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으로 읽고 쓰다(1)

윤길은 스승님께 인사한 후 밤하늘의 별들과 벗하며 걸어갔다. 쌀쌀하다는 생각이 들지않고 시원한 바람이 몸을 간질거렸다. 근심어린 마음을 몰아내려고 시조 하나를 지었다.

"달이 띄지않은 이 밤

어두움을 몰아낸 별들

이 하늘에 수놓아져

광명하니 매료된 이

마음이 즐겁도다."

시조를 지으니 어느새 집에 도착했다. 윤길은 편한 옷차림으로 갈아입은 뒤 소설책 한권을 손에 끼고 서당의 정자로 가 책을 읽으려했다. 여동생이 죽고 난 후 부터 잠이 오지 않아 바람도 쇨 겸 정자에서 읽었다. 집증하는게 다른 곳에서보다 잘 되었다. 정자에 도착해 책을 읽으려 할 때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소리의 주인은 이병훈이어다. 병훈은 정자까지 올라와 켜진 호롱불 사이로 은은하게 비춰진 윤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웬지 여기서 책을 읽고 있을 것 같았소."

윤길은 병훈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집에서 쉬는 줄 알았는데 여긴 왜 온 것이오?"

병훈은 품에서 서책을 꺼냈다.

"나도 여기서 함께 책을 읽으려 가져왔소. 방해 안하겠네."

윤길과 병훈은 아무런 소리없이 호롱불을 의지해 책을 읽어내려 갔다. 이병훈은 윤길이 읽는 책이 궁금해져 물었다.

"그리 집중하는 것을 보니 책이 재미있나보구려. 무슨 책을 읽고 있소?"

윤길은 책에서 눈을 떼지않은 상태에서 말했다.

"이규보의 '국선생전'을 보고 있소."

"사람들에게 많이 들어봤소. 책 내용이 아마 국선생이라는 자가 천한 출신이지만 임금님의 마음에 들어 벼슬 길에 들어섰다는 내용 아니오?"

이규보의 '국선생전'은 술(누룩)을 의인화한 소설이다. 주인공인 국선생의 아버지는 처음 벼슬을 했으며 어머니는 농부의 딸이었다. 천한 출신이었지만 성실하게 행동해 임금님의 눈에 띄게 되었고 국선생을 총애했다. 국선생에게는 세 아들이 있는데 모두 방자하게 굴어 탄핵이 되었다, 나중에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국선생도 폐해져 벼슬을 그만하게 되자 고을과 마을에 도적떼가 나타났다. 적임자가 나타나지않아 왕은 국선생을 등용했다. 도적떼를 몰아내서 임금은 상을 내리었다. 국선생은 마다하고 받지않았다. 국선생은 병이 깊어져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윤길은 병훈에게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술의 좋은 점을 쓴 소설이라네. '국선생전'말고 다른 작품이 있구려. 아직 읽지 못해 무엇을 다룬 것인지 모르오."

병훈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잘 설명해줘서 고맙소. 책을 다 보지 않은 듯 한데 어떻게 잘 아는 거요?"

"어렸을 때 스승님이 내게 이 책을 선물해주었소. 다 읽고 나서 오늘 보고 싶어졌구려."

병훈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예전부터 스승님과 아는 사이였소?"

윤길은 병훈을 바라보며 말했다.

"맞네, 스승님은 그때나 지금이나 나를 많이 도와주셨소. 내가 보고 싶은 책이 있으면 언제든지 빌려주었구려."

병훈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하하하, 그대에게 소중한 사람 같소. 질투가 나는 구려,"

"새벽이 밝아지고 있으니 우리 둘 다 집으로 가는게 좋겠소."

윤길이 먼저 정자를 떠났다. 마음 속으로 병훈이 스승님을 질투한다는게 귀엽다고 느껴졌다. 하지만 자신과 병훈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생각에 좋아하는 마음이 진정시켜졌다. 윤길은 집으로 도착해 '국선생전'을 상에 두고 잠에 들었다, 상에는 붓, 벼루등과 병훈이 선물로 준 주채가 곱게 놓여져 있었다. 아침이 밝자 윤길은 하얀 도포대신 참외처럼 노르스름한 노랑빛의 두루마기를 입었다. 창백해보였던 윤길의 얼굴에 환한 생기가 있어 보였다. 마당을 나가자 아버지가 윤길을 엄하게 노려보았다.

"밤에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니느냐?"

윤길은 딱딱하고 굳어진 얼굴로 대답했다.

"잠이 오지 않아 바깥에서 책을 보았습니다."

아버지는 얼굴을 찡그렸다.

"쓰잘데기 없는 책에 시간을 허비했다고? 그런 시간에 학문을 쌓아 연마해라."

윤길은 절절하게 아버지께 호소했다.

"아버지, 저한테 책이 소중합니다. 책은 외로운 시간을 함께 견뎌준 벗이자 삶을 살아가게 해주었습니다."

아버지는 화를 누르지 못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예전부터 내가 하는 말에 토를 다는 구나. 책이 언제 너를 도와주고 보살펴주기라도 했느냐? 내 모든 말이 우스운 것이냐?"

"제가 언제 아버지의 보살핌을 무시했습니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내가 책을 보지 말고 학문에 집중하라는 것은 너가 잘되기를 바라서였다. 윤희는 내 말에 말대꾸하지 않고 고분고분하게 들었다. 성격이 너그럽지 못해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러느냐?"

윤길은 고통스러운 듯 이마에 손을 집었다.

"아버지, 언제 제게 관심을 쏟으셨다고 이러십니까? 동생이 죽은 후로 제게 따뜻한 말한마디 해주시도 않으셨습니다."

아버지는 윤길을 쳐다보지않고 외면했다.

"더 이상 너와 대화하기 싫다, 나는 신경쓰지 않을 테니 알아서 해라."

윤길은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울먹거렸다, 윤길에게는 책이 외로울 때마다 같이 있어준 친구이자 책속의 주인공들이 힘들 때 공감하며 위로를 받았다. 아버지의 차가운 말들이 가슴속에 비수로 꽂혀 아프게 했다, 다시 찾아가 "아버지, 윤희 대신 제가 죽었어야 합니까? 저도 아버지의 자식이란 말입니다! 왜 이렇게 저를 몰라주시고 아프게 하시는 지요."라고 말하고 싶어졌다. 말하고 싶은 욕구를 억눌러 방으로 들어가 쭈그려 앉았다. 병훈이 준 부채를 들여다보며 자신의 모든 사정과 아픔을 이야기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어 인생이 괴로워 절규했다. 참았던 눈물이 흘러내려 도포를 조금씩 적시었다. 다 울자 윤길은 대야에 물을 받고 얼굴을 씻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서당에 갔다. 앞 자리에 있는 병훈이 윤길을 뚫어지게 봤다. 병훈은 윤길의 표정이 미묘하게 달라졌다는 것을 알아챘다. 윤길에게 가 말을 걸었다,

"무슨 일 있었소?"

윤길은 고개를 떨구며 대답했다.

"아무일도 없었소. 말 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네."

병훈은 윤길이 안쓰러워 윤길의 옆자리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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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8-03-31 22:37 | 조회 : 666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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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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