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노예를 소개합니다(2)

***


“한잔하자.”

팀의 솟구치는 짜증을 알 리 없는 페리나는 축배를 들었다. 까라면 까야지, 그는 불만에 가득한 표정으로 술잔을 부딪친다. 빠르게 비워낸 술잔을 뒤집은 팀은 페리나의 눈치를 보듯 곁눈질한다.

여기는 처음 그녀와 조우했던 ‘꽃동네’ 다. 이곳에서 만나게 된 이유는 그녀와의 ‘거래’를 끝으로 정신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호텔이나 여관에 옮겨주던가! 이틀 동안 씻지도 못하고 두들겨 맞은 탓인지, 고기 저린 비릿한 냄새가 팀의 몸 곳곳에서 웃도는 듯 했다. 몽롱한 정신으로 페리나의 안색을 살피던 그가 문득, 그녀의 경악스런 아름다운에 헛웃음 맺혔다. 그 시선을 느낀 페리나는 쑥스러운 듯 고개를 돌리며 헛기침을 뱉어냈다.

“어, 어쨌든 출소했으니 축하한다.”

어영부영 넘어가려는 페리나의 수법을 눈치 챈, 팀은 못이기는 척 잔을 받들었다. 그리고 조막보다 작은 그녀의 입에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러니까?! 저와 동행을 한다고요?”

“그, 그렇게 됐어. 불만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다시 독방으로 보내 줄 테니까.”

그것만큼은 봐달라는 팀의 절규를 뒤로한 그녀가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겠다는 듯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적당한 선에서 타협점을 찾길 바랐던 팀이었지만, 기세를 보아하니 쉽게 꺾일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부득이하게 그녀와의 거래가 성립되어 버렸다. 그런데 문득 그 이유가 궁금해진 팀의 몸에 생기가 돌았다. 그의 눈과 마주친 페리나의 몸이 굳었다. 오싹한 두 눈동자 속에는 꿈에 나올까 두려운 생광이 맺혀 있었다.

그의 의도를 전혀 파악할 수 없었던, 페리나는 두려움에 몸서리쳤다. 이윽고 비장한 표정의 팀이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그, 죄송하지만 저와 동행하시려는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낮게 깔린 목소리에 각오가 담긴 듯 했다. 살벌한 눈빛과는 대조되는 질문에 당황한 페리나가 갸웃 거리며 상황을 파악했다. 이윽고 그의 단순한 의도에 김이 새 버린 건지 긴장이 풀린 건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국가에서 노예상인들의 처우에 대한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실제로 그들이 법규에 준수하는지, 상인으로서 불려도 될 만큼 도덕적으로는 문제가 없는지 등등 말이야.”

말하자면 감시를 동반한 시장의 동태파악이란건가? 뭐 노예상인을 하고 있는 입장으로서 대표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괜스레 어깨가 무거워졌다. 각광받고 있는 직업들에 비해 하대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참에 이미지개선에 성공해서 직업에 귀천이 없음을 증명하고 싶어졌다. 그러나 팀의 마음과는 달리 그녀의 한심한 눈초리가 뒤통수를 따갑게 달궈댔다. 사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높은 신, 분께서 노예상인 따위 노예 다음으로 추잡하게 생각하겠지. 팀은 될 대로 되라지. 라는 작은 푸념을 내뱉으며 귀를 후벼댔다.

“이일이 끝나면, 이참에 번듯한 직업을 구해보는 것은 어때?”

사실 세간의 시선으로 보자면 그녀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녀와 같은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귀족’ 보다 낮은 신분의 사람들은 말이다. 솔직히 일일이 대꾸하기도 귀찮아서 대충 얼버무리듯 대답해버렸다. 페리나는 그런 팀의 반응이 심심했는지, 가방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이거 받아, 이틀 동안 손해 본 수고비. 그리고 숙박비, 치료비 등……. 넉넉하게 넣었다니까 모자라지는 않을 거야, 모자라면 말하고”

우와, 돈 마저도 가치 환산이 안 되는 걸까? 책상위에 얹어진 지폐뭉텅이는 얼핏 보아도 두터웠다. 금화로 환산하면 어림잡아 10골드는 족히 넘을 것이다. 그는 역시 왕족이 최고다. 라는 줏대 없는 말을 읊조리며 돈 뭉텅이를 자신의 주머니에 가득 채웠다. 문득, 의구심이 들었던 그가 게슴츠레 눈을 뜨며 페리나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그녀가 시선을 회피하듯 고개를 돌렸다.

새침하게 보이는 그녀의 행동은 어울리지 않는 귀여움을 담고 있었다. 회피하는 시선사이로 보석을 수놓은 것 같은 그녀의 에메랄드빛 초록색눈동자가 영롱하게 반짝였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본적이 있던가, 새삼스레 전생에 어떤 죄를 지었는지에 대한 진심어린 걱정이 들었다. 이런 사람이 말이지…….

미모로 세계를 지배하겠다는 말을 뱉어내도 농담으로는 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세상에 존재하는 이슬은 다 먹고 살았을 것 같은 그녀가 독기를 품고 자신을 수차례 고문하고 죽이려들지 않았던가, 전생에는 분명 적지 않게 나쁜 놈이었다는 것을 그녀의 반응을 통해 짐작할 수 있었다. 뭐 바람피우던 남편이나 희대의 살인마만 아니라면 괜찮을 텐데. 그녀를 만난 탓인지 틈만 나면 쓸데없는 망상의 나라를 펼치는 팀이었다.

“이제, 가야되니까 그 돈으로 마구간 같은데 말고 객실로 옮겨 예약은 내가 해놓을게”

주섬주섬 외투를 걸치던 그녀의 시선에 걱정이 서려있는 것 같았다. 죽여 버리겠다느니, 독방에 처넣겠다니 해도 결국 마음만은 여자인 것일까, 진심어린 걱정에 쌓여있던 작은 앙금이 조금은 사라지는 것 같았다.

왕족과의 동행이라…….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 팀의 뒷모습이 왠지 모르게 평소보다 더 작고 초라해 보였다.


***

“그러니까- 이틀 동안 감금을 당하셨다?”

설리민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이유는요?”

이에 질세라, 셀린의 독촉이 이어졌다.

“그, 그게”

팀은, 최대한 조리 있게 설명하려 했다. 그러나 소식 없이 잠적했던 팀의 이야기들은 황당무계한 무용담과도 같았다. 그래서일까 아름다운 미녀들의 눈초리가 팀을 태워 버릴 듯이 뜨거웠다. 셀린이 눈을 게슴츠레 뜨며 팀을 훑어보았다.

“왕녀라고요? 거짓말을 하려면 그럴싸한 걸로 하시지”

확신에 찬 셀린의 반응은 차가웠다. 도대체 이틀 동안 어디를 싸돌아 다녔으면! 라고 읊조리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가출하고 돌아온 자식을 바라보는 어머니와도 같았다.

분노가 온몸을 감싸는 듯 했다. 그러나 가련한 두 눈동자에 차가운 이슬을 머금은 듯 눈물이 서려있어 팀의 마음을 더욱 착잡하게 만들 뿐이었다.

“그러니까 거짓이…….”

나름 침착함을 유지하려 노력하는 팀이었다.

“돈은 받았다면서요? 얼마나?”

“이런, 제기랄! 믿기 싫으면 믿지 마! 그리고 말버릇 좀, 어떻게 못하는 거야?!”

계속되는 닦달에 팀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 이윽고 분에 못 이긴 듯 넝마가 되어버린 옷가지를 벗으며 짜증을 폭발시켰다. 울분에 찬 팀의 표정에서 진심을 본 그녀들이 팀의 벌거벗은 몸 곳곳에 시퍼렇게 물들은, 멍 자국을 보며 속상하다는 듯 연신 가슴을 치고 통곡하는 시늉을 했다. 씩씩 거리던 팀도 그런 반응을 바랬는지 진정하며 그녀들이 챙겨주는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흠흠, 별일 없었는가?”

쉬어버린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팀이 물었다. 그녀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팀이 행방불명되었던 이틀간의 이야기들을 풀어놓았다.

1
이번 화 신고 2018-10-28 03:06 | 조회 : 2,035 목록
작가의 말
nic55791011

읽어주셔서 너무 감사드려요!

후원할캐시
12시간 내 캐시 : 5,135
이미지 첨부

비밀메시지 : 작가님만 메시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익명후원 : 독자와 작가에게 아이디를 노출 하지 않습니다.

※후원수수료는 현재 0%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