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뒤집히는 빛과 어둠(3)

황궁에 유폐된 채 살고 있는 황족은 총 셋이었다. 황태자 루베리오 그리고 전 황제의 딸인 황녀 마리앤 아그라테과 그녀의 딸 크리신 아그라테.

이 셋은 서로를 의지하며 두달의 한 번은 꼭 궁을 빠져나와 황태자의 궁으로 모여 그의 작은 화원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피크닉을 즐기고는 했었다.

따사로운 햇빛과 싱그러운 풀들. 그리고 그들을 어우르는 시원하고 통쾌한 바람. 돗자리에 앉은 모녀는 미소를 띄운채였다.

“오늘은 특별한 손님이 온 날인 모양이에요.”

마리앤 아그라테가 싱긋 웃으며 돗자리를 나두고 나무밑의 풀에 앉은 유현을 바라보았다.

“루벨에게 연인있다는 소리는 못들어봤는데.”

“아니야. 그냥 친구야.”

유현은 미간을 좁히며 부정했다. 둘 다 남자고 그것을 떠나서 유현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지도 않았고 공평하게 여자도 남자도 그냥, 인간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루베리오는 그저 마음에 들었었던 한 사람이자, 친구에만 해당했다. 거기다 황제로 만들어주고 싶은 사람이기도 했다.

“후후, 루벨이 마음놓고 옆에 두고 잠들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답니다. 그껏해야 저나 크리신, 혹은 호위기사인 코호트 안텐트 경 정도일까요.”

“…나 남잔데.”

“이곳에서는 후계 문제만 해결되면 남자도 황후가 될 수 있습니다. 성별은 문제가 되지 못하죠. 황녀가 황태녀가 될 수 있는 것처럼요.”

유현은 성차별이 없다시피하는 이세계의 구조에 상당히 놀랐다. 하지만 이내 납득했다. 이곳은 힘이 전부였고 권력이 전부였다. 성별이 낄 틈은 어디에도 없을 정도로 치열한 것이었다.

“황제가 될 생각이야?”

굳이 예시를 황태녀라고 둔 30대의 얼굴의 총기가 묻어나오는 눈동자를 가진 마리앤 아그라테를 유현이 얇아진 눈으로 관찰했다.

“그렇기에 이미 너무 많은 것이 비틀렸어요. 제 수하나
친정들은 전부 숙청 당했고 제 딸, 크리신을 지킬 수단은 더이상 남지 않았죠.”

“지킬게 있어서 나설 수가 없다?”

“그래요. 저희는 황태자의 발걸림 정도 밖에 될 수 없어요. 권력도 힘도 없어서 보호받아야 할 이름뿐인 황족. 그것이 지금의 황족이랍니다.”

그녀는 13살정도로 보이는 자신의 딸에 입에 묻은 쿠키 부스러기를 조심히 수건으로 닦아 주었다.

“어차피 곧 다 죽을 건데 마지막 발악이라도 해보는게 어때?”

유현의 말에 크리신의 입 근처를 닦던 마리앤의 손이 잠시 멈칫했고 어린 황녀는 눈물을 터트렸다.

“ 끅, 흐윽! 으아아앙!”

“이런, 괜찮아요.”

그런 어린 딸을 품에 소중에 안은채 작은 등을 두드리는 손길을 다정하기만 했다. 어두운 초록색의 눈동자와는 다르게.

“…끅, 끅.”

“쉬, 괜찮아요. 뚝.”

“흑,…어머니, 죽지마요.”

두 모녀의 애틋하고도 슬픈 비극을 보고 있는 유현의 눈은 투명했다. 어떤 이물질도 들어가지 유리처럼 그저 깨끗하게 투명했다.

“내 마지막 발악은, 루벨의 발을 잡지 않고 이 아이를 것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마리앤은 눈은 비장했다. 그것은 무언가를 각오한 이의 꺽이지 않는 하나의 의지였다.

유현은 그런 이의의 눈을 수도 없이 봐왔고 알아왔
다.

“희생할 건가? 그 아이를 두고?”

“…….”

마리앤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조용히 어린 딸을 두드리며 진정시켜 줄려고 했지만 크리신은 안좋은 예감이라도 들었는지 눈물을 멈추지 않았다.

“…이런.”

마리앤은 평소에는 눈물을 잘 그치는 크리신이 눈
물을 그치지 않고 서럽게 울자 당황했다.

그때 문밖에서 들려았던 고요한 선율이 들려왔다.

<조용히 피는 꽃이 하나, 그곳에 작게 피어나>

<두려워하지 않아도 괜찮아라고 속삭이며 조용히 스며들어 대지를 채우주네.>

<늠름하게 피는 꽃이 하나, 그곳에 작게 피어나.>

<울지않아도 괜찮아라고 위로해주며 조용히 대지
를 어루만져주네.>

<화려하게 피어나는 꽃이 하나, 그곳에 작게 피어
나.>

<강한척하지 않아도 괜찮아라고 힘을 주며 조용
히 대지를 껴안아주네.>

<그곳에 피어나는 꽃들이 노래부르며 말하네.>

<이 손을 맞잡아 강하게 이어주네.>

<잊지 못할 온기속의 화원의 작은 자장가.>

잊지 못할, 영혼에 각인되는 듯한 노래소리는 마치 소년처럼 비장하기고 했으며 소녀처럼 애절하고 애틋하기도 하였다.

마리앤은 저도 모르게 멍하니 조용히 노래하는 선율의 음을 따라 시선이 유현을 향했다.

변성기가 오기전의 소년의 목소리는 감미롭고도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가 담겨져있었다. 분노와도 닮은 그것은 차마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름을 붙여서는 안되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

마리앤은 어느순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건….”

“이제 진정됐지.”

유현의 시선이 그녀의 품속의 크리신을 향하자 그녀또한 보았다. 언제 서럽게 울었냐는 듯이 잠이든 어린 딸이 보였다.

“그 노래 정말 신기하군요. 아니면 당신의 목소리인가요?”

“아마 노래일거야.”

“무슨 노래죠? 처음 들어보는 자장가인데?”

“진혼곡(鎭魂斛).”

유현의 말에 마리앤의 얼굴이 굳었다. 자장가로 밖에 들리지 않았던 노래는 사실은 죽은 이들을 위한 진혼곡이었고 그런 노래가 이토록 아름답게 들릴 수 있다는 것이 충격적이었다.

“이 노래는 아이를 잃은 자들을 위한 진혼곡이야.”

유현도 잊고 있었던 기억속에 있었던 몇없는 확실한 선율을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 노래를 부르게 되는건 당신이 될까. 아니면 그 아이가 될까.”

유현은 여전히 무표정했고 목소리에 높낮이도 없었
다.

“…정말, 섬멸자님과 닮으셨네요.”

갑자기 나온 섬멸자의 이름에 유현은 미간을 좁혔다.

“그 미친놈이 왜 나랑 닮아.”

“어머, 상당히 닮아있답니다. 특히 너무 많을 것을 격어 정신이 포화상태에 이르어 텅비어버린 것이.”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섬멸자 유성헌도 사멸자 유현도 너무 많은 것을 격었고 부서지고 무뎌지고 날켜로워지고 결국은 터져서 사라져버렸다.

“그 공허한 눈도 정말 똑같아요.”

아무것도 담기지 않는 어딘가 초월한 투명한 검은 눈동자가 깜박였다.

“드래곤님도 많은 것을 격으셨지요?”

“드래곤 아닌데.”

“예? 그럼 요정님?”

“인간이야. 너희와 같은 인간.”

검은 색은 인간이 가질 수 없는 색. 그것은 이곳의 가장 기본적인 상식이었다.

“…염색, 인가요?”

“아니.”

“…아, 그래서….”

그녀는 무언가를 눈치챈듯했다. 하지만 유현은 일부로 유도했던 것이었기에 상관하지 않았다.

“혹시 그 분, 섬멸자를 싫어하시나요?”

“어. 싫어. 끔찍하게도.”

아직도 강제로 잡던 손을 떠올리면 토악질이 나올 정도였다. 원하지 않던, 강제적인 움직임. 강제적인 명령. 모든 것이 지긋지긋하고 끔찍하고 싫었다.

드물게 유현의 혐오의 감정이 비쳐지자 마리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어딘가 씁쓸하면서도 어쩔 수없다는 표정이었다.

“섬멸자, 저희에게는 알카인으로 불렸던 분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 보다 많은 상처를 가지고 살고 계십니다.”

“…그래서?”

누구나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그건 당연한 것이었다. 유현도 혹시 유성헌도 위키가 있는 금서관에서 본 라인 베도로 처럼 말 못할 비극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었다.

“너무 미워하지는 말아주세요. 알카인님에게도 당신에게도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잖아요?”

꿈틀.

순간적으로 유현은 손에 힘이 들어가 땅바닥의 풀을 쥐어뜯었다.

“그건 족쇄야. 날 묶으려고 드는 ‘유일’한 족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걸리적거리는 것에 불과해.”

“후후, 알카인님과 같은 말을 하시네요.”

유현의 얼굴이 구겨졌다. 본인은 알까 저 무표정한 얼굴에 감정이 떠오르는 것이 유성헌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뿐이라는 것을, 사실은 좋던 싫던 이미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 분에 대해서 실례를 무릎쓰고 말씀드리자면 처음부터 그렇게 잔혹하시고 냉혈하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뭐?”

“그 분또한 많은 것을 겪으셨지요. 믿었던 이들의 배신, 돌아오지 감정의 끝없는 절망….”

마리앤은 마치 말하기도 끔찍하다는 듯이 말끝을 흐렸다.

“따라오세요. 이곳에서 말고 그곳에서 얘기해야만 납득할 수 있을 것이에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돗자리를 정리하며 짐을 챙겼고 딸을 등에 업었다. 그런 마리앤을 보고 있던 유현은 그녀의 뒤를 따라걸었다.

마리앤이 도착한 곳은 황태자 궁의 지하였다.

“이곳으로 예전에 이가 대공 각하와 현황제, 그리고 그들의 하나밖에 없던 누이 크리스틴 황녀의 거처였습니다.”

계단을 내려가자 신기하게도 발걸음에 맞춰서 촛불에 불이 하나씩 켜지기 시작했다.

“영웅으로 추앙받던 시절의 알카인님은 그 세분과 친해져 항상 어울려 놀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녀가 문을 열자 그곳에는 장난감 칼과 어린아이가 쓸만한 물건들이 먼지가 쌓인 채 방치되어 있었고 그 방의 한 가운데에는 그림 한 장이 걸려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알카인님은 언제나 타인에게 헌신적이셨고 항상 도움을 주시고자 하시는 영웅었습니다.”

과거를 떠올리는 얼굴에는 돌아갈수 없는, 돌이킬 수는 없는 것에대한 후회가 진뜩하게 붙어있었지만 유현의 눈은 방에 걸려 있는 한 장의 그림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환하게 웃고 있는 은발에 초록색, 정확히는 암녹색의 눈동자를 가진 청조한 미인의 옆에 옅게 미소지은 그림으로 미쳐 다 표현하지 못할 금갈색의 머리카락의, 지금보다 훨씬 풀린 표정의, 선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가 있었다. 그들의 양옆에는 소년처럼 해맑은 표정의 닮은 얼굴의 형제, 아마 이가 대공과 황제라고 추측되는 사람이있었지만 유현의 눈은 오직 처음보는 표정의, 분위기의 유성헌을 보고 있었다.

…원래 저런 얼굴의 사람이었다고?

믿을 수가 없었다. 날카로운 눈매는 부드럽게 풀려 있었고 딱딱한 입매는 옅은 호선을 그리며, 눈은 제 옆의 여인을 무척이나 따뜻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연인처럼.

“황녀와 크리스틴과 제 딸, 크리신이 많이 닮아있죠? 그래서 이름을 그 분으로 부터 따서 크리신이라고 지었습니다. 예지자였던 황녀처럼 현명하고 앞을 내다보는 사람이 되라는 의미로요.”

마리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유현의 눈은 여전히 그림만을 보고 있었다.

“본디 선하시고 여리고 따스한 분이었습니다. 어린 여동생이 있었다며 저를 보며 항상 슬프게 웃으시고는 하셨죠.”

이 이상은.

…위험하다.

“그런 분이 아버지처럼 따르던 ‘권위자’에게 배신당하고 형제처럼 지냈던 이들은 알카인님에게 검을 휘두렀으며 황녀 크리스틴은 그의 곁을 떠나며 다시는 잊혀질 일이 없는 상처를 남겼습니다.”

녹아서 사라져 버릴 것 같다. 용서하며 이해해 버릴 것 같았다.

분노가 동정심과 이해심으로 바뀌며 그 색을 잃어 가는 것만 같았다.

“그 분들 사이에서 정확하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알카인님 또한 피해자였다는 외면했었던 진실이죠.”

외면했던 진실.

내 상처가 아파서 멋대로 그를 재단하고 평가하며 욕하며 손가락질 했던 나.

그런 나조차 놓치기 싶지 않아서 작은 흔적을 쫒아서 추격해서 오던 너.

상처투성이였다. 유성헌도 나도.

더 웃긴 사실은 그런 상처를 주는 것도 서로였고 그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것도 서로밖에 없다는 진실이었다.

애써 부정해왔던 진실과 대면한 것과 같은 아주 끔찍한 기분이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서로 밖에 없다. 서로가 ‘유일’한 존재들이다. 지구가 멸망한 지금 정말 둘 밖에 없다.

“더 알고 싶으신가요?”

유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조용히 마리앤은 입을 열었다.

“그들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 발단이 된것은 제 아버지 전황제와 이북 언니었던 황녀 크리스틴이었습니다.”

조용히 유현은 눈을 깜빡이며 그림을 하나하나 꼼꼼히 눈에 담았다.

“전 황제는, 제 아버지는 욕심많은 자였습니다. 어떻게든 알카인님을 묶어두기 위해서 크리스틴을 압박했고 둘사이에서 어떻게든 아이를 가지게할 심산이었죠.”

유현은 불쾌감에 살짝 미간이 좁혀졌다.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불쾌했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날이 갈수록 악화될 뿐이었습니다. 당연한 일이었죠. 다른 세계의 사람과 시간과 운명을 엮을 방법은 없습니다. 애초부터 다른 존재이까요.”

녹룡이 말했던 말들이 이제서야 와닿기 시작했다. 그는 무엇과서 엮일 수 없다. 끊어져 있으니 내일로는 나이가지 못한다. 살아있되 죽은 것과 다름이 없다.

“그 둘은 함께있는데도 함께 있는 것같지 않았습니다. 결국 먼저 지쳐버린 것은 황녀 크리스틴이었죠. 그녀는 상처만을 남긴채 알카인님을 곁을 떠났습니다. 이에 분노한 황제가 바벨론의 너머로 넘어간 크리스틴을 잡아오라는 명령을 내렸고 권위자의 빌려 강제로 바벨론의 너머에서 데려오는 것이 가능했죠.”

권위자의 힘? …설마 그 권위자가?

유현의 무거운 분위기를 알아차린 마리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알카인님이 아버지라고 부르며 따르던 권위자였어요. 처음부터 크리스틴을 목적으로 다가온 것이었죠.”

…섬멸자 유성헌의 분노는 정당한 것이었다. 유현이 권위자와 함께 있을때 그가 화내며 경고했었던 것은 자신과 같은 상처를 받을까봐.

이게 뭐야.

꼭꼭 묶어났던 문이 조금씩 금이가고 있었다. 사연이 있다고 해서 그런 태도를 이해하고 용서해주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달랐다. 그것의 용서하고 이해하는 차원이 아니라 유현은 그 행동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유현은 죽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에게 강압적인 태도를 받을때마다, 그때만은 눈이 살았다.

유성헌도 유현과 같았다.

누군가를 살게 하고 싶어서 스스로 악이 되어 삶의 양분이 되었다. 자신을 상처입힌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길을 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었다.

때로는 악이 목숨을 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알
고 있었지만, 자신이 받을 줄을 몰랐다.

…이게 뭐야.

허무하다 못해서 황당하기까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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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11-01 20:47 | 조회 : 1,144 목록
작가의 말
블래티

섬멸자의 큰그림.(섬멸자 주식 오른데요. 소곤소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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