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서로 다른 길을 걷는 것(2)

루베로오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 주위를 둘러봤고 어째서인지 섬멸자와 친해보이는 유현의 모습을 보니 어딘가 계속 쿡쿡 찌르는 듯한 통증과 답답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땅에 난자된 황제의 시체와 피투성의 유현을 보면서 더 복잡한 감정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내가 피 한방울 안 묻히고 이렇게 보기만 해도 되는 것일까? 피를 묻히고 흘리는 건 유현이 아니 내가 했어야하지 않았을까?

그런 회의감에 잡혀있을 때였다.

지진이라도 난것처럼 건물이, 땅이 흔들렸다. 큰 진동에 루베리오가 비틀거리자 코호트는 서둘러 루베리오를 부축했다.

이내 다시 커다란 굉음과 함께 천장이 날아가 푸른 하늘이 보였고 그 하늘을 덥는 검은 용이 나타났다. 루베리오도 소드 마스터인 코호트도 똑같이 그 흑룡이 내뿝는 영향력에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이제는 황제의 알현실이라고 부를 수도 없어져 버릴 정도로 부서진 공간에 유현의 목소리와 소녀의 음성이 선명히 울려서 들려왔다.

“유현 오라버니, 무사, 해 보여서 다행이에요.”

떨리는 목소리는 마치 전쟁에 나간 가족을 걱정하듯이 애처롭게 떨리고 있었다.

“시엘론, 아니야. 나는 유현이 아니야.”

하지만 유현은 그 목소리에도 조금의 표정의 변화도 흔들림도 없이 말했다. 루베리오 또한 지금까지 유현은 자신은 유현이라고 부르라고만 했지 자신의 이름이 유현이라고 만한 적은 없었다는 사실에 큰 충격에 빠졌다.

“그게, 그게 무슨 소리에요? 유현 오라버니는 오라버니신데.”

당황의 소녀의 물기어린 목소리가 누가들어도 소녀를 가엾게 여기고 매정한 유현을 욕할 것 같았다.

“시엘론.”

루베리오가 들었던 유현의 목소리 중에게 가장 높낮이가 없고 차갑다 못해 싸늘하게 까지 들리는 목소리였다.

“저, 저 많이 후회했어요. 오라버니에게 폐를 끼쳐서 많이 반성했어요. 그래서, 그래서 검도 배우고 있어요. 그러니까 오라버니, 제발 두고 가지 말아 주세요.”

마치 기도라도 하는 것처럼 애처롭게 양손을 꼭 잡고 눈물을 머금은 눈으로 애원하는 소녀의 목소리에 루베리오는 자신이 다 심장이 아려오는 느낌이었다.

“시엘론. 나는 나아갈거야.”

“네, 저도 같이-”

“그 길에 너는 없어.”

단호한 목소리에는 그 어떤 것도 깃들어있지 않았다. 높낮이는 없었지만 따스하고 상냥했던 목소리는 더이상 시엘론에게 들려오지 않았다.

“너는 너의 길을 가야지, 시엘론.”

“…하지만 저는, 저는, 그런 건.”

“내 길을 막는 것. 그건 족쇄야.”

시엘론의 몸이 떨렸다. 노예 상인에게 잡혀있을 때 시엘론은 유현의 족쇄였다. 자신이 있었기에 유현은 도망칠 수 없었고 자신이 있었기에 살인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시엘론은 지금 유현을 막으려고 하였고 그건 족쇄였다. 자신과 함께 있어달라는 억지라는 이름의.

루베리오의 그런 작은 소녀의 억지를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 또한 유현과 함께 있고 싶었고 곁에 두고 싶었다. 유현이 위태롭고 어딘가 비어있는 모습에 눈앞에서 사라질 것만 같아서.

그것이 유현의 족쇄인 줄도 모르고.

루베리오는 주먹을 꽉 쥐었다.

유현은 지금 위태롭지 않았다. 오히려 이곳에서 가장 강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용의 앞에서도 기죽지 않았다.

“돌아가 시엘론. 네 길을 찾아. 말했잖아 모르면 배우라고 모른다는 것을 변명으로 삼지 말라고.”

“…….”

입을 꾹 다물고 시엘론은 고개를 숙였다. 사실 시엘론이 유현을 애타게 찾아 다녔던 것은 죄쵁감과 남겨졌다는 불안감, 그리고 기댈 사람이 없어져서였다.

결국 시엘론은 발전하지 않고 그대로였다. 여전히 타인 의존적이며 아무 생각도 없는 금지옥지 성녀.

“앰버, 너도 참 성격 나쁘다.”

하아. 유현은 한숨을 쉬며 어려진 앰버를 쳐다보았다. 앰버는 분명 시엘론의 의존적인 점들을 알고 있음에도 자신에게 데려온 것이었다.

“아직 어린 인간이잖아. 많이 변했어 예전에는 오냐 오냐 해줬으면서.”

“그거야, 나는 곧 떠날 사람이었으니까. 그뒤로 너희들을 다시 만날 생각은 없었어.”

결단코. 유현의 말에도 앰버의 얼굴에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마스터, 너무하네.”

“…뭐?”

“마스터가 날 길들였잖아. 그러니까 책임져줘. 나 지상의 수호자의 자리에서도 박탈 당하고 용맥의 지배권도 빼앗겼어. 거기다가 황룡을 봉인까지 억지로 깨고 나온다고 힘까지 많이 써서 지금은 이런 어린 모습밖에 안돼.”

그러니까 그 직업과 칭호가 저 앰버 놈 때문에 생긴 거였다.

“어차피 마스터가 가는 곳은 어디든지 감지할 수 있어서 떨어뜨려놔도 무리야. 마스터도 날 감지 할 수 있잖아?”

유현은 한 숨을 푹쉬며 유성헌에게 고개를 돌렸다. 유성헌은 정말 진심으로 유현에게 무슨 짓을 했냐는 묻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색하게 웃으며 유현이 슬쩍 말했다.

“우리 파티원이 점점 늘어간다? 그치 허니야?”

“너 때문잖아.”

“오, 그 말투가 훨씬 낮다. 그렇게 해줘.”

엄지를 척 올리며 유현은 말했다. 유성헌은 잘생긴 얼굴을 구기며 한숨을 쉬었다.

오랜만에 고향의 사람과 길게 대화다보면 저도 모르게 긴장이 풀려서 예전의 말투가 나왔다. 유성헌은 유현 아니, 혜성운만 있으면 됐지만 떨어뜨려봤자 소용없다면 전력으로 포함하는게 나았다. 이것 저것 다 잃은 용이었지만 용은 용이었다.

“아, 그럼 앰버 부탁하나만 하자. 혹시 드래곤의 모습으로 변할 수 있어? 크게.”

“딱 한 번 정도면 할 수 있기는 한데. 무슨 짓을 할려고?”

저 놈도 그렇고 유성헌도 그렇고 왜 날 사고 뭉치로 보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보여도 얌전히 살고 있는 것인데.

유현은 루베리오를 보며 씩 웃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어딘가 슬퍼보이기도 괴로운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그런 유현의 마주한 시선의 끝에 있는 것은 마리앤이었다. 루베리오는 모르게 두 사람이 맺었던 약속을 지킬 시간이 된 것이었다.




※※※




황궁은 전복되었고 제국민들은 황궁 앞에 모여 새로운 왕인 이가 대공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증오스러운 황족 놈들은 모두 죽어버려야해.”

“맞아, 황제만이 아니라 황녀도 황태자도 모두!”

그들은 분노는 아직도 풀리지 않았고 혁명의 불은 거세게 불타고 있었다.

그때였다 황궁의 제일 정상로 크고 검은 드래곤 날아가더니 이내 천상을 부수고 그 속으로 들어갔다.

“드래곤이다!”

“황제가 신벌을 받은거야!”

제각기 다른 말을 하며 그들은 몸을 떨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황실의 가장 높은 곳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검은 드래곤의 위 황족의 증거인 찬란한 금발이 태양빛을 받아 빛났다.

“…황, 태자.”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검은 드래곤을 탄 황태자가 나타났다. 모두가 혼란에 빠진 가운데 황태자의 우렁찬 목소리가 제국민에게 퍼졌다.

“모든 백성들은 들으라! 나 황태자 루베리오는 폭정을 일삼는 황제에 의해 감금 당해 있었다! 하지만 그대들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직접 황제의 목을 내 손으로 잘랐다!”

방금까지만 해도 황족은 모두 죽이자고 했던 이들의 눈빛이 서서히 달라지고 있었다. 흐름이 달라지고 있는 것이었다.

“또한 황제와, 내통했던 황녀 마리앤의 목 또한 저 곳에 걸려있다!”

황성의 벽에 황녀 마리앤의 머리가 걸려있었다.

루베리오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제국민들의 중에서는.

“나 황태자 루베리오 아그라테는 흑룡의 가호를 받고 있으며 이 제국의 황제가 될 것을 선언하는 바이다! 물론 그대들의 지금까지 고통은 나는 들어본바만 있지 실제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황족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다! 나는 결코, 결코 그대들의 고통을 모른척하지 않겠다!”

흑룡의 가호를 받는 새로운 황제.

“아, 아.”

그들의 흐름은 하나의 위대한 존재로 인해서 쉽게 바뀔 수 있었다. 그러니 이것으로 된 것이었다.

“괜찮은건가?”

유현은 눈물인지 피인지 모를 뜨거운 것을 손으로 닦아내며 유성헌을 뒤돌아 보았다.

“또 말투가 돌아왔네. 편하게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유현은 평소와 같은 유들거리는 말투였고 표정또한 평화로웠다.

…하지만.

“…흐, 으윽. 끅, 어머, 니. 어머니.”

목없는 마리앤의 시신에 묶힌 채로 기어와서 손을 뻗는 모습이 애절하다 못해 처절했다.

어린 황녀, 크리신은 처절하게 눈물을 흘리며 숨이 막혀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게 나와 그녀의 ‘약속’이었어.”

마리앤은 그 지하에서 유현에게 부탁했었다. 만약 루베리오가 황제가 되고자 한다면 자신의 목을 잘라 황성의 벽에 걸어 달라고.

‘정치란 그런 것이에요. 나는 정통한 황실의 후계로 인정받을 수 있는 위치입니다. 루벨의 위협이 될 수 있는 위치죠.’

‘괜찮겠어? 그건 네 딸을 배신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괜찮습니다. 이 아이는 은발이죠. 황실의 후계자는 무조건 적으로 금발이어야만 합니다. 그러니 크린신은 루벨의 보호 아래 살아갈 수 있을 것이에요.’

‘그럼 루벨은?’

‘약한 아이는 아니라고 믿고 있어요. 미안해요. 당신에게 이런 무거운 짐을 맡겨버려서 정말 미안해요.’

그것이 황녀 마리앤, 그녀와의 마지막 대화였다.

“…흐윽, 끅. 죽여, 죽여버릴거야!”

어린 소녀의 처절한 비명과도 같은 날카로운 목소리가 유현의 귀를 찔렀다.

“…어떻게, 어떻게! 어머, 니를!”

초록색의 눈동자가 독기를 품고 매섭게 빛났다.

그렇지만 사실 알고 있었다. 크리신은 어머니의 죽음은 어머니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는 것을. 그럼에도 크린신은 어머니가 자신과 함께 살아가주기를 바랬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자신이 봤었던 ‘미래’를 알려주면서 같이 도망가자고 때를 쓰며 어머니를 손을 잡아 끌었다. 하지만 크리신은 몰랐다. 보았던 ‘미래’를 입밖으로 꺼내는 순간 그것이 절대적으로 실현 되어야할 ‘고정 미래’가 되어버린 다는 것을.

딸이 예지자가 아닌 예언자라는 사실을 알게된 마리앤은 크린신에게 몇번이나 당부했다. 절대 미래를 본것을 입밖으로 꺼내서는 안된다고.

하지만 지금 크리신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증오하지 않으면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괴롭고 슬퍼서 어린 소녀는 미래를 입밖으로 꺼내며 유현을 저주했다.

“당신은, 당신은 저 사람의, 손에서 죽게 될거야!”

크리신이 눈이 유성헌을 향하자 유현이 크리신의 시선으로부터 유성헌을 가렸다.

[당신의 미래 예언이 누설 되었습니다!]

[당신의 미래가 ‘고정 미래’가 됩니다!]

유성헌과 유헌에게 동시에 뜬 메세지의 유성헌과 유현의 눈이 둘다 커졌다.

설마, 저 어린 소녀가 예언자였다니.

유현은 크리신의 프로필을 확인하지 않았던 자신을 욕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이라도 봐야겠다는 마음으로 크린신을 보는 순
간.

[강한 억제력이 ‘최후의 신의 축복’을 억제합니다.]

…보이지 않았다. 앰버나 위키의 프로필이 보이지 않았던 것처럼.

“소용없다. 예지자나 예언자의 정보는 철저하게 흐름의 보호를 받는다.”

당황한 유현을 보며 유성헌은 침착하게 말했다.

예언을 뱉어내고는 기력이 떨어져 쓰러진 어린 소녀를 유현은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다 유현은 고개를 돌려서 유성헌을 보고 말했다.

“좋아. 허니야, 지금 그 칼로 날 찔러 죽여.”

“유현!”

지켜보고 있던 아한이 크게 유현을 향해서 외쳤다.

“걱정마. 나 죽어도 안 죽어.”

그렇게 편하게 칼에 찔린 것 만으로 죽을 수 있었으면 진작에 죽었겠지. 그것만으로는 날 죽일 수 없어.

“죽여도 어차피 다시 살아나.”

죽음이 내 죽음을 받아드리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죽여 봐. 아니다. 내가 죽으면 무슨 일이 벌여질지 모르니 일단 여기부터 떠나자.”

유현은 천천히 내려오고 있는 흑룡 위에 루베리오를 쳐다봤다. 정확히는 지쳐보이는 그의 얼굴을.

루베리오를 땅에 내려놓기가 무섭게 앰버의 몸에서 연기가 나면서 작은 용으로 변했다.

“…진짜 힘없다.”

유현은 그런 앰버를 품에 안아들었다. 피가 잔뜩 묻어있어서 기분 나쁠 텐데도 앰버는 얌전히 있었다.

“루벨. 아니, 이제는 황제 폐하인가?”

“…가는, 건인가?”

“응.”

루베리오는 유현의 뺨에 묻은 마리앤의 피를 와이셔츠의 소매로 닦으며 말했다.

“…미안하다.”

그리고는 유현을 품안에 안았다.

“…….”

유현은 상당히 놀랐다. 루베리오의 소중한 사람을 죽인 자신을 증오하고 싫어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차가운 건지 루베리오가 뜨거운 건지 모를 체온은 유현이 자장가를 불러준 그날처럼 그저 따뜻하기만 하였다.

“…정말, 미안하다.”

“됐어. 그만해.”

모든건 유현과 마리앤의 선택이었고 결정이었다. 누군가가 사죄하고 용서받을 일이 아니었다.

유현은 루베리오의 품에서 벗어났고 루베리오는 순
순히 품에서 유현을 놔주었다.

“옷에 피 다 묻었잖아.”

“이런건 상관없다. 가는 건가?”

“응.”

“그렇군.”

짧은 대화가 끝나고 유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잠
들어있는 혁명단, 그리고 울것 같은 얼굴의 시엘론.

황제로 만들어 주고 싶었고 황제로 만든 소중했던 친구.

이윽고 유현은 등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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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11-06 18:24 | 조회 : 1,098 목록
작가의 말
블래티

드디어 지상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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