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주인공을 만나다

깜빡, 눈을 뜨니 온 몸이 결렸다. 동굴 벽의 시원함을 만끽하길 잠시, 슬슬 소설의 내용을 정리해야겠다.

일단 이 소설은 흔히 말하는 헌터물이다. 던전에서 몬스터 나오고, 신들이 사람 헌터로 각성시켜서 몬스터랑 싸우는 그거. 주인공은 각성을 하지 못하고 흔한 설정인 아픈 어머니와 여동생을 위해 죽은 아버지를 대신해 짐꾼 일을 하게 된다.

헌터가 죽인 몬스터들의 부산물이나 생필품을 들어주는 짐꾼은 벌이가 괜찮은 편이기도 하고 던전에선 각성이 잘 된다는 소문이 있다는 모양이다. 그러다가 내가 있는 이 던전에서 위기를 맞고, 각성한 뒤 기연을 얻고 동료 모으고 던전 깨는 뭐 그런 스토리였다. 던전이 점점 늘어나서 이 세계가 위기를 맞는 부분까지 봤던 걸로 기억한다.

아, 그리고 이 구슬은 죽지만 않았지. 무슨 말이냐면, 갈기갈기 찢겨도 고통만 느껴질 뿐 죽지도 않는다는 소리다. 물론 딱 한 번 구슬 상태로 이 능력을 되돌릴 수 있고.

참고로 늙어도 죽지는 않는다. 그저 계속 주름이 늘다가, 서서히 걸을 힘도 없어지고, 그렇게 영원히 늙어갈 뿐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시간을 때우자, 몸이 점점 뜨거워지더니 목으로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비릿한 맛과 함께 기침을 내뱉자 검붉은 색이 진득한 핏덩이가 쏟아졌다. 또다시 몸이 찢기는 것만 같은 고통이 느껴진다 싶더니 서서히 시야가 흐려지고, 귓가엔 이명이 들려왔다.

그때, 밖에서 발을 질질 끄는 것 같은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주인공이겠지. 동굴 입구를 향해 힘겹게 시선을 돌리자 흐릿하게 사람의 형상이 보였다. 어차피 줄 것도 없으니 그냥 기절해도 되겠지...?

***

“제, 젠장...저리가!”

긴 검을 쥐고 마치 놀리듯 발걸음을 옮기는 몬스터를 향해 겨눴다. 하지만 검 끝은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헌터가 되기 위해 검술을 배웠지만, 헌터가 아닌 이상 몬스터에게 피해를 입힐 수 없었다.

“크르르...”

개를 닮은 몬스터는 이미 헌터들을 모두 죽인 후라 입가에서 피를 뚝뚝 흘리고 있었다. 역시 갓 헌터가 된 이들을 믿고 던전을 들어오는 게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난이도에 맞지 않는 저 녀석이 문제다.

하지만 집에서 기다릴 남은 가족들이 있는데 여기서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순 없었다. 꿀꺽, 침을 삼키고 검 자루를 꾹 쥐었다. 그때, 이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의 신이 당신에게 축복을 내립니다.]

내 눈 앞에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이건 각성을 알리는 문구...? 내 생각이 맞다는 듯, 급속도로 내 몸에 어느 정도의 근육이 생겨나고 심장 쪽에 단단한 무언가가 자리 잡았다. 하지만 저런 이름의 신은 없을 텐데...? 의문도 잠시, 이상함을 느낀 듯 녀석이 달려들었다.

“크허엉!”

숨을 한 번 들이쉬고 피하며 녀석의 옆구리를 길게 베었다. 나도 녀석이 발톱에 팔을 베였지만 그닥 깊지 않은 상처였다. 녀석은 더 광분한 듯, 나에게 달려들었다. 똑같이 피하며 녀석의 옆구리를 베자, 신경 쓰고 있지 않았던 녀석의 꼬리가 내 허벅지를 스쳤다.

허벅지가 길게 베이며 피가 뚝뚝 흘렀다. 녀석도 나도 서로 떨어져 바라보았다. 불에 덴 듯 상처가 화끈거렸다. 아까 얕게 베였던 팔에서도 덩달아 아픔이 몰려왔다. 녀석은 그런 나를 바라보더니 다시 끔 달려들었다.

그렇게 녀석과 내가 열댓 번쯤 엮였을까. 이미 나와 녀석의 몸은 만신창이가 돼있었다. 입에서 단내가 풍기는 것 같다.

“하아...마지막이다, 개자식아.”

중얼거리곤 이번에는 내가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반쯤 잘린 꼬리를 완전히 베고 몸을 돌리며 녀석의 배에 검을 찔러 넣었다. 녀석은 몸을 움찔거리더니 곧 완전히 움직임을 멈췄다. 긴장이 풀림과 동시에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그 자리에 주저앉자 그제서야 아픔이 몰려들었다.

“윽...”

가장 심한 허벅지 상처를 옷을 찢어 대충 묶고 몸을 일으켰다. 여기 계속 있다간 피 냄새에 몰린 몬스터들의 밥이 될 것이다. 힘겹게 검을 뽑아내곤 녀석의 몸에서 마석만을 뽑나낸 뒤 걸음을 옮겼다.

구조대가 이상을 느낄 때 까진 살아있어야 한다. 안전지대 한 곳 쯤은 있겠지, 던전이니까.

그렇게 몇 시간, 몬스터들을 피해 발걸음을 옮겼을까. 몬스터들이 피해가는 동굴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동굴 안으로 들어가자 사람이 동굴 벽에 기대 쓰러져 있었다. 새하얀 머리카락이 허리께까지 내려오는, 신비한 분위기의 사람이었다. 아니, 던전에 우리 말고 들어온 사람은 없었을 텐데?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그제야 뾰족한 귀가 보였다. 엘프? 이런 낮은 등급의 던전에서 엘프라니, 말도 안 돼. 하지만 뾰족한 두 귀와 인간이 아닌듯한 아름다운 외모는 그가 엘프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엘프...”

영상이나 사진으로만 접했던 엘프의 외모는 상상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보통 엘프는 녹색의 머리카락 이지만, 새햐얀 머리카락은 신비로움을 더했다.

“아.”

근처의 바닥에 검붉은 핏덩이가 보였다. 엘프의 입가에도 핏자국이 남아 있는걸 보니 엘프가 뱉어낸 듯 하다. 어딘가 아픈걸까? 낯도 창백한 것 같은데...

“엘프는 인간에게 호의적이니까...”

나도 모르게 그의 입가를 닦아주고 헌터들이 들고 있던 포션을 먹여주었다. 원래는 내가 먹으려 했지만 엘프가 더 위험해 보이고, 그닥 심한 상처는 아니니까 괜찮을거다.

“하암...‘

싸움이 여파일까, 많이 걸어서일까. 서서히 졸음이 몰려왔다.

11
이번 화 신고 2019-09-21 21:39 | 조회 : 2,703 목록
작가의 말
11月

키워드 쓰는거 깜빡했다....

후원할캐시
12시간 내 캐시 : 5,135
이미지 첨부

비밀메시지 : 작가님만 메시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익명후원 : 독자와 작가에게 아이디를 노출 하지 않습니다.

※후원수수료는 현재 0%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