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노예를 소개합니다(1)

“으윽.”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 신음을 타고 엄습해온다. 얼마나 맞았을까, 떠올리기도 싫은 기억과 함께 극심한 두통도 동반한다. 어느덧 자유롭게(?) 풀려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팀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장발의 푸른 머릿결이 어깨를 타고 등까지 흘러내렸다. 유독 짙은 눈썹이 심하게 꿈틀거린다. 덕분에 그의 몰골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에 놓여있는지 눈에 띠게 드러났다.

안 그래도 평소, 하얀 피부가 고민이었던 팀의 콤플렉스에 한술 더 떠 시퍼런 멍 자국이 군데군데 자리 잡았다. 자세히 보지 않는다면 영문 모를 짐승에게 물어뜯긴 것 같은 착각도 들었다. 그러나 가장 괴로웠던 것은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있었다.

그냥 죽이고 싶으면 죽이고 싶다고 말을 하던가. 애초에 기억도 못하는 전생 이야기 따위 어쩌란 말인가, 그리고 무슨 근거로 팀이라고 확신하는지도 기가 찰 노릇이었다. 허나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이 있던가, 윗사람이 까라면 까야지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저기요! 밥은 쳐 먹여가면서 패던가해야지, 질문하고 패고 답답하다고 패고 존다고 패고 어쩌란 말이야!”

이렇게 맞기만 한지 2일째다. 인내심의 한계는 참을 수 없는 분노로 승화해 표출되었다. 마치 끓어오르는 불길에 오른 냄비가 괴로움에 못 이겨 소리를 내는 듯 했다. 이윽고 익숙한 구둣발 소리가 복도를 타고 또각또각 들려왔다.

“우리 불쌍한 팀, 이실직고하면 편해질 텐데……. 소고기를 처먹었나? 황소고집이네.”

익숙한 음성이 견고한 쇠문을 넘어 울려 퍼졌다. 그녀의 음성은 은은하게 신경을 거스르며, 팀의 착잡한 마음을 괴롭혔다. 이윽고 계속되는 조롱에 단념한 듯 단단한 벽에 기대며 황망한 표정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냥 좀 풀어주시면 안될까요? 최면 술사를 부리던가. 마법사를 데려오시던가! 피차 노력은 해봐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어쩌자고 두들겨 패기만 한답니까.”

팀의 복잡 미묘한 감정이 처량한 말투를 통해 전해졌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이틀이라는 시간동안 수도 없이 이루어졌다. 그때마다 페리나는 가소로운 듯 눈 하나 깜작하지 않으며 조소를 아끼지 않았다.

“마법사라면 네가 하이켄에 입성하기 전부터 고용해서 확인한 사실이야, 그 문을 통과하는 순간부터 확신했으니까.”

이틀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나 그녀의 말들은 영문을 알 수 없는 헛소리 같았다. 어쩌면 우리가 주고받는 언어가 다른 것은 아닐까? 황당한 생각임이 분명함에도 혹시나 모를 희망에 가, 나, 다, 라를 외치며 틀린 발음이 없는지 확인하는 멍청한 팀이었다.

그렇게 페리나와 대치한지 5분정도 흘렀을까 문득 팀이 의식의 흐름에 따라 입을 열었다.

“아이고 왕녀님, 한번만 봐주세요. 보잘 것 없는 상인새x가 갖은 것이 무엇이 있다고 갈취하려 듭니까? 그저 ‘꽃동네’ 라는 우스꽝스런 이름의 술집에서 한잔 걸쳐보려던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입니다. 살려주십쇼.”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한다. 어쩌면 그녀의 눈높이에 맞춰 대화하다보면 보응이 있지 않겠나? 라는 팀의 막연한 기대감에서 비롯된 의식의 흐름이었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는 달리 페리나의 분노가 전해지는 듯했다. 아니 정말로 그녀의 손을 타고 두꺼운 문이 떨려왔다. 덕분에 팀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 괴상한 작명센스는 페리나의 것이라는 것을.

“그……. 왕녀님? 사실 이름은 참 예쁜 것 같아요. 누구 센스인지는 몰라도 그 성품이 느껴집니다.”

이미 늦어버렸다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허나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믿음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녀의 심기를 건드린 대가는 가혹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꺼운 문짝이 ‘쾅’ 하는 굉음과 함께 열렸다. 그리고 익숙한 얼굴의 건장한 청년 서넛이 등장했고 불길한 몸짓으로 몸을 풀었다. 팀은 하늘에 기도하듯 눈을 감는다. 하지만 그의 기도와는 달리 익숙한 패턴으로 두들기기 시작했다. 얼마나 맞았으면 익숙해졌을까? 팀은 지속되는 폭행에 내성이 생긴 탓인지 거센 반항으로 주먹다짐을 동반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육체는 균형을 잃고 무너져 내렸다. 그들은 때려눕힌 팀을 둘러싸고 헉헉거리며 거친 숨소리를 내뱉었다.

몸 곳곳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낀다. 그들은 팀을 굴복시켰다는 기쁨보다 살아남으려는 자의 무서운 의지에 오싹함을 느꼈다. 이윽고 진정시켰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왕녀는 그들을 뒤로 물리고 팀의 귓가에 입을 옮겨 작게 속삭였다.

“내 제안을 받아들이면 살려줄 수도 있는데.”

절박한 사람의 의지란 어떤 것일까? 정신을 잃은 무의식 속에서도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도는 듯 했다. 이윽고 눈을 부릅뜬 팀이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 그런 건 때리기 전에 좀 말씀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팀은 당장에라도 무너져 버릴 것 같은 몸짓으로 균형을 잡고는 울상을 지었다.

“왜, 싫었어?”

“아, 아뇨.”

그는 꽃동네를 디스한것에 대한 응징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도 이제야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실낱같은 희망이 생긴 것이지 않은가, 아, 이제 이곳도 안녕이구나. 팀은 정들었던 4평의 넓은 독방을 둘러보며 쏟아지는 서러움을 견뎌내야 했다.

케케묵은 곰팡이냄새와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손톱자국들이 여기저기 새겨져있다. 그간의 고통이 얼마나 괴로웠는지 피부로 와 닿는 것 같았다. 그 덕에 번듯한 벽돌로 이뤄진 공간이 되레 이질감을 느끼게 한다. 짙게 깔린 어둠은 진절머리가 났다. 4평 남짓의 공간을 밝히는 빛이라고는 사람 얼굴이 겨우 들어갈 크기의 사각 쇠창살을 통해 내리쬐는 것이 전부였다.

옵션으로 화장실까지 겸비한 이곳은 리오난의 수도 하이켄에 위치한 이름 모를 독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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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8-10-28 00:17 | 조회 : 3,171 목록
작가의 말
nic55791011

읽어주셔서 너무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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