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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뿌둥한 몸을 쭉 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흠..뭔가 할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멍한 눈빛으로 방의 한 구석을 쳐다보다가 천천히 내려가는 눈꺼풀에 혼자 놀라며 고무공처럼 침대에서 튀어나갔다. 오우..눈에 갑자기 은색 실이 보여서 놀랐잖아. 내 속눈썹이란걸 깨달은 나는 눈을 한번 크게 떴다가 감았다. 여러번 반복하고 있자니 잠이 좀 가신 기분이라 바로 씻으러 들어갔다. 내가 나갔다가 온건 이미 피엔스에게 보고받았을테니까, 갑자기 또 틀어박히면 이상해 보이겠지? 깨끗하게 씻고 거울을 확인하니 맞았던 뺨은 완전히 나아있었다. 잠 좀 잤다고 그새 나았나보다, 다행이네. 아직까지도 맞았을 때의 아픔이 볼에 느껴지는듯해서 괜히 볼을 한번 툭 건드렸다.

따듯하던 욕실에서 나오자 나름 두툼하다고 생각했던 잠옷이 갑자기 추워지기 시작했다. 자고 일어났을 때까지만 해도 몰랐었는데. 그땐 이불 안이어서 몰랐나? 물기가 조금씩 말라가면서 더 추워지는 느낌이다. 떨어져있는 두 허벅지를 사이가 친해보이게끔 최대한 붙여가며 움직이려고 해봤지만 오리같이 뒤뚱거리는것이 상당히 웃기는 모양새가 되어 그냥 포기했다. 여기에 실린이 있었다면 또 웃음이 터졌겠지. 오늘 저녁에는 더 두꺼운 잠옷을 꺼내놓으라 해야겠다. 시원한건 좋아도 추운건 진짜 싫어. 곧 있으면 오게될 겨울의 추위를 상상하자 저절로 몸이 부르르 떨린다. 지금도 추운데 겨울이라니. 우리 델키아 제국은 추워봤자 영하로는 떨어지지않는 온화한 곳이지만 그래도 겨울은 이름만으로도 춥다.

몸을 양 팔로 감싸고 부르르 떨면서 내려오자 오빠가 나를 보고는 놀라서 담요를 가져오라 명령한다. 시종 하나가 빠르게 걸어 어딘가에서 두툼한 담요를 가져온다. 오빠가 담요를 받아들고 내 몸을 감싸 데려간다. 호오..새로 샀나 이거? 보들보들하니 느낌 좋구만. 그렇게 담요의 느낌에 감탄하며 오빠가 이끄는대로 가서앉았다. 음? 테이블? 갑자기 왜? 밥 먹으려는건가? 고개를 갸웃하자 오빠가 실린을 불러 귓속말을 한다. 이에 실린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내 눈치를 보더니 2층으로 올라간다. 잠깐 거기는 내 방이라고?

''오빠 실린한테 뭐라고 한거야..!''

''아아..별거아니야. 그냥 니 방가서 타르트랑 쿠키 좀 가져오라고 했지?''

능청스레 웃으며 내 간식을 가져오라고 시켰다는걸 너무 당연하게 말한다.

내 방에 숨겨져있을텐데..실린이 찾을수 있을..

''니가 침대 아래에 있는 서랍 안에 간식 숨겨 놓는다는것도 말해줬으니까 걱정하지마.''

어?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순간적으로 반말이 튀어나올뻔 했다. 진짜 어떻게 아는거지..?

''그것도 비밀 장소라고 숨겨놨어. 이미 다른 시녀들도 알고있을껄?''

아 망했어요. 숨길만한 다른델 찾아봐야겠다. 한껏 볼을 부풀리며 째려봐주자 슬쩍 계단으로 시선을 돌리며 헛기침을 한다. 타이밍 맞춰 실린이 조심조심 간식을 들고 계단을 내려온다.

''그래 여기에 내려놔줘. 아 그리고 로세드에게 준비한 차 내오라고 해.''

아..아? 맞아, 같이 차 마시기로 했었지? 이게 그 할일이었구만. 흠흠..나는 몰랐던게 아니다. 전혀 아니다. 아마 아닐..걸? 내 이런 생각을 안건지 오빠는 피식, 웃으며 머리카락을 흐트린다. 우씨 또 빗어야 되잖아. 머리를 두 손으로 눌러서 가렸다. 그제서야 내 머리에서 손을 떼고 다시 주방 쪽으로 눈을 돌린다. 로세드가 차를 내오고있다. 은빛 트레이에 하얀 찻주전자와 찻잔이 놓여있다. 주전자의 구멍으로는 하얀 연기가 뿌옇게 흘러나온다. 로세드에게서 찻주전자와 찻잔을 건네받은 오빠는 매너있게 나의 찻잔에 차를 담아준다. 천천히, 빠르게, 천천히. 차를 흘려보낸 뒤에는 뿌듯한 듯 미소짓는다. 나중에 실린이 전해준 얘기에 따르면 주말의 늦잠을 포기하고 아침에 나와 피엔스에게 차를 공손하게 따르는 법에 대해 배웠다고 하지만 흘려들을 얘기다.

''나는 우리 린이랑 같이 차 마실 생각하니까 기분이 너무 좋던데..린이는 아닌가봐?''

절반쯤 마셨을때 오빠가 말했다. 린이라니..내 가 분명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몇번이나 얘기했는데! 다른 이유 다 제쳐놓고 일단 부끄럽잖아! 원망스런 눈초리로 빤히 쳐다봐주자 꽃받침을 하고 눈웃음을 보낸다.

''안돼. 그렇게봐도 용서 안 해줄거야!''

한껏 노려봐준뒤 잔에 남은 차를 한 입에 털어넣고 방으로 씩씩 거리며 올라왔다. 그러자 오빠가 바로 나를 따라왔는지 빠르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문을 열어주지 않고 있자 스스로 문을 열고 들어오며 장난스레 입꼬리를 올리고 내 옆으로 와서 쭈그려 앉는다.

''혀는 안 데였어?''

내가 아까 차를 들이킨걸 놀리려고 한 말일거다. 이미 잔에 있는건 다 식었었는데 무슨 소리야.

''가끔씩은 허락해주라고. 그래야 오빠가 너를 놀리지. 그때가 아니면 언제 놀려보겠어, 우리 동생님을''

''치..평소에도 잘만 놀리면서.''

어느새 삐친게 풀어진 나는 쭈그려앉은 오빠를 일으켜세우면서 방 밖으로 떠밀었다. 이렇게 쫓아내는거야?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하자.

''오빠 잘 내려가!''

그를 방문 밖으로 다 밀어낸 나는 오빠가 웃었던 것처럼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짓고 손을 흔들어 배웅해주었다. 그래봤자 집 안이지만. 차는 나중에 다시 마시자 오빠. 평화로운 날이다. 폭풍우가 치기전처럼.

***

그리고 그 폭풍우는 지금인가 보다. 나는 켈로이스가 아니라 폐하를 보러왔는데 왜 얘가 여기있냐. 다만 이건 내 생각일 뿐인지 켈로이스는 상당히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가 키 크다고 자랑하는것도 아니고 왜 사람을 그렇게 내려다봐? 그..그래봤자 20센치밖에 차이 안나면서!

''...미안.''

음? 쟤가 방금 나한테 뭐라고 그런거니? '미' 로 시작해서 '안' 으로 끝나는 말을 들은거 같은데 기분탓이니?

''네? 뭐라고요?''

''아이..미안하다고. 왜 미안한건진 모르겠는데 일단 너한테 미안해가지고 신경쓰이잖아. 너한테 딱히 신경쓰고 싶지 않으니까 그냥 말하는거야. 혼자 의미부여 하지마.''

미안하다고 하는 말에 좋아했더니 괜히 지 혼자 트집이다.

''나..아니, 저 의미부여 안해요! 그냥 미안하다고 그러셔서 기분 좋은거랍니다? 그리고 저 이제 오르젠 황태자님 안 좋아해요! 유테스타스 영애랑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사세요!''

어차피 그게 너희 결말이니까, 라는 뒷말은 속으로 삼켰다. 눈꼬리를 휘어지게 접고 손까지 흔들어가며 그와 셀레아의 관계를 응원하자 켈로이스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다.

''어..어 그래. 그러면 다행이고..''

이상하게 쳐다보며 나를 위아래로 훑는 그의 행동에 기분이 나빠질 뻔 했지만 그래도 사과받았으니 넘어가야지. 작게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가 펴고 다시 켈로이스를 보았다. 그는 아직도 내 변한 태도에 당황한 듯한 모습이다.

윤기가 흐르는 짧은 흑발과 검게 빛나는 눈동자, 턱에서부터 목까지 매끄럽게 이어지는 선. 무작정 창백한것이 아닌 적당히 건강해 보이는 하얀 피부와 입은 옷 위로도 느껴지는 듯한 등에 세세히 자리잡은 근육. 한마디로 완벽한 남자 주인공의 표본이다. 내가 반할만했네. 내가 동화책이라는것을 알지 못했고 내가 죽을때의 그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면 나는 결국 아픈 짝사랑을 또 겪었어야 했을 것이다. 셀레아의 얼굴을 떠올려서 켈로이스의 옆에 세우자, 크..그림이다. 순간 혼자서 눈이 부신 나는 눈을 비비적거렸다. 켈로이스는 내 눈에 뭐라도 들어간건지 묻다가 내가 얼버무리며 웃자 어깨를 으쓱하고는 입꼬리를 슬쩍 올린다. 그래 너 잘생겼다, 인정. 적어도 나에게는 한번 밖에 보여주지 않은 미소였기에 순간적으로 방심한 나는 그의 미모에 두근거렸다.

아니 평범하게 생각하는 그런 '두근'이 아니라 내가 원래 쟤를 사랑했었어야 된다니까? 근데 그냥 이건 동화책이다 하면서 무시하고 있었던거란 말이야! 내 반응은 지극히 정상적이라고. 다른 사람같으면 어?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있었어. 근데 그 사람은 내가 누군지 밖에 몰라. 근데 잘생겼어. 이런데 안 두근거리겠냐고. 이건 절대 사랑에 빠진게 아니야 오해하지마. 그냥 내 눈이 기분 좋다고 떡방아질을 쿵덕쿵덕 해대서 살짝 두근거린거지. ..그냥 폐하나 보고가야지. 더 말하면 그게 더 이상할것 같아. 눈을 조금 아래로 향하고 그럼 안녕히계세요, 하고 말하며 자연스럽게 지나가자 그가 나를 붙잡는다.

''더 이상 셀레아를 괴롭히지 않는거지?''

내가 켈로이스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왜 다들 저 말을 할까. 같은 말을 몇번이나 반복했는지. 어쩐지 억울해졌지만 켈로이스에겐 그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아, 너를 의심한게 아니라..그냥...미안.''

말을 이어나가지 못하는 그의 모습에 다시 한번 내가 악역을 굉장히 잘 수행했었다는 것을 새겼다. 이런 반응인걸 보니 또 내 표정에 다 드러났나보다. 내가 원래 이렇게 표정에 잘 드러나는 설정이었나. 그나저나 내게 진짜 미안했는지 나를 단단하게 붙잡던 그의 손에서 천천히 힘이 빠진다. 좋아, 빠져나갈 타이밍이다.

''아니에요. 제가 유테스타스 영애를 괴롭히던건 올해 사교계에 막 발을 들인 영애들도 모두 알고 있는걸요. 앞으로 친구 사귀기가 쉽지 않을 것 같네요.''

나름의 농담으로 입꼬리를 들어올리고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풀어냈다. 그가 나의 말을 듣고 잠시 멈칫 하는 동안 빠르게 달려서 폐하의 방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었다.

''어? 왔니, 에일린?''

자애로운 미소를 지어보이시는 폐하의 눈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부드럽게 휘어진다.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안기고 싶을 정도로 온화한 미소다. 에티스 얘기도 슬쩍 하려고 했었지만..역시 이 표정을 깨뜨리고 싶지않다. 그래, 그냥 켈로이스랑 있었던 얘기나 해야지. 폐하의 미소에 나도 그저 바보같이 웃으며 화답해 주었다.

***

가을 하늘이 푸르게 펼쳐지고 그런 하늘을 푸른 도화지인듯 배경으로 삼아 태양이 찬란하게 빛난다. 커다란 유리창을 통해 가려지지 않고 그대로 보이는 절경은 내 몸을 근질근질하게 만들었다. 땅 위로 넓게 퍼진 햇빛이 마냥 덥지만은 않다. 몇 주가 지났다고 그새 여름의 더위가 가신 빛은 그저 밝기만 할뿐 땅을 따뜻하게 데우지는 않는다. 원래 오늘 계획은 오빠와 함께 길거리 간식들을 사먹으며 돈을 펑펑 써대는 거였는데, 지금 그 계획을 이루고 있었다면 정말 완벽한 날이었을 것이다. 다만..내가 지금 결혼식에 끌려와있다는게 문제지. 그래 지금 결혼하는 저들은 세상 행복할 것이다. 완벽하게 눈이 부신 날, 완벽하게 아름다운 신부, 완벽하게 긴장한 신랑, 정말 완벽하게 짜증나있는 나. 심사위원이 나의 표정을 본다면 짜증나있는 표정의 표본으로 나에게 100점을 던져주지 않았을까.

'어쩌면 극단에서 스카웃하려고 했을지도.'

원래 나 같았으면 당연히 결혼식은 스킵하고 놀러갔을 것이다. 하지만 결혼식의 주인공은 내가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루시안 벨로이카, 동화 속에서의 나의 유일한 친구. 셀레아를 깎아내리기를 함께하던 친구였다. 진한 벌꿀을 한올 한올 발라놓은 듯한 금발과 모든 것들을 불태울만한 홍염을 가둬놓은 듯한 짙은 붉은빛의 눈동자, 사나운 고양이처럼 올라간 눈꼬리와 피같이 붉은 입술 화장도 마치 처음부터 제 입술인 양 잘 어울렸다. 전형적인 센 언니 캐릭터랄까. 저런 모습을 하도 많이 본 나로서는 별 감흥 없었지만 결혼식에 와있는 몇몇의 어린 영애들은 저마다 다른 이유로 루시안의 모습에 겁을 먹고 소근거리고 있었다.

'그 옆은 우리의 두번째 서브남주시고.'

체레스 루카디세즈, 루시안의 남편이자 이미 셀레아에게 반해있는 서브 남주들 중 하나였다. 루시안에게 빠져있노라고 애써 부정했었지만 루시안의 성격에 못 이겨 셀레아한테 갔었지. 이미 품절된 주제에 또 다른 사랑을 꿈꾸다니..정말 쓰레기 같은 놈이라니까? '눈치 빠른 루시안은 금방 체레스가 셀레아에게 마음이 남아있다는 것을 눈치챘어요. 루시안은 체레스와 셀레아에게 무척이나 화가나서 에일린을 찾아갔어요.' 라니 누가 썼는지는 몰라도 기승전 악녀네. 아주 그냥 내가 만능 해결사야. 뭐 그 일로 더 친해져서 셀레아를 같이 괴롭혔었지. 나는 셀레아가 체레스를 좋아하고 있다는 헛소문을 그에게 전해줘서 완전히 자기 혼자 착각하게끔, 그야말로 퍼펙트하게 엿 먹였고. 셀레아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그의 표정을 생각하자 통쾌해졌다.

지금 모습은 세상 제일 행복한데 뭐가 그리 좋다고 셀레아를 찾았는지. 아마 동화에서 루시안에게 미안했던 만큼 다시 사랑해주지 않을까. 그 이유는 자신도 모르겠지만. 셀레아와 켈로이스의 결혼식을 봤던 나로서는 여전히 성에 차지않는 결혼식이었지만 원래의 모습보다는 확실히 더 화려해진 모습이었다. 이것도 그가 그녀에게 미안하게 된 영향이 클 것 같다. 잡생각은 그만하고 집중할까? 남들이 보지 않을때 두 팔을 앞으로 뻗어 몸을 늘렸다. 굳어있던 몸이 부르르 떨리며 곧 시원해진다. 아 근데 왜 벌써 끝났냐..신부 나오는건 봤었어야 됐는데. 잠시 멍 때렸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이미 그들은 서로에게 웃어주며 반지를 나눠낀 후 였다. 손을 서로 깍지를 껴서 잡고 중앙 통로를 걸어 나가는 그들의 모습은 누구보다도 행복해보였다. 이번에는 너의 엔딩이 달라지길.

***

내가 세웠던 계획은 완전히 틀어졌다. 시끄러운 광장에서 평화롭게 쇼핑하려던 계획은 결혼식장에서 멍때리고 있기로 강제로 수정되었다. 하지만..그래, 루시안을 본 것까지는 좋았다. 비록 잘못된 이유 때문에 친해졌지만 그래도 친구는 친구니까. 다만 내 수정된 계획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시끄러운 광장에서 평화롭게 쇼핑하기' 가 언제부터 '조용한 결혼식장에서 시끄럽게 말싸움하기' 가 된거지. 더 말할 것도 없다. 깔끔하게 설명하자면 나는 지금 힘들어서 죽을것 같다. 그래, 나랑 루시안은 셀레아를 싫어했지. 그리고 결혼식엔 셀레아도 왔고, 나도 왔고, 루시안도 있고, 딱 싸우기 좋네.

''유테스타스 영애, 제가 영애를 초대했었나요? 저는 분명 영애에게 초대장을 보내지 않았는데..설마, 다른 영애의 초대장을 쓰고있는걸까요?''

조심스럽다기에는 너무 목소리가 크다. 한쪽 입꼬리를 눈에 띠게 들어올린 입에서 걱정스럽다는 듯 꾸며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생판 처음보는 사람을 데려와도 셀레아에게 이렇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루시안이 계속해서 따져 물었지만 셀레아는 그저 나를 보며 인상을 찌푸리고 손에 힘을 주어 부들부들 떨었다. 혹시..때리고 싶으신가요..? 그러면 좀 피하고 싶은데. 그녀의 떨리는 손을 보면서 잠시 움찔했다. 그러나 셀레아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 상태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셀레아를 보자마자 죄책감이 몸을 덮었다. 딱 한 번, 얼음이 얼 수 있을 정도로 차갑던 겨울이 있었다. 그 때 느꼈던 겨울의 매서운 바람처럼 내 몸 구석구석 남김없이 스치는 죄책감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깨진 유리조각들 위에서 얇은 옷만 입고 굴러가는 듯 온 몸이 따끔거렸다. 몸을 쓸어내고 싶었으나 셀레아를 향한 숨이 막힐 듯한 죄책감과 나를 향한 그녀의 원망을 담은 시선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겨우 손가락 몇개를 움직여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었다. 저번에는 그나마 뺨이라도 맞아서 평범했던걸까. 미안하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아니, 말해야 했다. 켈로이스가 나에게 사과했을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어째선지 모를 소름끼치는 죄책감에 힘들다가 겨우 말을 꺼낸걸까.

''영애..제가 정말 미..''

''그렇지 않나요, 에일린? 정말 웃기다니까요.''

미안하다고 말했어야 했는데. 한번 용기낸 사과가 쉽게 끊겨버리자 더 이상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근데 무슨 소리 하는거야?

''에일린..너 안 듣고 있었어? 왠일 이래, 저 여자를 앞에 두고? 그냥 적당히 맞장구만 쳐. 내가 다시 말해줄테니까.''

나에게서 반응이 없자 루시안이 나의 팔꿈치를 툭툭 치고는 작게 속삭였고 나는 짧게 응, 하고 답했다.

''아아..맞아요. 그렇고 말고요. 정말 웃기죠.''

내가 들은건 웃기다는 말 밖에 없었기에 나는 그저 고개를 살짝 들어 루시안을 바라보고 맞장구치며 희미하게 웃어줬다. 근데 다 말하고 나니까 뭔가 이상한데. 셀레아랑 싸우고, 아니 일방적으로 시비걸고 있었는데 갑자기 웃겨? 불안한 예감이 내 머리 속에서 어지럽게 울려댔다. 셀레아의 표정이 더 굳어지는 것을 보면서 다시 한번 느꼈다.

''체레스가 이 초대장을 보냈다니..그 예쁜 얼굴로 홀린 황태자 전하만 믿고 평민이었던 신분 주제에 거짓말까지 하시네요. 멍청하기는.''

이건 맞장구치면 안되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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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8-04-20 21:11 | 조회 : 586 목록
작가의 말
Ellozen

우리 에일린의 애칭이 나왔습니다!!(빰빠라밤!) 그건 그렇구..친구는 잘 사겨야돼..린아../분량은 보통 기본 메모 어플로 꽉채워 2개 하고도 반 정도를 올립니다..많은건가요?(갸웃) 좋으시다면 앞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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