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그래서. 왜 저를 부르시는거죠, 에티스?''

물론 이유는 알고있었다. 켈로이스가 셀레아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된 후에 내가 먼저 그에게 셀레아를 죽이기위해 도와달라고 부탁했으니까. 그에 대한 답을 주기위함이었을 것이다. 다만 동화 속의 나는 그가 우리의 부모님을 죽인지도 모르던 상태였고, 단지 그가 권력을 탐했다는 이유로 폐위당한줄로만 알았으니까. 하긴 생각해보면 그런 이유만으로 바로 폐위해버린건 말도안되지. 우리 폐하가 얼마나 자비로우신 성군이신데. 아까 당황하셨던게 내가 이유를 알았을거라고 생각하셔선가? 머릿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했지만 겉으로는 거만한 귀족 영애를 연기하며 그에게 귀찮다는듯 눈을 흘겼더니 그는 짐짓 당황한듯 보인다.

왜 그러냐고 따지고 싶지만 유테시스가 옆에 있어서 마음대로 하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마음대로해도 상관없는데. 난 어차피 모르는척 할거니까. 어깨를 한번 으쓱 들어올려주고는 코웃음을 치며 한쪽 입꼬리를 살짝 말아올리자 내가 느끼기엔 거만하기 짝이없던 그 표정이 천천히 굳어지고 곧 자신의 이를 뿌드득 가는 소리도 작게 들린다. 이 소리가 들릴정도라면 우리가 그만큼 조용했다는거겠지. 한동안 얼굴을 굳히고 있던 그가 다시 거만한 미소를 걸치고 말한다.

''지금 뭐하는..아니 장난이 지나치십니다, 에일린.''

아직도 내 이름으로 부르네? 하긴 내가 먼저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얘기했었으니.

나는 옆에있는 유테시스에게 시선을 한번 주고는 다시 그를 쳐다봤다. 유테시스는 손으로 자신의 허리춤에 차고다니던 검이 달려있던 위치를 계속해서 짚었다가 내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유테시스는 이미 에티스가 우리 부모님을 죽인걸 알고있을테니까 저런 반응은 당연하다. 여기서 나는 모든걸 모르는 척하면 되는거다. 이 자가 우리의 부모님을 죽였다는 것도, 내가 그에게 셀레아를 치워버리기 위해 손을 잡자고 했던것도. 나는 일부러 내 양쪽 입꼬리를 더 말아올리며 살짝 아는체를 했다.

''아아. 혹시 제가 저번에 말씀드렸던걸 답변하시고 싶으신거라면...''

이정도 아는척은 괜찮아. 나는 그에게 '까먹을 정도로' 가벼운 제안을 하나 던졌을 뿐이고 그가 내 제안을 받아드리든 받아드리지 않든 나에겐 위협이 되지않는다는걸 이제 잘 알겠지.

그는 내 의도를 알아챈건지 조금은 표정을 굳힌채로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표시를 보냈고,

''그 답변 그냥 계속 혼자만 품고계세요. 이제는 당신의 답변이 어쩌든 상관없을것 같네요. 아 저는 앞으로도 당신에게 제안했던 내용을 이행하고 싶은 마음이 없답니다, 드세아닌님.''

나는 그 긍정의 표시를 눈웃음까지 치며 깔끔하게 무시하고 그에게 제안했던 내용을 내 선에서 깨뜨려버렸다. 긍정의 표시를 보내던 그는 살짝 굳어있던 표정 그대로 멍해졌고, 나는 유테시스의 손을 잡고 그대로 등을 돌렸다. 이건 당신이 앞으로 나를 대할때 함부로 친한척 굴지말라는 경고야. 당신은 내 앞에서 머리를 굴려가며 배신했을만큼 똑똑하니까 내 쉬운 표현정도는 잘 알아들었겠지. 안그래?

유테시스는 자신의 허리에 짚고있던 손을 나에게 잡혀 잠시 당황했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에티스를 보고는 노골적으로 분노를 드러냈다. 어우..니가 얼마나 노려보고 있는지 안봐도 알겠다. 앞으로 서로 마주칠일따위 없기를 빌게, 에티스. 억지로 교양있게 상대하긴 했지만 나도 널 치워버리고 싶어서 자제하기가 힘들거든. 셀레아 이후로 이렇게까지 짜증나본건 처음인것 같은데. 지나가던 몇몇의 사람들이 우리 둘을 볼때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소근거리는걸 보면 아마 우리의 표정이 심상치 않나보다. 뭐 어때? 지금은 이렇게 짜증 좀 내도 되는거야.

***

집에 도착하자 집사들이 나와서 우리를 맞이한다. 옷을 다 갈아입고 창문 밖으로 보이는 하늘도 어느덧 빠르게 주황빛으로 물들어가며 예술적인 한폭의 그림을 그린다. 같이 차를 마시기로 약속하기는 했지만 지금은 우리 둘 다 사이좋게 마주앉아 차나 마시고 있을 기분이 아니니까 괜찮을거다. 내가 잠시 멍때리고 있는 동안 준비된 쿠키들도 딱히 먹고 싶지 않다. 방금 무의식적으로 한입 먹었는데 먹고싶은 마음이 사라져서 그대로 접시 위에 내려놓았다. 내가 무표정으로 먹다가 내려놓는 것을 보고 시녀들이 잠시 무서워했지만 그래도 실린만큼 겁이 많은 아닌지 티내지 않고 내려갔다. 아아, 피곤해라. 이제 좀 씻어야지.

***

뿌연 수증기가 욕실의 벽면을 타고 천장까지 올라가고 작게 나있는 창문 틈으로 저녁의 붉은빛이 나의 몸 위로 쏟아진다. 따뜻한 물 속으로 몸을 밀어넣고 두 손을 모아 물을 받고 얼굴을 씻어냈다. 잠시 눈을 감고 온기를 느끼고 있자 창문 밖에서부터 불어오는 차가운 저녁 바람이 수증기와 얼굴을 차갑게 식힌다. 몸을 욕조 안으로 깊숙히 넣자 턱까지 차오른 물의 향기가 기분좋게 난다. 그러나 그런 기분도 잠시, 나는 항상 씻을때 잡생각이 많아진다. 그리고 그런 잡생각들은 대체로 기분나쁜 경험일때가 많다. 오늘의 잡생각은 에티스의 관한 내용이었다. 내 기분이 순식간에 나빠지기에는 충분한 내용이었다.

동화책에서 우리의 부모님을 단지 폐하의 친구여서 권력이 몰릴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돌아가시게 했고, 나와 함께 저지른 죄의 꼬리가 잡힐것 같으니 켈로이스에게 '우리'의 죄가 아닌 '나'의 죄로서 자신이 직접 증언했고, 완전히 망가진 나를 보며 우리 부모님을 죽인게 자신이라고 비웃으며 증언에 대한 보상을 챙겨 떠났다. 자신이 내 앞에서 당당하게 차고 다니던 유테시스의 검과 닮은 하지만 빛이 바랜 검 하나를 아버지의 것이라며 버려두고. 그걸 보고 정신이 나가서 바로 셀레아에게 달려갔었다. 그 뒤로는 내가 생생하게 겪었던 일로 한번, 동화책로 두번 기억하는 나의 죽음이 있었다. 따지고 보면 내가 나쁜짓해서 죽게끔 부추긴 것도 에티스였네? 그 놈이랑 엮인건 하나같이 기분 나빠. 어찌됐든 유품은 돌려 받으러 다시 찾아가야되겠네.

인상까지 찌푸리며 감고있던 눈을 뜬 나는 몸을 일으켜 욕조의 밖으로 걸어나왔고 커다랗고 두툼한 천 한장을 꺼내 피부 위에서 떨어져내리는 물방울들을 닦아냈다. 그리고는 새로운 천으로 머리카락을 모두 쓸어모아 한쪽 어깨로 넘기고 천천히, 하지만 능숙하게 물기어린 머리카락들을 말렸다. 목욕 시중도 들게하는 영애도 있다지만 뭐 나는 그런쪽이랑은 완전히 반대니까. 개운하네, 이제 좀 잘 수 있겠구만. 제법 두툼한 푸른색의 잠옷을 입고 침대 위로 풀썩 엎어졌다. 그 검은 이불과 배게는 이미 버린지 오래다.

그새 밤이라고 불러야할 어두워진 하늘에 하얗게 달이 떠있다. 언제부터 열려있었는지 모를 창문에서 구름에 드문드문 가려진 달빛이 쏟아진다. 아직 다 차지 않은 타원형의 달이 유독 커다랗다. 잠깐씩 불어오다 멈추는 바람을 따라 밝은 은색 커튼이 작게 부풀었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한다. 손을 느리게 들어올려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잠시 느끼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방문 밖으로 가벼운 노크소리가 들리기에 힘들게 몸을 일으켜 들어오라고 말했다. 유테시스가 문고리를 돌리고 들어오면서 부드럽게 미소짓는다.

''혹시 자고있을까봐 노크부터 해봤어.''

역시 이런 오빠가 세상에 어딨겠어. 여기가 동화 속이니까 가능한거지. 그리고 난 그 동화 속 악역이지만..바보처럼 켈로이스한테 매달리는게 아니라 내가 가진걸 충분히 누리면서 살거야.

유테시스를 보고 다시 한번 머릿속에 이곳은 동화라고 새기며 내 목표를 다시 떠올렸다. 악역은 주인공들의 사랑을 방해하는 존재이자 더 굳건하게 만드는 존재. 애달프고 숭고한 사랑을 보여주는 존재. 그런 악역인 내가 없으니 셀레아와 켈로이스의 사랑은 굴곡없는, 평범하게 아름다운 사랑이 된다. 그렇게 되면 동화의 나도 그에게서 행복을 찾는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행복해질 것이다. 잠깐 쓴 웃음을 지으며 유테시스를 바라본 것 같다. 유테시스는 아니 나의 오빠는 내 머리 위에 손을 턱 올려놓고 거칠게 해집었다. 아직 머리카락이 다 마르지는 않아서 평소대로 붕 뜨는것이 아니라 축 처졌다. 그는 자신의 손을 흔들어 손에 묻은 물기를 말리고 잘 자라며 말하고 몸을 돌렸다.

''..오빠도 잘자.''

내가 동화라는 것을 알게된 이후로 처음으로 진심을 담은 오빠라는 말이었다. 아이보리색의 이불을 꼭 끌어안고 조용히 말하자 그가 다시 나를 보고 장난스레 웃는다.

''내일은 같이 차 마셔준다는 약속 지키는 날인거지?''

마지막은 장난식으로 끝낸 그에게 환하게 웃으며 답해줬다.

''응!''

***

에티스를 만났다는 점 외에는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켈로이스가 참석하던 연회도 셀레아를 우연히 마주치던 거리도 모두 피하고 있었기 때문이겠지만. 언제 사건이 터진다는 정확한 날짜는 나와있지 않았기에 여자의 직감으로...는 무슨 지금 한달째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오빠는 그런 내가 조금 걱정되는 모양이지만, 어쩌겠어. 그 동화책을 쓴 작가가 조금만 더 노력해서 언제 어디서 만나는지 친절하게 말해줬으면 좋았을텐데. 그래도 나름 만족스러웠다. 친절하고 착한 동화 속의 오빠와 거대하고 아름다운 우리의 저택. 풍요로운 삶이 보장되는 넘치는 재산과 사람들의 부러움과 존경을 한번에 받는 지위.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얼굴까지. 모든게 거의 완벽했다. 부모님만 빼면. 아 또 우울해지네.

일단 그건 넘어가고, 집에 박혀있는동안 우리집의 사용인들과 꽤 친해졌..아니 관계를 회복했다. 우선 집사장인 피엔스와 잠깐씩 웃으면서 대화할수있게 됬고, 주방장인 로세드에게 음식이 맛있다고 칭찬하면 기뻐해주는 정도가 됬다. 실린..이 제일 어려웠는데 내가 많이 괴롭힌것 보다 더 많이 아껴줬다. 오빠가 광장에 다녀오면 내가 좋아하는 땅콩 쿠키며, 과일 사탕이며, 초콜릿과 타르트. 찻잎과 잼, 향수에 리본끈 같은 것들을 항상 잔뜩 안겨주는데 그중에 예쁘고 맛있는것은 아껴뒀다가 실린과 함께 즐기곤 했다. 하..노력했다 나. 맛있는걸 포기하다니. 그 덕분에 실린이랑은 서로 친하다고 부를수 있을정도가 됬다. 역시 친해지는데는 맛있는거 같이 먹는게 최고지. 실린도 예전보다 훨씬 자주 내 방을 들락거리며 시녀들 사이의 소문을 전해주거나 같이 떠들기도 했다. 그 검은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켈로이스만 버렸을 뿐인데 세상이 아름답구나.

새삼 큰 깨달음을 얻으며 빈둥거리던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놀고 먹으며 살고싶기도 하지만 이 동화책을 읽을 사람들이 나를 그냥 빈둥이로 보면 안돼잖아?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줘야겠지. 어차피 나는 지나가는 행인 2급의 존재감이어도 상관없으니 행복해지기만 하면 끝이지만. 그래도 적당한 사교활동과 취미생활은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데 큰 도움이 되죠! 그렇게 생각하며 이불을 확 들추고 1층으로 내려갔다. 이미 아침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늦고 점심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시간인 11시였기에 오빠는 벌써 일을 하러 나가고 없었다. 참고로 우리 오빠 일은 교사다. 애들 가르치는 그 교사. 근데 왜 검을 차고 다니냐고? 흠..원래 안 배웠었는데 부모님 돌아가신 이후로 나를 지켜준..아니 그냥 넘어가자. 어후 덥네, 더워. 가을인데 왜 이렇게 더운거야?

손 부채질을 열심히 하다가보니 지나가던 시녀들이 나를 보고 어색해하다가 살짝 웃고 인사를 해준다. 실린..애들한테 얘기 잘해줬구나? 고맙다. 숨겨놨던 무화과 타르트 너 줄께. 맛있더라 그거..쩝. 아무래도 내가 식사를 아직 안 해서 모든 생각이 먹을걸로 쏠리나 보다. 늦게 일어난데다 자세가 상당히 편한 탓에 오래 방에 있었다. 내가 일어난지 벌써 3시간이네. 오늘은 로세드가 뭘 만들어 줄라나. 콧노래를 약하게 흥얼거리며 경쾌한 발걸음으로 걸어가서 주방 문을 세게 열자 로세드가 무언가를 만드는데 집중하다가 깜짝 놀란다. 어라 이걸 어쩌지..우리 오빠 블루베리 파이 좋아하는데...그 위로 설탕을 엎질렀다. 한 두개도 아니고 트레이 위에 가지런히 올려져있는 파이들 전부에. 아하하..아니야. 나름 하얀 이불 덮은것 같은 느낌도 나고..생각이 끝나기가 무섭게 설탕이 갓 나온 파이의 열기에 천천히 녹아 지저분하게 덮힌다.

''음..로세드? 생각해보니까 배가 별로 안고파서.''

크게 당황한 로세드의 눈이 동그랗게 커진다. 금방이라도 사고를 칠듯 불안한 모습이다. 사고는 이미 쳤구나? 일어난 사고에 대한 책임을 99퍼센트 정도 책임지고 있는 나는 로세드에게 책임을 떠넘기기로 하고 뒷걸음질 치다가 도망쳤다. 뒤에서 아가씨..하는 울먹울먹하는 소리가 들리지만! 내 양심이 찔리지만! 나는 도망칠거야..! 그래서 내가 왜 다시 돌아가고 있다고? 양심에 찔려 도망친 그 길 그대로 다시 되돌아온 나는 로세드를 돕기 시작했다.

''아..내 취미생활이..오늘은 오랜만에 밖에도 나가보려고 했는데...''

울적한 목서리로 중얼거리자 로세드가 밖에 나간다는 나의 말을 듣고는 눈을 크게 뜬다.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뜨니까 무서울 지경이다.

''나가신다고요? 밖으로? 진심이시죠 아가씨? 여기는 저에게 맡기세요. 제가 실력을 발휘해서 다~ 수습해놓을테니까, 아가씨는 빨리 준비하시고 다녀오세요. 아 아직 식사 안하셨죠? 기다리세요 금방해드릴께요!''

횡설수설하며 나에게 몇번이나 되묻던 로세드는 급하게 주방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래주면 나야 고맙지. 어깨를 으쓱하고 주방과 붙어있는 테이블로 가서 앉았다. 바닥에 완전히 닿지않는 다리를 흔들거리며 기다리고 있자 얼마되지않아 로세드가 그릇위에 음식들을 올려 세팅해준다. 따끈따끈하게 연기가 피어오르는 콘스프와 노릇하게 구워진 갈색의 빵 보기만해도 침이 넘어간다. 가운데에 겉면에 그릴자국이 생긴 스테이크가 그 자태를 뽐내며 나를 유혹하는 자세로 누워있다. 아침부터 고기가 들어가냐고 물어보는 사람 누구야? 잘만 들어가잖아!

스프부터 시작해서 스테이크까지 빠르게 끝낸 나를 보며 로세드가 이제 밖으로 나가시는거냐고 묻는다. 하기야 어제까지만해도 집에 틀어박혀 있던 난데 갑자기 나간다 그러니 좋기도 하겠지. 나갔다 오면서 쿠키나 사와야지. 로세드에게 손을 흔들며 다녀오겠다고 얘기한 후 다시 내 방으로 올라왔다. 솔직히 다시 눕고싶긴한데 로세드 반응보니까 미안해서라도 나가야지. 옷장에서 언젠가 내가 입고나가기 위해 샀던 드레스를 꺼냈다. 연한 보라색의 얇은 천들이 겹겹이 쌓여 풍성한 느낌을 내고 드레스의 끝부분에는 보라색 실로 라벤더 모양의 자수가 새겨져있다. 투명한 포도알을 연상시키는 자수정이 어깨부근과 허리를 둘러싸고있다. 하늘의 중심에 떠있는 태양은 밝게 빛을 내며 따스하게 드레스를 비추고, 선선하게 부는 바람이 따뜻하게 달궈진 피부를 식힌다. 놀러나가기 딱 좋은 날씨다.

기간한정판매로 파는 아몬드 버터쿠키를 잔뜩 산 나는 지금 굉장히 기분이 좋다. 근데 꼭 내가 기분 좋으면 뭔 일이 나던데. ..역시 이 세상은 나를 싫어하는게 틀림없다.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셀레아가, 이 책의 여주인공인 셀레아가 내 눈 앞에 나타났다. 여전히 아름다운 여자다. 벚꽃의 분홍색을 담은 약간 풍성한 드레스와 하얀색의 리본으로 흘러내리는 흑발을 반만 땋아 올려묶은 그녀의 피부는 흑발과 대조되게 하얗다. 붉게 물든 뺨과 석류빛의 입술은 하얀 피부에 생기를 부여하고 긴 속눈썹은 살짝 내려와 여리여리한 분위기를 낸다. 시원하게 풍기는 바람향기는 그녀의 주변 사람들을 완전히 매료시킨다. 누가봐도 돌아볼수밖에 없는 아름다움과 누가봐도 반할수밖에 없는 착한 마음. 사교계에서는 잘 가공된 흑진주보다도 아름답다고 칭송받는 주인공, 셀레아. 다만 한가지 빠진게 있다면 맑게 빛나던 눈동자가 더이상 빛나고있지 않고있다.

'음? 왜 나한테 오는거야?'

셀레아의 땋은머리가 흔들거리고 드레스가 바닥에 조금씩 끌린다. 셀레아라는 여주인공은 교양있고 우아한 설정이었는데. 셀레아가 점점 속도를 올리며 나에게로 빠르게 다가온다. 원래 내용 같았으면 내가 셀레아에게 가자마자 셀레아는 밝게 웃고, 나는 사람들이 보든말든 그녀의 뺨을 힘껏 때렸어야 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바보같은 선택이었다. 어쩔 수 없었지 동화의 작가가 내가 그렇게 하게 만들었는데. 많이 미안하네.. 잠시 한눈을 팔던 사이 셀레아는 어느새 바로 앞에 와있었다. 생기를 부여하는 볼과 입술과는 다르게 생기가 전혀없는 눈의 초점이 오로지 나에게 쏠려있다. 순간적으로 무서워서 쿠키가 들어있는 가방을 놓칠뻔했다. 내가 잘못한지는 확실히 알고있나보다. 셀레아가 오기만 했을 뿐인데 미안하다니.

셀레아라는 여주인공은 상냥하고 다정한 성격이었기에 멀리서 나를 보고 인사하려고 오나싶었다. 인사를 하기에는 너무 가깝기는 했지만. 그녀가 잠시 멍하게 있길래 인사말을 생각하고 있나 싶어서 한걸음 뒤로 물러나 드레스 자락을 손에 쥐고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황후가 될 분이시니 관계는 바로잡는게 좋았다. 미안하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안녕하세요, 유테스타스 영애.''

웃으며 인사를 하고 눈치를 보며 고개를 들자 셀레아는 자신의 인상을 잠시 찌푸렸다가 예쁘게 땋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기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혼란스러워하던 셀레아는 이내 내 얼굴을 똑바로 보더니 자신의 손을 들었다. 엥? 얘 왜 이래.

''짝!''

커다란 마찰음이 광장 구석에 울리고 셀레아를 눈으로 쫓던 사람들은 빠르게 시선을 돌렸다. 아 돌아간건 그들의 시선만이 아니지 내 머리도 함께 돌아갔다. 아 가방, 놓쳐버렸네. 왜 갑자기 이런 전개인거지. 머릿속으로 여러가지 생각들과 가설을 세우며 있는동안 손에 맞은 내 뺨이 빨갛게 물들었다. 와 이게 바로 천연 볼터치인건가. 뜨거워진 볼에 손을 가져다대며 셀레아를 쳐다보자 셀레아가 잠시 휘청거린다. 아니 맞은건 난데 왜 니가 휘청거려?

''아..아..미안해요. 에일린..아니 나는 하나도 안 미안한..하...왜 이러지. 그냥..그냥 영애를 보면 화가 나요. 영애가 원망스럽고 미워요. 제가 이러면 안되는건데..지금 영애를 보고있자니 다시 화가 끓어서..어디다가 풀 수가 없어요. 자고 일어나니까 뭔가가 달라진 기분이었고, 그 기분이 영애를 보고, 영애의 소식을 들을때마다 심해져요.''

벽을 짚고 진짜로 한 대 더 때릴것처럼 얘기하는 셀레아의 말에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피했다. 쟤..손 많이 아프더라...

''그냥, 뭐라고 해야하지? 없었던 감정이 새로 생긴 기분이에요. 이런 기분 한번도 느껴본적 없는데.''

허? 그런거 나도 느껴봤는데. 나는 화가 나는게 아니라 미안한거랑..슬픈거랑...근데 셀레아는 화가 나고 원망스럽다고? 셀레아가 말을 멈추고 손을 한번 더 치켜들기 시작하자 나는 일단 생각을 멈추고 일단 무조건 달렸다. 내가 마차를 두고 온 곳까지. 이럴줄 알았으면 그냥 타고 오는건데.

좁은 길이 다 지나가고 큰 길이 나왔다. 가끔씩 보이던 사람들도 이젠 없는게 이상할 지경이 되었다. 풍성한 드레스를 입고 장식이 흐트러지는건 생각도 안하며 달리는 귀족 영애의 모습이 이상해서일까.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리는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런것에 신경쓸 생각은 없었다. 어디에 두고왔더라..아 찾았다. 마차를 찾자마자 숨을 고르지도 않고 올라탄 나는 문을 굳게 잠그고 급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후우..한대 더 맞는줄 알았네. 내 몸을 꼭 껴안고 팔을 쓸자 셀레아의 얼굴이 떠오른다. 다만 내가 화를 내야할 상황임에도 셀레아에게 미안하다는 감정이 너무 커서 내가 맞은 일을 덮어버린다.

도대체 왜 그러는걸까. 마차를 급히 광장에서 출발시키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머리를 두 손가락으로 꾹 눌러 머릿속에서 셀레아에 대한 죄책감을 털어버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손바닥에 달라붙은 작은 먼지처럼 떨어지지 않는 죄책감에 애써 창문을 바라보며 여러가지 생각을 하려고 노력했다. 마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흐름이 조금씩 끊기긴 했지만 나름 조용하고 아늑한 마차 안은 생각에 집중하기 좋은 장소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1시간 정도의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세가지 정도의 가설을 세웠다. 확실하지는 않겠지만, 애초에 내가 이런 말도 안되는 일에 대해 다 알 수는 없는거니까.

첫째, 내가 악녀 역할을 수행하지 않아서 셀레아가 악녀역할이 됬을 것이다. 하지만 이 가설이 맞다면 셀레아가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거나 혼란스럽다는 느낌을 줄리가 없다. 내가 악녀였을때도 그랬으니까. 셀레아에게 관련되있다면 일단 행동부터 나갔다. 둘째, 작가가 이 동화의 내용 자체를 바꿔버렸을 것이다. 어쩌면 내가 이 곳이 동화라는것을 알게된 이유도 원작의 내용을 중간에 바꿔서일지도 모른다. 그 짧은 틈으로 내가 동화를 읽은거라면 말이된다. 하지만 그렇다면 주인공은 내가 악녀는 그녀가 되야하는 설정일텐데 그렇게되면 내가 죄책감을 가져야할 이유도 내가 슬펐어야할 이유도 없다. 셋째, 내가 다른 길을 선택해서 셀레아의 설정이 달라졌다. 만약 이게 맞는 답이라면 왜 하필이면 셀레아가 느끼는 감정은 나에 대한 원망일까. 그리고 내가 느끼는 감정은 그녀를 향한 죄책감과 세상을 행한 슬픔일까. 우리 둘 다 원작에서는 그런 감정을 가질 수 없는 설정이다.

마차가 집에 도착했는데도 멍하게 있다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흐트러진 드레스를 정리하고 마차에서 내려 다시 방 안으로 돌아갔다. 이 시간이면 오빠가 돌아왔을 시간이지만 손자국이 빨갛게 난 내 볼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해서 볼을 식히고 침대에 누웠다. 곧 다시 생각에 잠길 수 있었다. 아 혹시 그건가? 동화속에서 우리가 느끼지 못했지만 느꼈어야할 감정들. 그것들이 지금에서야 터지기라도 한건가? 그러고보면 폐하께서도 내 말에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기뻐하셨지. 오빠도 그 전보다 훨씬 더 나를 아꼈고. 그럴 듯한 추측이네.

그러면 켈로이스는 어떻게 됬을까. 나에게 조금이라도 미안해할까? 그를 향해서는 아무 감정이 없다고는 하지만 그가 나에게 던졌던 그 짜증나는 시선에 대해서는 꼭 사과받고 싶은 마음이다. 물론 그는 자신이 뭘 어떻게 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셀레아에게 느꼈던것 같은 죄책감이 그에게 있다면 나에게 조금 더 잘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렇게 되면 황궁에서 내 인생은 진짜 잘 풀린거나 다름없을텐데. 아 모르겠다. 씻고 자기나 해야지. 해가 천천히 지고있는, 자기에는 이른 시간이었지만 피곤해 죽을것 같다. 머리를 많이 써서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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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8-04-05 19:45 | 조회 : 767 목록
작가의 말
Ellozen

...에티스가 나빴네요!/음..동화도 제가 쓰고 소설도 제가 썼으니 에일린은 저한테 두 번 걸려있는 셈인가요..(좋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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