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에 취하다, 기당(1)

이병훈은 가벼워진 몸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세수를 하고 살 구색 도포를 단정히 입었다. 부모님께 아침 문안 인사를 드리러 안방으로 갔다. 큰 절을 하며 인사말을 아뢰었다.

“아버지, 어머니, 잠은 평안히 주무셨습니까?”

아버지는 병훈의 큰 절을 따스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절은 그만두어라. 어제 너의 어미에게 아프다는 소리를 듣고 걱정을 많이 했단다. 몸은 괜찮아졌느냐?”

병훈은 큰 절을 풀며 꼿꼿하게 양반다리로 앉았다.

“예, 어제 저를 여기로 데리고 와준 윤길의 간호덕분에 많이 괜찮아졌습니다.”

아버지는 표정이 굳어지면서 대답했다.

“그 아이 얘기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인사를 다했으면 서당에 갈 준비나 해라.”

병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머리에 새까만 흑립을 쓰고 서당으로 갔다. 윤길은 뒤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말을 걸고 싶었으나 스승님이 나와 수업을 진행하셨다.

“맹자의 사단과 칠정을 알고 있느냐?”

한사람이 공손히 대답했다.

“예, 알고 있습니다. 사단에는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이 있습니다. 칠정에는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이 있습니다.”

스승님은 우리를 둘러보더니 질문 하나 던지셨다.

“맹자는 성선설과 함께 사단을 얘기했다. 나는 여기서 의문 하나를 느꼈구나. 인간은 과연 선하다고 할 수 있는가?”

병훈이 스승님을 진지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예, 인간은 본디 선한 존재입니다. 물에 빠진 어린 아이가 있으면 어찌 누가 그냥 지나칠 수 있습니까? 누구라도 못 본 척 지나치지 못할 것입니다. 하찮은 짐승이라도 하지라도 구하러 물로 내려 갈 것입니다.”

스승님은 감탄스러운 표정으로 수염을 만졌다.

“그래, 제대로 설명해주었구나. 또 다른 주장을 하고 싶은 사람 있느냐?”

윤길은 차분한 목소리로 병훈의 의견에 반박했다.

“저는 인간은 순자의 성악설에 따라 악하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욕구에 따라 움직이며 그것을 방임해두면 걷잡을 수 없는 사회적 혼란을 예기할 수 있습니다. 그 욕구에 의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습니다.”

양반 자제들이 병훈과 윤길의 주장에 동조하며 새로운 의견을 내뱉었다. 어느새 시간이 휙 지나가고 스승님은 다음에 설명해주겠다면서 수업을 끝내셨다. 이병훈은 양반 자제들을 불러 모았다.

“우리를 부른 이유가 무엇인가? 말도 섞고 싶지 않다네.”

이병훈은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언성을 높이며 싸우지 않았는가? 내가 연회를 그대들에게 베풀겠네. 서로 즐겁게 마시며 회포나 푸세.”

자제들은 수군거리며 어떻게 할지 결정했다. 가지 않겠다는 사람이 과반수를 넘었다. 병훈은 윤길 에게도 물어보았지만 참석하지않겠다고 그랬다. 갑작스런 연회를 베푸는 이유는 양반들이 윤길 에게 하는 부정적인 생각과 오해를 풀며 함께 어울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불참가로 계획에는 차질이 생겼으나 이행하고자 했다. 이병훈은 양반들을 데리고 마을에서 입소문이 많은 기방, 류희방(柳?房)으로 갔다. 연회장은 붉은 색과 청색으로 만들어진 청사초롱이 벽에 붙어있었으며 진달래 색의 천과 흰 천이 바람으로 휘날리고 있었다. 숭상에는 전과 나물들로 채워졌으며 술이 즐비했다. 양반들의 취기가 많이 올랐을 때 병훈은 말했다.

“내가 자네들을 부른 이유는 윤길에 대한 오해를 풀었으면 좋겠소. 겉은 차가울지 모르나 속은 여리고 따뜻한 사람이오. 윤길은 먼저 나를 유혹하지도 않았소. 내 멋대로 좋아한다고 그런 거였소.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사람이 좋아하는 마음은 아름답다고 생각하오.”

어떤 양반이 병훈을 가로막고 대답했다.

“이렇게 즐거운 날 꼭 그 이야기를 꺼내야겠소? 분위기가 가라앉았네. 조선에서 유명한 기생, 향월을 알고 있구려. 어서 향월을 부르거라.”

향월은 소박한 흰 저고리와 검정색 치마를 입고 고운 자태로 나타났다. 한 떨기의 청조한 매화 같았다. 양반들은 향월에게 시조를 읊으라고 시켰다. 향월은 즉석에서 시조를 지어 문장 하나하나에 감정을 표현했다.

“이른 봄 날 추위를

무릅쓰고 피어난

매화 한 줄기를

꺾어 그대에게

보내오니 나를

떠올려주소서.”

양반들은 향월이 지은 시에 하나 둘씩 감탄했다. 병훈은 시조를 떠올리면서 질문했다.

“왜 시조를 지을 때 사군자 중에 매화를 선택했소?”

향월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매화가 핀 이른 봄에 여기서 어떤 분이 저를 구해주었죠. 사람들이 저를 매화에 비유하곤 했죠. 추위는 제가 경험했던 고난들을 말합니다.”

“그 사람과 꼭 만났으면 좋겠구려. 춤을 보여줄 수 있겠소?”

향월은 악공들이 연주하는 장구, 태평소, 피리, 가야금에 맞춰 살풀이춤을 췄다. 살풀이춤은 무당들이 추던 춤에서 기원했으며 기방으로 전해져 기생들이 추게 되었다. 춤은 부드러웠으며 단아했고 절제된 몸지에서 희노애락이 담겨져 있었다. 수건이 자유자잴 움직일 때마다 양반들은 향월이 우아하며 기품이 있어 보였다. 병훈은 향월의 춤을 바라보며 ‘젊은 나이에 그 안에서 한을 표현할 수 있는 가? 무엇 때문에 이리도 가슴아프게 춤을 추는가?’라고 생각하였다. 자제들은 춤에 매료되어 넋이 나가버렸다. 향월이 춤을 다 추고 자리에 다소곳이 앉았다. 양반 중 하나가 향월의 손을 붙잡으며 마랬다.

“선이 곱고 기품이 서려있구나. 사람들이 너를 조선 제일의 기생이라고 하는 이유를 알겠구나. 내가 듣기에는 기생이 된 후로 사내들에게 몸을 준 적이 없다고 하는데 오늘 나와 합을 이루겠느냐?”

향월은 양반의 손을 탁 치며 말했다.

“제가 아무리 천하디 천한 기생이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기생이 된 날 정조를 지키고자 맹세했습니다. 그리워하는 임이 있어 맹세를 깨뜨릴 수 없습니다.”

양반은 욱하는 성질을 내며 대답했다.

“기생 주제에 말이 왜 그렇게 많느냐? 안기라고 할 때 안겨야 할 것 아니냐? 합을 이룬 후 너를 첩으로 삼으려고 했다. 기생에서 양반의 첩으로 승격되게 쉬운 줄 아느냐? 큰 기회를 홀랑 놓쳐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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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8-03-03 16:26 | 조회 : 708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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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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