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제 1차전(2)



“나의 착한 아가씨.”

물결치는 나무들 사이로 들리는, 잎사귀들이 부딪혀 내는 청명한 숲의 소리.

본 학교건물 뒤편으로 이동된 래이첼은 무사히 숲에 도착했다. 다만 그 길 안에서 만난 것은, 새하얀 실루엣만이 보이는

“너에겐 선택지가 있어.”

그녀의 잔인한 후견인.

“선택지라니.”

소녀는 중얼거렸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지만. 귀족이란, 후계자란 이름의 허울은 그에게 이런 장난거리를 만들어주는 것일 뿐.

“레이첼, 미네로프 에이로나. 완벽한 에이로나 가의 가주. 그 이름은 네가 마법을 쓸 수 있는 ‘귀족’이기에,”

당신은 언제나 날 우아한 장난감으로 취급했지.

“주어진 거야.”

그저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갔으면. 그래서 재발, 이 게임이 끝나고도 모두가 무사하기를.

그렇게 바라는 그녀를 조롱하듯, 그는 청명한 숲 사이로 슬며시 소녀에게 다가와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그가 내민 카드는, 참으로 잔혹했다.

“그래서, 네가 가진 또 다른 선택지는.”

마법을 쓰지 못하는 자에게는, ‘귀족’이 아닌 자에게는 절대 주어지지 않는 이 선택지는

“이 게임에 참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원한다면, 결계 밖으로 나가게 해 준다고.”

같잖은 가면을 쓰고 있는 소녀가,

폭풍에 떠밀리고 있는 네가 도피할 마지막 기회.


//


‘네가 가진 또 다른 선택지는 이 게임에 참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원한다면, 결계 밖으로 나가게 해 준다고.’

그가 그 말을 내뱉은 순간, 무한대의 생각이 뇌를 점령했다. 그와 맞물려 맑게만 보였던 숲은 이미 진득한 칠흑의 어둠과 뒤섞여 진득하게 나를 덮쳐왔다.

자연스럽게 손을 쥐자 식은땀이 배어나왔다.

만약 그 아이들이 나를 배신한다면, 예상이 모두 어긋나 그들이, 혹은 내가 죽게 된다면.
그럴듯한 명분아래 펼쳐지는 이 게임이 유안의 손 안에서 펼쳐지는 한 때의 유흥거리 임을, 누구보다도 가장 잘 알고 있었기에 나는 초조했다.

그래서 내가, 나의 가치를 입증하지 못해 결국 유안에게 쓸모없는 말로 전락한다면.

그렇다면 ‘그’는-

“유안.”

그 소년은 내게 뭐라 말할까.

쓸모없는 생각에 한숨을 쉬며 생각을 정리했다. 무언가가 박힌 듯 아려왔다. 그 와중에도 주체못할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한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다.

“당신은 그 사실을 알고 있나요.”

그가 흥미롭다는 듯 쳐다보는 시선이 불쾌했다.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행동하며, 문장 사이의 간격을 두었다.

아무리 그의 속내를 모른다 해도 당신이 지금까지 보여준 행동으로 유추할 수 있는 것. 그가 지금 이 게임을 ‘시연’이 경계를 나가려는 순간 선포한 것도. 그 아이가 귀족이 된 것도. 그 이전에 결투에서 살아남게 된 것도, 심지어 그 결투 후 보여준 아덴의 어렸던 시절에 관한 ‘기억’도.

그 모든 것이 당신이 시연을, 어쩌면 당신이 가장 중요하게 둔 말이라는 걸 가리키고 있는데.

“후견인께선 당신의 생각보다 아덴 에이로나를, 더 소중한 존재로 두고 있다는 것을요.”

그 말에 유안은 낮게 조소했다. 한참을 그렇게 웃은 그는 비로소 말했다.

“......내가? 그 아이를?”

굉장히 장난스러운 말투였지만, 이어지는 말은 살기로 진득했다.

“시연을 감히 내가 소중히 여긴다고. 나의 착한 아가씨, 웃기지 마.”

그러나 덧붙이는 그의 말은 어쩐지......

“그가 아니야.”

이상했다.

“자, 레이첼. 이제 네가 답할 시간이야. 어떤 선택지를 고를 생각이지?”

진실도, 그렇다고 거짓 또한 아닌 말. 유안의 말이 진실마저 아닌 것으로 만드는 행동. 그 행동은 분명 그 아이를 굉장히 조심스럽게 다루는 듯 했다.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 다시금 그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이 내민 선택지는.”

무언가 어긋났어.

수장취임 결투 때 느꼈던 것과 똑같은 괴리감이 다가왔다. 증언이 엇갈린다.

“아덴 에이로나. 그에게도 해당되어, 귀족으로서의 특권이 주어지는 건가요.”

나는 이렇게 물으면서도 그 답을 알고 있어.

아니라는 걸.

그렇기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의 세계에서 뛰쳐나갈 생각 따윈 내게 없어. 그 빗장을 풀고 나가는 순간, 버려지게 될 걸 누구보다도 잘 아니까.”

그의 손에서 버려져 판 아래로 떨어진 말은, 산산히 부셔져 깨지고 만다.

그 말에 유안은 의외라는 듯 말했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건 ‘그 아이’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야, 라고 말하며.

“그녀의 아들은, 이 게임을 피할 수 없어. 그 기회를 가질 자격이 없거든.”

그렇게 말하는 유안의 모습은 마치 환영과도 같아서, 그 때 그 사람의 이름이 나오지 않았더라면. 훗날 나의, 그 모든 대답은 완성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로즈마리의 아들은.”

로즈마리.

그 뜻은 바다의 이슬.

유안의 모든 행동은 그곳을 향해 있었다. 그렇기에 ‘시작’은 그녀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런 로즈마리가 의미하는 것은,

아름다운 추억과

‘나를 생각해 주세요.’


//


레이첼은 길었던 회상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밤을 샌 탓인지 머리가 무거웠다.
이제 겨우, 밤이 지났다. 모두 밤을 샌 그들은 서서히 떠오르고 있는 일출을 바라봤다.

시연은 어재 떨어진 판을 다시 생성시켰다. 아엘이 나타나지 않아 미루던 일이지만, 일단 다른 팀원들에게 까지 이 상황을 이해받을 수 없으니.

그의 손에서 녹아들 듯 형성되어 있는 새하얀 ‘판’은, 마치 스스로 빛나는 듯 했다. 등록을 하기위해 차례로 자신의 올리스를 판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그것이 반지로 변해 손에 끼워지는 형식이였다.

그러나 적어도 율에게는, 그럴 시간이 없었다. 하는 둥 빠르게 판에 등록하고는 바람을 휘감았다.
아리엘, 아엘. 그 아이를 찾아야한다. 그 일념 하나로 바람을 조종해 날아올랐으나, 곧 레이첼이 펼쳐놓은 방어막이 막혔다. 그 힘이 레이첼의 뜻에 따라 강하게 율을 튕겨내며, 다시 나무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왜!”

화난 듯 벌떡 일어선 율은 레이첼을 쏘아보며 분에 못 이겨 소리쳤다.

“진정해.”

별 일 아니란 듯이 말하는 그녀를 보며, 율은 속이 타들어가는 듯 하였다.

“생각해봐. 네가 혼자 그 아이를 찾을 확률이 얼마나 되지? 해가 떠올랐으니 우린 당장 다른 팀이 공격해도 모르는 일이지. 지금 바로 싸워야 할지 모르는데, 넌 바람을 ‘조종하는’ 올리스이지 그 소식을 듣는 능력은 전무해. 아리엘은 숙달되지 못한 올리스이고.”

“그렇다고 해도!”

“그 아이는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 넓디넓은 이 아카데미 지리를 다 외우진 못했을거야. 아마 가본 것으로 짐작되는 곳은 기껏해야 학교, 기숙사, 연무장, 급식소 뿐. 들판은 시연이 찾았을 테고, 내가 기숙사는 얼추 한바퀴 돌았지. 그 외 숲이나 호수 등은 이미 저 아이들에게 인상착의를 확인했잖아?”

사실이었다. 같은 반이었던 그들은 한 번씩은 아엘을 마주한 적이 있었다.

“남은 곳은 오직, 귀족거주지 뿐.”

수긍 한 듯 율은 잠자코 자리에 앉았다. 그 위로, 레이첼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곳에서 그 아이가 아는 곳은 에이로나 가 또는 프롤르네가의 사택뿐이지. 아마 유안은, 그 내부에는 순간이동 시키지 못했을거야. 그러기엔 그 세력이 큰 데다, 그럴 이유도 없으니까.”

그 옆에는 흐드러지게 피어난 유채꽃 밭이 있다.

아마 그곳일 거라 말한 레이첼은 안색을 굳혔다. 이렇게 마냥 낙관하기엔 아리엘의 올리스는 약하고, 스스로도 어리숙했다.

무엇보다, 지금 율의 행동은 굉장히 거슬리는 점이 있다.

‘율은 아리엘을 이렇게까지 찾을 이유가 없어.’

레이첼이 방어막을 풀자 바로 날아가는 율의 모습이 빠르게 작아졌다.

‘어째서 지금까지 지내온 친구들에게 피해가 갈 만큼, 그 아이를 찾는 걸까.’

그녀는 무심코 손을 내려다 보았다. 위험하게 반짝이는 반지가 보였다.

“바보같은 결정이네. 정말.”

레이첼은 중얼거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해는 완전히 떠올라 청명한 빛을 띄고 있었다.

그 빛은, 누군가의 눈 색과 일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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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6-04-02 20:52 | 조회 : 1,236 목록
작가의 말
시연

오늘도 즐겁게 봐주세요.로즈마리 라틴어 어원이 바다의 이슬입니다. 꽃말이 ‘아름다운 추억’과 ‘나를 생각해 주세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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