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프롤로그.














0. 프롤로그











몸에 포신을 삼키어버린 불을 뿜는 용사가,
푸른빛의 안광을 뿌리며 대륙에 내리리라.

그 옆엔 홀로 군단인 자와 붉은 여제가 있어,
열두 재앙을 먹어치우고 열두 열쇠 얻으리.

사라진 제국을 재건하는 거미를 찾아가매,
그녀의 등에 기어 올라가, 열쇠를 꽂으리라.

-리케이 대 예언 5수 Debris











드래곤과 사람이 공존하는 곳. 리케이 대륙. 이곳에는 탄생한지 얼마 안 된 전설과도 같은, 그러나 절대,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역사가 내려져오고 있다.

대마전. 그것은 어느순간 돌연 시작되었다. 500년 전, 로비안 왕궁에서 검은 악룡을 타고 돌연 나타난 마왕 데스페라도. 그는 이 세상에 나타난 후 가장 먼저 자신의 심장을 뽑아 열두 조각으로 나누어 대륙에 존재할 수 없는 존재들을 만들었고, 이들을 발록이라 칭했다. 그의 손짓을 따라 움직인 발록들은 로비안 왕국을 순식간에 종말에 이르게 했고, 그의 악룡이 흘리는 타락한 마나는 대륙의 마물들에게 피 맛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강림한 지 3일도 채 지나지 않아 그들은 로비안에 이어, 이비디움, 타라, 솔로뮤, 유느를 과거의 왕국으로 만들었고, 수많은 이름 모를 무덤들을 세웠다. 이후 강력한 기사들의 연합이었던 오알리데 연합에 속한 나라들이 기사단을 파병했지만, 손짓 한 번에 성이 무너져 내리고, 발구름 한 번에 지축을 뒤흔드는 악의 대군을 막아내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그로부터 4일이 지나 카이아스, 레이퍼드, 로우드, 오알리데마저도 먹어치운 그들은 라폴드 숲을 넘어 잔팔, 마빈, 카트람, 네르, 굴다르를 점령했고, 그로부터 7일 후엔 헤이즐, 프롤린, 에녹, 아스타, 페라스, 돌로란스, 아리엘, 바로즈를 점령한 후, 베라시아를 폐허로 만든 뒤, 대륙의 최정상인 만년설산 크라폴드의 꼭대기에 올랐다.

이후 마도국인 잭슨과 레이켄이 함락되며, 마왕은 강림 2주 만에 리케이 대륙의 절반 이상을 생명이 살 수 없는 마물들의 대지로 만들었고, 살아남은 이들은 드라고니아 지방에서 숨죽이고 조용히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의문, 본인 정독 이유. 발견 불가. (난 지금 내가 왜 이걸 읽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아. 진짜 읽으라면 그냥 한 번 읽어봐. 이제 시작이라고.”





대륙이 비탄과 절망에 잠겨있을 때, 거짓말같이 이미 멸망한 오알리데, 아스타, 레이켄, 헤이즐, 베라시아에서 다섯 용사가 일어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워리어(Warrior), 아쳐(Archer), 거너(Gunner), 매지션(Magician), 라이더(Rider).

이들은 각지에서 자신만의 군대를 일으켜 마물들과 발록들을 쓰러트리며 천천히 대륙을 되찾아가기 시작했다.

워리어. 대륙의 서쪽 오알리데 변방에서 나타난 하프 엘프는 오른손에는 검고 투박한 태도를, 왼손엔 붉고 날카로운 태도를 들고, 종횡무진 적장을 휘몰아치며, 누구보다도 먼저 적진에 뛰어들어, 누구보다도 먼저 적장을 해치웠다. 그와 결속을 맺은 철룡 가흐라데의 은빛 비늘에 적들의 공격은 산산이 흩어졌다. 사람들은 그를 파동의 공왕이라 불렀으며, 이후 이 하프 엘프 검사는 파공, 바켈이라 불리게 된다.

아쳐. 대륙의 중앙, 아스타에서 나타난 여궁수는 왼팔을 붕대로 감은 채, 달빛이 어른거리는 대궁을 꺼내들곤, 단 하나의 화살로 수십의 육신을 취했다. 드래곤의 비늘로 제련한 대궁과 석궁을 사용했던 여자는 누구보다도 높게 날아, 누구보다도 먼저 목표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녀와 결속을 맺은 천룡 하르티카누의 날갯짓에 적들의 숨결은 얼어붙어 땅으로 떨어졌다. 사람들은 그녀를 두려운 달이라 불렀으며, 이후 이 여궁수는 마월, 다이엔으로 불리게 된다.

거너. 대륙의 동토 베라시아에서 나타난 검은 후드의 사내는, 다루기 힘들고도 신기하며 무서운 물질인 총이라는 무기를 사용하며, 불사의 대군을 이끌고 적들을 쓸어버렸다. 그와 결속을 맺은 사룡 니어브람의 발톱에 적들은 영문도 모른 채 죽음을 맞이하였다. 사람들은 그를 멸의 격발이라 불렀으며, 이후 이 사내는 사멸, 쥬로 불리게 된다.

매지션. 대륙의 남쪽 레이켄 마도왕국에서 나타난 보랏빛 머리칼의 여마법사는 스태프나 완드, 오브조차 들지 않은 채, 몰아치는 압도적인 화염으로 대군을 불살라버렸다. 알 수 없는 지식들과 이해할 수 없는 마법을 자유롭게 다루던 그녀는 누구보다도 현명하게 누구보다도 먼저 적의 계략을 간파해냈다고 한다. 그녀와 결속을 맺은 염룡 아노스레이의 눈물에 적들의 도시는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미친 불꽃이라 불렀으며, 이후 이 마법사는 광염, 무소라로 불리게 된다.

라이더. 대륙의 북쪽 헤이즐의 눈물숲에서 드래곤을 타고 나타난 이름모를 남자는, 그 누구도 이루지 못했던 드래곤 라이딩을 하며, 하늘에서 마왕의 군대를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거침없는 성격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던 호기로운 남자는 누구보다도 빠르게, 누구보다도 거침없이 적진으로 돌격해 들어갔다고 한다. 그와 결속을 맺은 광룡 바르라크의 뇌전에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언제나 푸른 번개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하늘을 가르는 일격이라 불렀으며, 이후 이 남자는 천참, 키헨으로 불리게 된다.

이들은 최후의 결전에서 데스페라도를 쓰러트리고, 발록들을 처리해 그 잔해를 대륙 곳곳에 봉인해 놓은 후, 홀연히 사라졌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대마전을 막을 내린다.

후에 발록이라고 불린 재앙을 상대로 대륙을 지켜낸 이 5명의 구원의 영웅을 사람들은 신의 전사라고 칭하며 이들이 처음 모습을 드러낸 다섯 왕국에서는 이들을 기리는 신전과 함께 그들의 힘과 지혜를 배우려는 자들을 양성하는 학교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다시 500년이 흘러 현재 리케이인들은 간간이 모습을 드러내는 발록들을 막기 위해 대륙의 강자들을 모아 만든 12부대의 에뉴얼 군사 체제를 정립하고 다섯 영웅의 의지를 이어 리케이 대륙을 지켜나가고 있다.





***





“그래서. 왜. 정보? (그래서 왜 이런 정보를 알려주는 건데?)”

“그래서라니! 이 엄청난 것을! 가상현실 게임이라고! 무려!”

“관심 없음. 졸림. (관심 없어. 잘 거야.)”

“야. 이 호구 자식아!”


어느 화창한 봄날, 화창하다고 말하기엔 뭐한 꽃샘추위가 찾아온 봄날이지만,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욕지거리를 써대는 한 남자와 그 모습을 가만히 무표정으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그대로 책상에 엎드려버리는 여자.


“최초로 개발된 가상현실 게임을 무시할 생각인거야? 어? 이것마저 무시할 생각인거야? 그게 말이 돼? 응? 사람이 말이야. 새로 나온 신문물이 있으면 체험하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다해야지.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냐! 너가 지금 하고 있는 건 분식집에서 겁나게 맛있는 신매뉴를 출시했는데 줄서기 귀찮다고 안먹는 거랑 똑같은 거라고!”

“딱히 신문물 싫음. 부정. 너. 싫음. 관심 없음. 졸림. (딱히 신문물을 체험하기 싫은 게 아니라 너가 싫은 거야. 관심 없어. 졸려.)”


남자는 남자라는 성정체성에 어울리지 않게 쫑알쫑알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있었고, 여자는 게슴츠레하게 눈을 한 번 떠보더니 귀찮다는 듯이 단어만 툭툭 내뱉고는 다시 책상에 엎어졌다.

동갑인 남녀 둘이 새 학기서부터 이렇게 붙어있는 것을 보고, ‘이 미친 것들은 새 학기 초에부터 벌써 연애질인가.’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한솔 고등학교에서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 시작이고만.’

‘저 쌍둥이들은 어디 갈 때마다 시끄럽네.’

‘왜 같은 반이야. 제발...’

‘생긴 건 반반하게 생긴 것들이 입만 열면 환상 깨네...’


그렇다. 나름대로 유명인사인 그들. 지금 책상에 엎어져 자는 척하며 창문을 통해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여자가 바로 누나, 백 서연, 그런 그녀를 향해 끊임없이 칭얼거리며 가상현실 게임에 대해 주절거리는 남자가 동생, 백 준형.

이 둘은 둘이 만났다하면 시끄러워진다고 해서 ‘소음 시너지’라는 별칭으로 악명을 떨치고 있었고, 그런 ‘소음 시너지’를 모른다면 전학생이거나 간첩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지 말고... 하자. 응?”

“그거. 장비. 필요? 얼마?”(그거 장비 필요하지 않아? 얼만데.)


옆에서 계속 쫑알거리는 준형의 말을 듣다듣다 지친 서연은 누워서 자는 척을 포기하고 일어나서 준형에게 물었다. 준형은 이 질문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말했다.


“응! 캡슐 하나당 300!”

“단위. 마음. 변경.”(단위에 따라 마음이 바뀔 수 있는데.)

“단위는 만원!”

“졸림.”

“아. 왜!”


또다시 철퍼덕 책상에 엎어진 그녀를 흔들며 칭얼거리는 철부지 없는 동갑내기 동생 준형을 보지도 않고 서연이 몇 마디를 내뱉었다.


“알바. 시급. 집세. 수도세. 전기세. 학교회비. 기타 등등. 돈 여유 전무. 불가. 개념 상실?”(알바해서 시급 버는 것도 없는데, 지금 그걸로 집세에 수도세에 전기세에 학교 회비도 내야하지, 그리고 기타 등등까지 합하면 전혀 돈에 여유 없거든? 못 사줘. 개념 상실했냐?)

“그... 그렇다고 개념을 상실했다고 말할 필요는...”


그녀의 말은 다른 사람이 들었을 때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하기 방식이었지만, 신기하게도 같은 ‘소음 시너지’에 속해있는 동생 준형만은 이를 잘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지만 동생이니 이해할 수 있으려니... 하고 넘어가는 학생들이었다.


“근데 지금 리케이 온라인 얘기하는 거야?”

“그런 거 같은데? 캡슐 얘기하는 거 보면?”

“아. 그거 나님이 인정하는 유일한 게임임.”

“미친. ‘님’ 자는 빼라.”


자. 지금 전형적인 새 학기의 고등학교 모습을 보며 지루하게 스크롤을 내리고 있는 당신들이 원하던 이야기를 이리 뒤늦게도 하려고 한다.

‘리케이 온라인’

지금 미친 듯이 인기를 끌고 있는 전 세계 사상 유래 없는 최초의 가상현실 게임. 그렇게 알려져 있다. 이 게임에 멋모르고 접속해서 내리 3일간을 게임 세상 속에서 푹 빠져 살았다는 평을 보면 엄청난 게임이라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었다,

게다가 광고에서 나오는 한 장면 한 장면 마치 엄청난 제작비를 들여 찍은 초호화 판타지 영화 같은 이펙트들과 용들의 모습은 전 세계의 사람들로 하여금 300만원이나 하는 캡슐을 당장 구입해 게임을 하게 만들었다.

그 여파로 지금 대한민국은 리케이 열풍에 젖어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 반에 리케이 온라인에 계정을 두고 있지 않은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이미 대한민국의 게임 시장은 리케이에게 먹혀버리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리케이 온라인의 회사인 아크 사가 순수 토종 한국 기업이라는 것. 뭐. 이런 건 관심 없을 테니 각설하고.


“근데... 누나...?”

“불안. 너. 평소. 누나. 안함, 죄? 자백 요망.”(불안하다. 너 평소에 나한테 누나라고 안하잖아. 도대체 뭔 죄를 지은거야. 빨리 그냥 있는 대로 불어라...)

“음... 그게... 이미 샀어. 데헷.”

“자살. 이런 방식. 희망?”(그동안 자살을 이런 방식으로 꿈꿔왔던 거냐?)

“아니 샀는데 어떡하라고. 낄낄.”

“수량.”(몇 개 질렀어.)


서연의 질문에 준형은 조심스레 손을 올리고 검지 하나를 펼쳐보였다. ‘한 개구나.’라고 서연이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앞으로 어디서 300만원을 얻어내지.’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그녀는 눈치 챘어야 했다. 슬금슬금 고개를 들다 결국 고개를 내민 중지를...


“중지. 적출. 희망?”(그 중지 확 뽑아버릴까?)

“잘못했어요. 누님께 신문물의 혜택을 맛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


곧바로 무릎을 꿇어 싹싹 비는 준형의 모습에 서연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자신을 위한 일이었기에 뭐라고 할 수도 없었고, 이렇게 자신의 앞에서 무릎까지 꿇고 사과하고 있는 것을 때린다는 게 그리 썩 기분이 좋은 일은 아니었다. 물론 준형이 진심으로 사과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서연도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아. 하느님 어찌하여 제게는 이런 시련, 아니 동생을 내리셨나이까.’라는 효과음이 귓가에서떠나지 않을 때, 수업 종이 울렸고 새 학기 첫 수업이 시작했다.

하지만 서연이 수업을 제대로 들을 수 있었을 것 같은가. 말은 관심 없다고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캡슐을 구입하고 유지할 비용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한 소리이지, 그래도 한 번 쯤 해보고 싶었던 게임. 어차피 동생에 의해 엎질러진 물이니,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 싱숭생숭한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결국 도합 600만원의 부재와 게임에 대한 기대감 때문에 그 날 수업은 다 날려먹고 옆에서 쫑알쫑알 떠드는 남동생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온 서연이었다.













[Off Line]
Get Ready to st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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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12-10 00:50 | 조회 : 1,646 목록
작가의 말
Holiday

조금씩 천천히 하지만 꾸준하게 다시 달려봅시다.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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