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만남 (2)

만약의 사고를 대비해 관광객들은 형광 줄을 친 구명조끼를 입는다. 둘째 꼬마가 얼굴을 찌푸렸다. 아이가 받은 조끼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입었는지 때가 꼬질꼬질했다.

“이거 안 입으면 배를 못 타는데?”

엄마의 말에 툴툴대던 아이는 형이 덥석 조끼를 입는 걸 보고는 조끼를 입었다.

대기실에는 네 명의 관광객이 있었다. 2~3살 정도의 어린 여자아이를 안고 있는 젊은 인도계 부부와 더위에 지친 것 같은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극동 아시아계 남자였다.

왁자지껄한 아이들의 수다에 남자가 우리를 보았다.

“한국인이세요?”

놀라움과 반가움이 가득한 한국어였다.

남자는 178센티(남동생 키가 182센티여서 182±5센티의 키는 거의 알아맞힌다.)가량으로 살짝 마른 체격이었다. 왼쪽으로 살짝 물결치는 앞머리 아래 짙은 눈썹이 옅게 쌍꺼풀진 두 눈을 더욱 강조했다. 끝이 올라간 눈썹과 달리 약간 쳐진 눈꼬리는 오뚝한 콧날과 눈썹, 각진 턱이 주는 강한 인상을 제법 부드럽게 만들었다.

물 빠진 남색 티셔츠와 청바지, 밑창이 두꺼운 운동화에다 볕에 탄 피부, 2~3일 면도하지 않은 듯 삐죽삐죽 자란 수염이 그가 여행객임을 알려주었다.

배낭이 없는 걸로 보아 남자는 숙소를 잡아놓고 온 모양이었다. 꾀죄죄한 몰골과 달리 그의 음성은 맑고 나지막했다.

“아, 예. 한국인입니다.”

우리는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여행 목적, 음식, 일정 같은 여행지에서 나누는 간단한 이야기를 하는 동안 배가 돌아왔다. 한 무리의 떠들썩한 배낭 여행객들이 내린 뒤 배에 오를 무렵 나는 그에 대한 제법 많은 정보를 알 수 있었다.

그의 이름은 김정연, 34살의 전직 회사원으로 혼자 여행 중이었다.

배에서는 더 이상의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강 가장자리를 따라 날아다니는 작은 곤충들의 움직임을 보는 것만으로도 바빴기 때문이었다.

야경은 환상적이었다. 이 순간 지구에서 가장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곳을 고르라면 망설이지 않고 여기를 택하리란 확신이 들 정도였다.

구름 한 조각 없는 하늘에 뜬 반달은 야생의 밤을 충분히 관찰할 만큼 밝았다.

강기슭은 기묘하게 뿌리내린 맹그로브 나무들을 타고 오르내리는 야자 게들과 퐁당대는 물소리를 반주 삼은 개구리 떼의 합창으로 가득했다. 숲 여기저기서 비둘기보다 커다란 박쥐들이 굵은 나뭇가지 사이를 펄럭이며 날아올랐다.

우수수수, 여기저기 흩어지는 짐승의 날갯짓 소리를 따라 아이 얼굴만 한 나뭇잎들이 흩날렸다.

바람을 타고 날아온 열대 숲의 각종 향이 코를 간질였다.

그리고 이 모든 광경 속에 푸르스름한 빛을 꽁무니에서 내며 날아다니는 작은 곤충 수백만 마리가 녹아 있었다.

믿을 수 없지만, 배 가까이 붙어 윙윙거리는 모기떼마저 아름다웠다. 장담한다. 곤충 기피제를 옷과 몸에 뿌려서 물리지 않아 그런 생각이 들었을 거다.

사장님이 말한 대로 밤의 강은 한여름의 크리스마스트리들 전시장이었다.

와. 벌어진 내 입은 다물어질 줄 몰랐다. 이따금 저쪽이 더 멋지다, 저기가 더 밝다고 외치는 아이들의 소리 말고는 배 위에선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더욱 잘 보려고 뱃전에 몸을 너무 내밀어서였을까. 꼬마가 물에 빠졌다. 풍덩.

“한석아!”

아이 엄마가 비명을 질렀다. 두근대는 심박동을 느끼며 반딧불이들을 구경하던 나는 요란한 물소리와 두 사람의 비명에 고개를 들었다. 맹그로브가 뿌리를 드문드문 내민 어두운 물, 배 왼쪽 아래에서 빠르게 찰방대는 형광 조끼가 보였다.

“Pull the drowning kid out of the river, quickly, quickly! Hurry, hurry! There are wild crocodiles in this river. Oh, saraswati goddess, please pity us and protect us from harm!”
[빨랑빨랑 애를 강에서 건져내요. 서둘러요. 서둘러! 이 강엔 악어가 산다고요. 오, *사라스와티 여신(힌두교에서 믿는 강의 여신)이시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보호해 주세요.]

사공의 다급한 외침 속에 남자들이 힘을 모아 아이를 건져냈다.

순식간이었다.

정연씨가 몸을 배 밖으로 거의 던지다시피 내밀어 아이를 잡았다. 아이 아빠와 인도인 아저씨가 잽싸게 그의 하반신을 끌어올렸다.

그 잠깐이 영원처럼 길게 느껴진 건 나만이 아니었으리라.

물에 젖은 아이는 온몸을 심하게 떨었다. 의식을 잃은 데다 발작까지 하는 모습이 심상찮았다. 정연씨는 아이가 혀를 깨물지 않게 손수건을 돌돌 말아 입에 물렸다. 경련하는 움직임에 맞춰 강물이 입 밖으로 꿀럭꿀럭 나왔다.

울면서 아이의 얼굴을 만지는 아이 부모 옆에 인도계 부부가 앉아 아이의 손과 발을 주물렀다.

나는 충격에 몸을 떠는 큰 아이와 겁에 질려 우는 인도 꼬맹이를 서투르게 달랬다.

사와스타리 신을 계속해서 부르며 사공이 배를 다시 선착장으로 돌렸다. 배를 탄 지 10분도 지나지 않았지만 아무도 되돌아가는 것에 불평하지 않았다.

예정보다 빨리 들어온 배에 눈이 휘둥그레졌던 공원 관리인은 사공의 손짓과 젖은 채 누워있는 아이를 보고 모든 것을 이해했다. 꼬마는 그 새 발작을 멈추고 바닥에 축 늘어져 있었다.

“Did the kid fall out of the boat?” [애가 물에 빠졌나요?]

눈이 동그래진 관리인에게 아이 아빠가 다급한 목소리로 도움을 청했다.

“Mister! Can you either call ambulance or tell us directions to get to the nearest hospital......”[저기, 구급차를 불러주시거나 병원으로 가는 길을......]

그의 부탁이 끝나기 전에 콜록콜록, 아이가 기침했다. 그리고는 꽥! 비명과 함께 양팔을 휘저으며 벌떡 일어났다. 모두가 깜짝 놀랄 만큼 크고 갑작스러운 외침이었다.

“싫어! 저리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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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08-31 00:03 | 조회 : 996 목록
작가의 말
비금

셀랑고르에 갔을 때 악어는 보지 못했지만 제 키만한 도마뱀은 봤습니다. 무서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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