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에 홀린 광대

밤하늘에 묻힌 달빛 한 조각 입에 머금고 그대의 발등에 키스를 하리. 차가운 달빛, 당신의 그 환한 빛으로 내 얼굴을 전부 녹여주시길. 거짓된 얼굴은 반역자의 표본 이오 왕의 명령 하에 사형에 처하리.
입은 웃고 있으나 눈은 울고 있구나. 감정을 숨겨 웃음을 팔아 행복을 취하는 너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새하얀 얼굴 뒤에 감춰진 슬픔이여 달의 뜨거운 빛에 녹아 사라져 버려라. 웃는 가면 뒤에 감춰진 가엾은 사람이여 그 옷을 버리고 나와 함께 가자.

고귀하신 왕이시여 밤하늘에 군림한 단 하나의 달빛. 사람들은 모두 당신을 아름답다고 말하지만 저의 눈에는 그저 외로워 보이는 것은 어째서 일까요. 어둠과 공존해 길을 잃어 방황하는 이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시는 당신은, 그럼 누가 당신을 구원해 주나요. 구원의 대상인 당신도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지는 않으셨나요.
조명이 켜지고 밤이 찾아오면 너는 또 다시 슬픔을 지우고 웃음을 그리네. 웃음을 전하는 존재, 광대. 우스꽝스러운 옷과 반짝이는 구두로 경쾌한 리듬에 맞춰 흥겹게 춤을 추는 너가 어째서인지 슬프게만 보이는 것은 왜 일까. 평소보다 과한 그의 몸짓은 텅 빈 공허함을 달래려는 처절한 날갯짓. 아무리 화려한 날개를 품고 있어도 날아가려는 의지가 없다면 그건 깃털 한 조각만도 못해. 사람들에게 행복을 전하는 너는, 정작 너는 행복하단 말이냐.

당신을 처음 본 순간 저는 그만, 사랑에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어느 누가 당신을 신이라고 말했을까. 이렇게나 여리고 약한 당신을 그 누가 신이라 불리게 했단 말입니까. 모두에게 사랑 받고 모두를 사랑하는 왕님 당신은, 신도 달도 아닙니다. 그저, 결함과 불안이 존재하는 약하디 약한 인간일 뿐입니다. 완벽해지려고 하지 마십시오. 모든 사람은 다 불완전 합니다. 더 이상 밝게 비추려고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더 이상 모든 이들을 구원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람들이 당신을 신격화해 부른 것 때문에 자신을 정말 신이라고 착각하신 게 아닌가요?
너를 처음 본 순간 나는 그만, 연민과 동정심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사람들을 웃게 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정작 너는 점점 웃음을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그저 기계처럼 춤만 추는 광대. 너를 바라보는 수많은 시선들과 너를 향하는 수많은 목소리들. 그곳에서 도망치고 싶지는 않았느냐? 모든 걸 내려놓고 떠나고 싶지는 않았냐는 말이다. 우리 둘은 서로 무척이나 닮아있는지도 모르겠구나. 언제나 밝게 빛나야 하는 나와 언제나 밝게 웃어야 하는 너. 그것에 얽매여 진짜 얼굴은 희미해져만 가고. 가끔 사람들은 잊어버리는 것 같구나. 너 또한 아픔과 감정이 존재하는 인간이라는 걸. 돌을 던지면 피가 흐르고 멍이 나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걸. 자기들이 만든 기준에 멋대로 끼워 맞춰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간단히 버려버리지. 그동안의 사랑은 모두 거짓이었던 것처럼. 광대라는 건 그런 직업이란다. 그럼에도 너는 계속 광대로서 이 삶을 살아가고 싶은 거냐?

당신은 왕 나는 신하. 왕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오늘도 신하는 그를 위한 춤과 노래를 한다. 경쾌한 리듬에 맞춰 빠르게 움직이는 발. 허공을 가르는 그의 손짓은 이제 막 세상 밖으로 나온 어린 새의 날갯짓과 같다. 뜨거운 조명 아래 땀으로 몸을 적시고 차가운 달빛 아래 타는 목을 축이네. “밤의 물결에 젖어 반짝이는 너는 별과 같구나.” 라며 조용히 미소 짓는 왕의 눈동자에는 신하의 붉게 물든 얼굴이 만월처럼 가득 차올랐다. 흥겹게 춤을 추던 신하는 왕의 손을 붙잡고 내려와 같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왕은 잠시 당황했으나 이내 남들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같이 춤을 추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의 왕과 신하가 아닌 사람과 사람으로.
언젠가 왕이 신하에게 말했다. “광대란 삶은 가혹하기만 할 터이니 그 옷을 버리고 나와 함께 가자.” 그것은 일말의 동정심이었으리라. 곧이어 신하는 왕에게 말했다. “이미 각오한 일입니다. 무엇보다 저는 춤을 추며 노래하는 게 가장 즐겁습니다.”

저는 광대. 춤추며 노래하는 게 가장 즐거운 광대일 뿐입니다.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너의 맨얼굴을 보고 싶었다. 두꺼운 분장 뒤에 숨겨진 너의 진짜 얼굴을. 불편한 광대 옷을 벗어 던지고 무거운 장신구도 모두 빼버리고 춤을 추는 너를 보고 싶었다. 광대야. 광대야. 너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구나. 광대야, 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구나. 단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다시 내 손을 잡아주렴. 너가 없는 이 밤에 나는 무엇을 위해 빛나리. 광대야. 나의 광대야. 아무것도 아니면서 또 아무도 될 수 없는 존재, 광대. 지금 이 순간 너는, 너는 지금 어디를 보고 있느냐.
펑, 풍선이 터지는 소리에 묻혀 사라진 죽음의 속삭임. 총알은 빠르게 풍선을 뚫고 너의 심장 속에 박혔다. 조각조각 깨진 풍선조각들이 뒤섞여 오색찬란한 광대 옷을 연상 시켰다.
그의 손에 들린 여러 색의 풍선들. 빨강은 정열을 상징하며 풍선이 터지는 그 순간 그의 도전도 끝나고 말았다. 광대와 가장 잘 어울리는 색인 주황. 그에게 주황색은 어울리지 않는다. 우울하고 나약한 자신과 마주했다. 웃음을 팔아 사람들에게 행복을 전하는 너는 노란색의 사람이다. 파랑은 슬픔. 광대에게 슬픔은 필요하지 않아. 하나씩 터져가는 풍선에 맞춰 그의 마음 속 깊은 무언가도 함께 터졌다.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불협화음처럼 귓가에 박혔다. 공포, 두려움, 호기심, 당황, 가엾음. 그들 중 오로지 단 한명만이 순수한 슬픔을 토해낼 뿐이었다.
조용한 절규, 그것은 모든 것을 잠재우기에 충분했다.

새장 속의 새는 하나의 깃털만을 놔둔 채 저 멀리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홀로 외로이 춤추며 노래하는 가엾은 새 한 마리. 별처럼 반짝이며 빛나던 너는 이제 정말 밤하늘의 별이 되어 다시 볼 수 없구나.
너는 별 나는 달. 깃털 하나 가슴 속에 품고 훨훨 날아 너의 곁에 가고 싶구나. 인간이란 어찌 이토록 슬프고 나약한 존재란 말인가. 너의 차갑게 식은 시체를 끌어안아 저 멀리 밤의 끝자락으로 가네.

조명이 켜지고 밤이 내려앉으면 나를 바라보는 수많은 별들 사이로 당신만을 위한 연주를 하리. 몸을 불편하게 하는 장신구 따위는 필요 없어. 무거운 옷은 버려두고 두껍게 칠한 분장도 전부 지워버리고 웃음이 아닌 슬픔을 팔아 나는 행복해지고 싶어. 웃는 광대의 모습이 아닌 진짜 나의 모습을 바라봐줘.

거기에 있는 당신은 누구인가요? 당신들이 바라는 저의 모습은 무엇인가요?
그건 정말 제 모습이 맞는 건가요.

그는 춤추었다. 어린아이 손에 꺾이듯 꺾여나간 상처받은 마음처럼. 몇 줄의 글을 안주삼아 마시는 술잔처럼. 술에 취한 듯 흘러가는 그의 몸짓은 눈물이 메말라버린 어른이었고 달에 홀린 듯 울렁이는 그의 몸짓은 아이의 처음이자 마지막일 울부짖음이었다. 수근 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 그럼에도 그는 계속 춤추었다. 그에 눈동자에 비치는 것은 관객석이 아닌 단 하나의 달빛. 밤하늘에 가득히 차오른 만월이었다.

마음껏 사랑하고 또 사랑받는 삶을 살고 싶었다. 잔인한 총구는 머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긴 순간.

탕, 새하얀 흰 도화지 같은 얼굴에 붉은 물감이 쏟아졌다. 거짓된 얼굴은 반역자의 표본 이오 파멸을 맞이하리.
찰칵, 조명이 꺼진 어두운 관객 속 반짝이는 핸드폰 불빛들. 밤하늘에 펼쳐진 수많은 별들은 그를 조롱하며 단 하나의 달빛만이 그에게 애도를 표했다.


광대야. 그를 부르는 다정한 목소리에 내미는 손길은 구원 혹은 어둠.
아아, 왕이시여 내 사랑. 별이 되어 당신의 입에 입 맞추며 영원히 곁에 있으리. 몇 번 이고 다시 되새기리. 이제 더 이상 당신 혼자 외롭게 두지 않겠습니다.
왕과 신하, 달과 광대는 밤의 장막에 몸을 숨겨 모든 것을 배신한 채 영원히 어둠 속으로 잠겨갔다.

광대가 있던 그곳에는 하나의 깃털만을 남겨둔 채 사라져 버렸다. 이에 사람들은 말한다. 달이 광대를 데려갔다. 광대는 달에게 홀려있었다.

달에 홀린 광대.



나는 광대. 춤추며 노래하는 광대일 뿐이다.



"속보입니다. 연예인 이 모씨가 오늘 밤 11시경 자택에서 숨 진채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평소 그는 악성댓글로 인해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렸으며."

세상 속의 여러 이름 없는 광대들이여 밤하늘의 별이 되어 그 누구도 아닌 오직 너를 위한 춤과 노래를 하렴. 광대라는 삶은 가혹하기만 하다. 하지만,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라 너를 욕한 그 사람들의 잘못이니 다음 생에서도 또 다음 생에서도 너가 하고 싶은 걸 하렴. 그때는 부디 더 이상 너가 혼자 아파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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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10-17 20:27 | 조회 : 1,231 목록
작가의 말
sohyung

다음 생에도 또 다음 생에도 어떤 걸 원하고 선택하든 부디 더 이상 상처받고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악플러들 잘못이지 그 사람들 잘못이 아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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