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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마이 하우스 라이프를 즐기며 내가 나올 차례를 기다리던 12월 19일부터 다과회가 열리기 8일 전인 오늘 4월 18일까지, 그 4개월에 달하는 시간 동안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다. 마치 이전에 티파티를 다녀오고 한 달을 틀어박혀 지냈던 시간처럼 사용인들과 더 친해졌다. 내가 전에는 관계를 회복했다고 말했던가? 아니, 이번에는 전혀 달랐다. 무려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주고, 형식적인 인사를 제외하고 먼저 인사를 해주며, 나에게 웃어주고, 심지어...심지어! 대화란 것을 할 수 있게 되었단 말이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이냐면! 처음에는 내가 말을 걸어도 인형같이 뻣뻣하게 아하하..안녕하세요. 아가씨, 하고 도망가던 그 많은 시녀들이! 나를 보고 웃으면서 인사를 해준다고! 내가 드디어..오빠말고 편하게 웃으면서 말할 수 있는 친구들이 생겼어! 그 동안의 내 노력에 칭찬을 보낸다.

***

들뜬 마음으로 다과회에 갈 준비를 했다. 마치 주말을 기다리면 평일이 더 느리게 지나가는 것처럼, 로세드가 굽는 맛있는 쿠키를 기다리고 있을 때면 쿠키가 정말 느리게 익는 것처럼. 다과회를 정말 기대하자 친구를 만들던 세 달을 제외하고 그 사이의 8일이 꼭 8년 같았다. 어쩌면 80년? ..아니 그건 너무 갔다. 80년이면 벌써 내가 죽고도 한참 남을 시간이잖아. 조금 촉박하게 잡으면 환생도 할 수 있겠다. 시답잖은 생각을 하면서 시녀에게 나의 얼굴을 맡겼다. 지금 내 화장을 도와주는 이 시녀는 라비. 원래 이름을 외우지도 않았던 시녀지만 요새 시녀들이랑 친해지면서 모두의 이름을 외우기 위해 노력중이다.

라비의 손이 바쁘게 팔레트와 내 얼굴을 오간다. 지금은 눈을 감고 있던 터라 내 얼굴이 어떤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간지러운 붓이 감은 눈 위를 빠르게 색으로 채우고 있다는 사실만 알 수 있었다. 곧 라비의 손길이 멈췄다. 내 얼굴이 궁금해서 눈을 뜨고 싶었으나 저번에 한번 급하게 눈을 떴다가 가루가 눈에 들어간 적이 있으므로 기다리자. 아니나 다를까 잠시 느껴지지 않던 붓이 다시 얼굴 위로 올라왔다.

''눈 뜨셔도 되세요, 아가씨.''

힘을 빼고 살짝 감고 있던 눈을 뜨자 거울로 내 얼굴이 보인다. 최대한 순해보이게 해달라는 내 부탁에 따라 연하게 한 화장이 제법 잘 어울린다. 하기야 이 얼굴에 뭔들 안 어울리겠어.

분홍빛의 파우더로 눈 주위를 연하게 덮고 검은색으로 눈꼬리를 아래쪽으로 뺐다. 입술은 붉은색에 가까운 코랄. 볼에도 홍조를 띤 것처럼 입술보다 살짝 연한 파우더를 발랐다. 원작에서도 갑갑하게 느껴졌던 피부를 덮는 화장도 거의 하지 않았다. 어차피 안해도 괜찮은데 지금까지 내가 뭐하러 이런걸 한걸까. 하이라이트는 눈웃음을 지을 때 두꺼워지는 눈 아래 부분에 약간. 이정도면 좋다.

''아아..정말 만족스럽구나. 라비야 고맙다.''

그녀는 내 말에 활짝 웃어보이고 눈을 빛내며 방에서 나갔다. 역시 아가씨는 꾸미는 보람이 있어! 하는 목소리가 들린 건 내 착각이 아니겠지.

드레스 룸으로 자리를 옮긴 나는 과하지도 모자르지도 않은 장식이 달린 진한 파란색 드레스를 골랐다. 남색과 닮은 푸른빛의 바탕에 그것보다 조금 밝은 파란색의 레이스. 물방울 모양으로 만들어 하나 하나에 꽃 모양을 새겨놓은 푸른 빛의 오팔을 끝자락에 달린 레이스 위에 겹쳐 일정한 간격을 두고 빙 둘러 걸을 때마다 조금씩 반짝거렸다. 손등을 조금 덮는 소매는 속이 약간 비치는 얇고 부드러운 천으로 되어있고 그 천을 드레스의 목부분을 덮게 하여 물결처럼 흔들리며 내려오게 만들어졌다. 실린을 포함한 시녀들 몇몇을 데리고 드레스를 입는것을 돕게 한 후 가운데의 동그란 오팔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검은 리본 장식을 머리에 끼워달라 말했다. 머리카락이 은색이어서인지 똑같이 하얀 리본은 잘 어울리지 않는 듯 했다.

준비를 다 끝내고 거울을 보자 잘 꾸며진 내 모습이 거울 전체에 비쳤다. 음, 합격이다. 어깨와 허리에 힘을 주고 몸을 꼿꼿이 폈다. 내가 희미하게 미소짓자 실린이 환하게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는 방 밖으로 나갔다. 아마도 마차를 불러오러 나간 것이리라. 눈치가 빠른 것이 아주 만족스럽다. 거울 앞에서 마지막으로 웨이브 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두 번 꼬은 뒤 아래로 천천히 잡아당기자 부드럽게 풀리며 흘러내렸다. 아, 합격정도가 아닌가?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이 정도면 수석이다.

***

여주인공이 여는 다과회여서일까. 말이 될 것 같지는 않지만 무려 황태자가 이 곳에 납셨다. 그래 내가 왜 저번 생에서는 이런걸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았을까. 황실에서 있을 일로도 바쁠 사람이 왜 여기있는거야? 이거 직무 태만이라고! 아무나 빨리 잡아가요! 여기에 일 때려치고 연인보러 나온 황태자..그래 누가 너를 잡아갈 수가 없겠구나, 하..하하... 내가 무슨 베짱으로 여기에 오겠다고 설친걸까. 셀레아는 다과회를 연 입장으로 바쁘고 켈로이스는 그런 그녀를 조금씩 도와주면서 따라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마치 스토커 마냥 힐끔힐끔 살피며 멀리 떨어져서 쿠키들을 집어 먹고 있었다. 열심히 꾸몄는데 한 여름에 털 망토를 챙기는 것 만큼 쓸데없는 짓이었다.

'..크랜베리 들어간거 맛있어. 주방장 데려가고 싶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렇게 경계하기에는 쿠키들이 너무 내 취향이었다. 그래 맛있는게 최고야.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켈로이스 때문에 쿠키도 끊었었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남은 조각을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말린 크랜베리가 입안에서 달콤하면서도 살짝 새콤하게 씹혔다. 하...너무 좋아. 순식간에 집중하던 대상이 주인공 커플에서 쿠키로 옮겨가버린 나는 손가락에 붙은 쿠키 가루를 혀로 슥 핥았다. 물론 다른 사람들의 눈치는 좀 봐야했지만 원래 이런건 손가락에 묻은게 맛있는거야! 켈로이스에게 조금이라도 더 자기관리가 철저한 여자의 느낌을 주기 위해 절제했던 내 전생에서의 한을 푼다는 기분으로 입 속으로 빠르게 하나씩 집어넣었다.

'..내가 언젠가 전 세계 제과장인들을 모아서 우리 집 앞에 각자 가게 하나씩 준다.'

이래서 돈 많은 사람이 무섭다. 그리고 실제로 내가 마음만 먹으면 그 짓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더 무섭다. 돈의 힘이란...그래서 더 좋다고. 이런 설정은 환영이다. 잡생각에 빠져 혼자 머리를 끄덕이고 있을때 누군가의 시선이 나에게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엥, 뭐지..아, 주인공 커플이구나.'

'..허? 주인공 커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에 남아있던 쿠키 하나를 마저 삼킨 뒤 주위를 한 번 둘러봤다. 역시 엄청난 악녀 버프. 동화책 초반에 내 주위에서 살랑거리던 엑스트라들을 제외하고는 없었다. 가끔씩 찾아와서 인사하고 격식처리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나를 굳이 끼워넣고 싶지는 않다는 분위기다.

그래서 그런지 저들이 쳐다보고 있을 사람은 이 근처에서 나 밖에 없었다. 부산스럽게 떨릴 눈동자가 느껴졌지만 멈출 수 없었다. 당연한 전개다. 주인공 커플이 나를 쳐다보게 되는건. 다만 한가지 확실한건 나를 적의에 가득찬 시선으로 봐야하는 것은 여주인공인 셀레아가 아니라 남주인공인 켈로이스였어야 했다. 여주인공을 지키겠다는 일념과 무서울 만큼 악행을 저지르고 다니는 나를 향한 분노를 담아서 나를 쏘아보면서 여주인공을 자신의 뒤로 숨겼어야 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 반대. 켈로이스는 셀레아를 따라 나를 확인하고는 안절부절 못 하는것이 떨어진 이 곳에서도 보였고, 셀레아는 그런 그의 앞에 서서 차갑게 식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일린은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그녀가 장갑을 쓰지 않고 나온 것은 훌륭한 선택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장갑은 이제 못 쓰게 되었을테니. 셀레아의 드레스가 망가졌다는 사실을 들은 건지 켈로이스는 계속해서 에일린을 노려보고 있었고, 그의 넓은 등 뒤로 감춰진 셀레아는 켈로이스의 어깨 너머로 에일린을 보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는 에일린의 적대심 어린 눈과 자신의 눈을 마주할 때마다 입모양으로 이해해요, 저는 괜찮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같은 친절한 말을 건네려고 했다. 오히려 걱정되리만큼 착한 그녀는 처음 받아보는 자신을 향한 분노에도 용서하려고 했다. 그 모습을 에일린은 그저 순수한 호의로 받아드리지도, 인정하지도 못했다, 아니 않았다. 에일린 스스로도 알고있듯 셀레아는 눈부셨고, 에일린은 추했다. 그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도 추하기 짝이 없었다.'

***

네.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조금 추했지. 아니 '조금' 이 아니라 많이? 어찌되었든 그들이 나를 본 순간부터 이런 삼자대면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셀레아는 급해보이던 일을 빠르게 처리하고 나에게로 왔다. 켈로이스는 그런 자신의 연인을 따라 조심스럽게 나에게로 향했다. 저 사람은 나한테 사과도 했으면서 왜 저러지. 설마 이제와서 셀레아를 지키겠다! 할리..는 없겠구나. 내 앞에 와서도 여전히 셀레아의 앞이 아닌 옆에서 우물쭈물하는 모습이다. 설마 사과로는 풀리지 않는다는 걸까. 말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셀레아의 다과회에 온 이유는 단지 내 악녀루트의 건재함을 시험해보기 위한 것 뿐 아니라 셀레아에게 사과하기 위함도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오자마자 셀레아 피하기 바빴지만 어쩔 수 없다. 그녀의 근처만 가도 쌓아올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내 양심이 파사삭 하고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다. 거기에 세트로 심장이 멈추는 듯 아픈데 내가 어떻게 버티겠는가.

'내가 전생에서 가졌던 죄책감은 거짓이라는 것.'

'진정 무거운 죄책감이란 상대가 근처에 있기만 해도 괴롭다는 것.'

'사과하는 데에도 때가 있다는 것.'

'이미 깨진 관계를 되돌려놓는 것이 힘들다는 것.'

'사과하는 것이 힘든 일이라는 것.'

''하지만 사과하지 않으면 서로 더 힘들어진다는 것.''

새롭게 깨달은 것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라오는 동안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나는 더 이상 그곳에 당당히 서 있을 수 없었다.

흑발과 흑안이 동시에 나타나는 것은 황가 뿐. 그러나 우연, 아니 설정으로 인해 그 상징을 가지게 된 셀레아. 그 덕에 평민이었던 그녀는 황제에게 불려가고, 황태자의 눈에 든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가족은 백작령을 받게된다. 자연스럽게 그녀를 따라다녔던 평민 출신이라는 꼬리표. 과거에 그녀는 이 모든 영애들보다도 낮은 신분이었다. 그러나 내가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은 대상도 그녀였다.

남주인공에게 떠밀려서 억지로 숙인 것도, 그녀가 여주인공이기 때문에 숙인 것도, 미래의 황태자비이자 황후가 될 사람에 대한 격식 때문에 숙인 것도 아니었다. 그저 나로 인해 힘들었던 사람에 대한, 사람과 사람간의 최소한의 예의이자 지키기 어려운 것. 울 것 같았다. 고개를 숙인 것에 대한 수치심 때문이아니라 나의 행동에 대한 수치심 때문에. 마치 누군가 내 머리를 힘껏 누르는 것처럼 원작에서 한번도 숙여지지 않던 내 머리가 숙여졌다. 이 다과회에 와있는 그 어떤 영애들보다도, 이 세계에서의 작위만 따진다면 셀레아보다도 높을 공작 영애. 지금 이 순간 내가 그녀의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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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8-07-18 17:19 | 조회 : 655 목록
작가의 말
Elloz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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