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제 1차전(3)



“바보 같은 결정이네. 정말.”

레이첼은 중얼거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해는 완전히 떠올라 청명한 빛을 띄고 있었다.

그 빛은, 누군가의 눈 색과 일치했다.


//


그런 적이 있었다. 아무리 피하고 날조해도 꼭 한번은 최고 단계 봉사, 즉 무식하게 힘만 있고 제어력은 바닥을 치는, 그 어린 올리스들을 돌보는 일을 벌로써 맡게 되었다. 그 일이 왜 그리도 싫었는지. 하지만 내가 ‘경계 밖’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도 그 덕분이었다.

전혀 다른 올리스를 가지고 있지만, 모습만은 꼭 닮은 두 여자아이. 아카데미 내 미취학기관에 ‘쌍둥이’라 불리는, 혈연관계가 있는 두 자매가 들어왔다. 그 아이들을 보며 우리는 처음으로 기억을 잃은 후, 가족이라는 개념에 봉착했다.

그러나 이상한 점은 그 뒤로도 더 많은 쌍둥이들이 들어왔지만 단 하나도 같은 속성의 올리스를 가진 이들은 없었다는 것. 그 사실은 몇 년 뒤 보개 된 어느 책에서, 같은 혈연 안에는 공통의 속성이 존재할 수 없음을 증명하는 내용을 읽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아리엘......”

그렇게 많은 아이들을 억지로나마 돌보며, 그 속에서 가끔씩 느낀 즐거웠던 감정보다 훨씬 큰 무언가가.

“-어디 있는 거야.”

그 아이를 볼 때 자리하고 있었다.

아, 주변으로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바람에 물결친다.

그 울림은 마치,
‘분명 처음 보는 아이었지만 그 아이와 같은 나의 눈 색이, 어디선가 봤었던 그 기억이.’

희미하고도 어렴풋이 기억나는, 파도소리......?

<하율. 그곳은 바닷가의 성. 참제비고깔이 피어있는 가문. 아리아를 만나.>

어.

어라.

이게 내, 기억?

“으아아아아아아아악!”

나는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유채 꽃 사이로 주저앉았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


늘 그러하듯이. 오늘도 바람이 아리엘을 깨웠다.

-일어나, 아엘. 오늘 네가 그들을 꼭 찾아야한다면서 어제 걱정했잖아.-

바람의 소리, 저보다 서너 살 많아 보이는 소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은 언젠가부터 당연한 일상이었다. 기억이 지워진 후로도, 올리스에 관한 기억은 어렴풋하게나마 남아 있었기에.

아마 아엘이 나이를 조금만 더 먹었더라면, 아카데미 내의 거의 모든 소리는 원하기만 한다면 능히 들리고도 남을 터였다. 그러나 아카데미는 상상 이상으로 정말 넓었고, 하여 아엘은 지금 헤매고 있었다.

물론, 헤매고 있었다기엔 너무나 편안하게 잠들었던 셈이지만.

레이첼의 예상대로, 아엘은 귀족거주지에 떨어졌다. 당황하던 아엘은 곧 이곳이 시연의 손에 이끌려 온 저택 근처란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지평선마저 보이는 유채꽃 밭도. 저택의 가로질러 뒷문을 통해 나가면 보이는 그곳을 횡단하여-언니는 그 너머 숲이 있다고 알려줬으니-숲에 다다르는 것은, 위험부담이 너무나 컸다.

그도 그럴 것이, 말을 전달하거나 소리를 듣는 것은 그나마 쉬웠지만 바람을 ‘조종’하는 것은 그녀의 주 능력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만약 시도할 경우 아엘도, 그를 도와주는 바람도 지쳐 오도가도 못할 신세가 될 것이 뻔했다.

아엘은 어젯밤 에이로나 저택, 그나마 하루 잔 그 방에서 묵었다. 그리고 지금은, 어젯밤 미뤄두었던 문제를 해결할 차례였다.

바람이 퍼지고, 그녀는 이 힘의 범위 안에 있는 물건, 동식물, 사람들의 존재를 인식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무리지어 있지만, 거주지 내 귀족 사택은 거의 침범당하지 않았다. 해봤자 널따란 정원에나 사람이 있을 뿐.

“그렇다면 유채꽃밭과 맞닿아있는 길은 텅 비어있단 말이지.”

방을 나선 아이의 발걸음이 빨라진다.

*

아침의 찬 공기를 느끼며, 아엘은 에이로나 가의 뒤뜰을 바삐 걸어 마침내 저택을 벗어났다. 마차 하나가 겨우 지나갈 길, 그리고 그 너머 광활한 유채꽃밭을 보았다. 노오란 물결이 바람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요동치며 마치 파도치듯 물결을 만든다.

“언니오빠들은 아마, 저 너머에 있겠지. 닿을 수 있을까.”

아엘이 중얼거리듯 묻는 말에 바람이 답했다.

-정말 네가 노력하고, 바란다면. 그런데 네 체력이 감당 할 수 있을까?-

차라리 바람을 조종하는 일은, 그나마 체력소모가 덜하다. 애초에 율은 최상급 올리스이니, 기초체력이 좋았기도 하고. 그러나 바람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해서 그들과 ‘소통’하는 많은 체력을 요했다.

사실 아엘의 올리스는 뛰어난 편이었다. 하지만 그 올리스를 감당하는 신체가 그 힘을 다 뱉어내지 못할 뿐.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 육체적 능력과 그 효용성이 높아지며 자연스레 나아질 테지만, 문제는 지금이었다.

그러나 아엘은 시도했다. 그들을 믿고, 그들에게 닿길 바라며.

“도와줘, 또 다른 바람에게 닿을 수 있도록. 하여 그들이 나를 알아 챌 수 있도록. 바람을 조종하는 자에게 소식을 전해줘, 내가 여기 있다고.”

-알았어.-

힘겹게 말을 마치고 체력과 올리스, 양쪽 모두 바닥난 아이는 스러졌다. 감긴 눈을 스치는 바람이, 아엘을 에이로나 가의 뒤뜰로 옮겼다. 아이가 얼른 깨어나 그들을 찾길 바라며.


//


-...엘이 바람...종하는..자...에이로...뒤뜰.있다...-

율은 가느다랗게 눈을 떴다. 아, 의식을 잃었던 건가. 대체 그게 뭐길래...

반복되어 들려오는 소리가 그를 깨웠다. 위로 보이는 유채꽃, 드리워진 그늘 아래 그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해가...벌써.”

하늘은 아직 붉게 물들지 않았지만, 노을이 질 기미가 보이는 것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1차전이 끝날 시각은, 해가 완전히 질 무렵.”

초조하게 날아오르려는 그를, 희미한 소리가 붙잡았다.

-...엘이 바람...종하는..자...에이로...뒤뜰....있다...-

드문드문 끊어지는 말을 들은 그는, 땅을 강하게 박차고 날아올랐다. 여태껏 날았던 속도 중 가장 빠르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난 그는, 정말로 절박했다.

다행히도, 그 전언대로 아엘은 에이로나 저택 뒤뜰에 고이 누워있었다. 바람이 아이를 돌보는 듯, 주위에는 찬 저녁바람 대신 조금이나가 찬 기가 가신 바람이 맴돌고 있었다.

“힘을...완전히 소진한건가.”

그만큼, 아엘은 그들을 믿고 있었다. 만약 저가 쓰러져있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면 그 끝은 결국 죽음일터이니.

아엘은 안아 든 그가 꽤나 빠른 속력을 내어 숲으로 향했다.

*

그가 숲에 도착 할 무렵에는 해가 거의 뉘였뉘였 저물고 있었다. 아엘에게 ‘아공간’의 개념- 대부분의 올리스는 자신의 카드를 그곳에 보관하니까-을 가르치치 않을 것을 행운으로 여기며, 율은 교복 마이 주머니에 있는 카드를 빼내었다.

“율! 왜 이렇게 늦게...”

가온이 뭐라 중얼거릴 새도 없이 그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해가, 완전히 넘어가지 직전이었다.

“빨리, ‘판’을 건네!”

시연이 아공간에서 판을 꺼내는 사이, 율은 자신의 반지를 아엘에게 끼우곤 카드를 판 위에 올렸다.

‘바로 올라와야 하는 것이, 맞는데-’

그 순간, 재미있다는 듯 웃음기가 가득한 유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슬아슬하게, 이로써 제 1차전의 끝을 알린다,]

그와 동시에 아엘의 카드가 사라지고 바람의 반지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


“재밌네, 그러면 둘 다 자격이 생긴다는 건가.”

율은 아엘에게 반지를 끼우고, 반대쪽 손으로 카드를 올려놓았다. 그러니까 일시적으로, 율과 아엘은 같은 ‘자격’으로써 그들을 팀에 속하게 된 것이다. 엄밀히 말해 반칙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그 아이가 있는 것이, 또 그가 빠진다는 것이 어떤 변수가 되어,”

나의 종말을 끝낼지, 그는 진실로 궁금했다.

“뒤바뀔 끝이, 전과 다르게 흘러가는 변수는 대체...”

올리스의 게임은, 겨우 1차전을 끝냈을 뿐이었다. 과거와, 앞으로 다가올 미래는 한참 남아있었다. 그는 그것이 무척이나 기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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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6-04-09 19:36 | 조회 : 901 목록
작가의 말
시연

원칙적으로 혈연관계의 올리스는 같은 속성을 가질 수 없습니다. 오늘도 즐겁게 즐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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