨을 가다듬었다.

“그 모든 날에 이영욱은 오범과 관련된 현장에 등장했지. 그것도 오범이 사라지고 난 직후, 아주 근접한 거리에서 잦은 목격이 이루어졌어. 그리고 C팀의 대부분은 이영욱을 이미 의심하고 있는 것 같더군. 하지만 심증만으로는 부족해. 오범이 이렇게 쉽게 걸려들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고. 이영욱은 철저한 민간인이다. 국가에 등록된 능력 사항도 존재하지 않아.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라는 거지. 거기서 C팀이 우리 A팀에게 도움을 요청해왔다.”
“망할…. 그래서 우리보고 어쩌라는 거야? 가서 그 이영욱이라는 놈을 족쳐서 증거라도 뽑아오라고?”
“그게 아니야. 너희들은 이영욱과 함께 드라마를 찍게 될 거다.”
“뭐―, 하, 그게, 어? 대체 왜 그렇게 되는데!”

탄 앞머리를 연거푸 만지작거리던 김희원은 소리지를 타이밍조차 놓쳤다. 박태원은 얼이 빠진 표정으로 태연함을 가장한 최실장의 모습을 바라보다 와락 미간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이로군. 최실장은 뿌듯한 미소를 지어 올렸다.

“2억 9천. 바로 어제 너희들이 보내왔던 청구서의 내역이다. 대체 얼마큼의 피해를 내야 만족할 거지? 나라에서 방침이 내려왔다. 피해는 최소화할 것. 완만한 해결로 이것만 한 건 없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너희 둘은 이영욱에게 접근해 친분을 쌓아라. 그리고 충분할 정도의 정보를 캐내 와.”

5
“…가능하다고 생각해? 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연기 같은 거 못해. 절대로.”
“닥쳐. 너만 곤란한 줄 알아? 애초에 네가 사고만 터뜨리고 다니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어.”
“지금 다 내 탓이라고 하는 거야? 파란 대가리, 너 머리에 윤기가 흐른다고 했더니 네 뇌수에서 터진 물이었나 봐? 썅, 냄새나니까 떨어져 줄래.”
“씹…. 지금 말 다했―!”
“저기요. 좀 조용히 해주실래요. 다들 불편해 보이는 거 안보이세요?”
“……죄송합니다.”

단역 배우들을 픽업하는 차량에 몸을 실은 박태원과 김희원은 사방에서 찔러오는 무수한 시선들에 멋쩍은 표정으로 입을 닫았다. 이영욱, 나와 이 녀석이 함께 협동하여―뿌득― 제주도 귤파 두목 오범과의 실마리를 찾아내야 하는 인물. 잠깐 인터넷에 검색해 봤더니 그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존재했다. 분명 제일 많았던 것이 「천재적인 연기실력」이라고 했던가. 궁금해서 유튜브에 전작인 《호랑나비》의 한 장면을 봤는데 어느샌가 밤새 결제하고 달리고 있었다. 이영욱은 천재였다. 물론 배우로서의.

김희원은 평소보다 배는 기가 죽어 보이는 박태원의 모습을 바라보다 씰룩 입꼬리를 올리며 무던히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그들이 향한 곳은 부산의 이름있는 한 레스토랑. 교주역을 맡은 영욱이 여주인공을 달콤한 말로 회유하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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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11-10 14:43 | 조회 : 791 목록
작가의 말
nic23075521

연습작임니댕 재미업으면 욕해주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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