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인정 못해, 안해!


인파가 몰리기전 영리하게 먼저 강당을 빠져나온 최현우는 이제는 굳게 닫혀있는 강당 문을 쳐다봤다.

학생회 사람들이 나오고 시간이 꽤 지났는데 나오라는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아침부터 저기압에 얼굴은 죽을 상을 하고서도 반박할 수 없는 핑계를 대던 그에게 뭔가 문제가 있어보여 내버려둘 수 없었다.

종종 그런 우울한 얼굴로 시치미를 땐적이있었다.

딴에 주변을 신경쓰지 않게 하려고 괜찮은 척 하는 것 같은데 표정이나 말투로 티가 나서 모르는 척 하기 힘들정도였다.

'고요한 선배님 그렇게 안 봤는데 빡도니까 무서운 사람이네.'

안에서 무슨일이 있었는지 고요한에대해 떠들며 지나가는 학생회덕분에 상태가 말이 아니게 좋지 않다는 걸 깨닫았다.


"그때랑 비슷한가."


웬만해서 화를 내지 않는 성격인데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견딜 수 없게 되면 미친 사람처럼 꼭지가 돌아버리는 녀석이었다.

최근 학원을 못가서 안절부절해 하던것도 있고 제일 크게 유지원이라는 문제가 있었으니 생각해보면 꽤 오래 참았다.


"그럴거면 그냥 나한테 말하지."


미련스럽게 참다 폭발하는 고요한 성격에 한숨을 내쉰 최현우는 벽에 기대선 오분만 더 기다려 보기로했다.


-


"그냥 한번 해. 키스든 뭐든. 그러고 끝내자."


내가 왜 하고싶지 않은 일을 해야되는가, 어째서 유지원의 말을 들어야하는가를 생각해보면 아픈 몸으로 막을 수 없었던 녀석의 스킨쉽을 피하기 위한 차선택이었다.

이왕 잘못 선택한거 책임감을 가지고 잘해보려고 마음까지 먹었었는데 못해먹겠다. 유지원에, 전명준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상태로는 몸이 낫는다 해도 노래에 제대로 집중할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감까지 고개를 들었다.

그럴 수는 없어.


"...진심이야?"


금빛같아보이는 연한 눈동자가 차갑게 일그러졌다.

진심을 담을 고백에 대한 답이 이래서 미안하지만 애초에 계속 대답을 하고있었다. 행동으로 눈빛으로 아니라고.


"진심이야. 너랑 엮이니까 하루가 편할 날이 없더라. 난 조용히 내가 해야할 일만 하고 살고싶거든? 이렇게 정신없는거 너무 피곤해. 그러니까 여기까지 하자."


하루가 멀다하고 긴장하고있어야하고 알고싶지 않은 실연에, 고백에, 여러가지 이야기들은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무겁고 부담스러운 것들이었다.

유지원을 알기전에는 전해 몰랐던 일들이니까 내 인생에서 유지원이 없어지면 나는 다시 조용했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


"...후회 안 하지?"


화가 난건지 아니면 실망한건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덤덤히 묻는 유지원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 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세 걸음에 눈앞까지 다가온 유지원에 한번 놀라고 거침없이 뒷목을 움켜잡고 당기는 힘에 두번 놀라야했다.

엄청난 힘에 맥없이 유지원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딱 1센치, 1센치를 남겨두고 내 입술앞에 유지원의 입술이 멈췄다.

비스듬히 고개를 돌리체로 쳐다보는 시선때문에 잔뜩 긴장한 심장이 날뛰는 소리는 줄어들지 않았다.


"하고싶어."


입술바로 위에서 말하는 유지원덕분에 심장이 바닥까지 곤두박질 치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호기롭게 해라고 뱉었을때는 그만한 각오를 했었다. 잠깐 내 몸이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될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뒷목을 꽉 붙잡고 있는 온기와 코앞에 있는 입술이 생생하게 말하고 있었다.
이 방법은 틀려먹었다고.


"이 상황에, 네 말을 들은 내가 뭘 어떻게 할 것 같아? 알겠다면서 키스나하고 물러날 것 같아?"


한글자 한글자 내뱉는 숨이 입술 위를 지나갈때마다 소름끼치는 감각이 흘러흘러 손끝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X발, 미치겠네.


"하고싶은 마음이 백이면 그만둘 생각 없는 것도 백이야. 고요한, 넌 날 너무 쉽게봤어."


제발, 이 자세 풀고 말하면 안되겠냐? X나 소름끼쳐서 미칠 것 같은데.

손톱으로 칠판을 긁었을때의 감각이 온 전신을 감싸 사람 마음을 안절부절 못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긴장하고있으면 역시 하고싶은데. 어때? 괜찮겠어?"


어느새 주도권을 잡고 판도를 뒤집어 버린 유지원은 여유있는 미소를 되찾고는 놀리듯 아주 느리게 다가왔다.

놀아나도 유분수지. 이건 대놓고 키스는 하겠지만 포기할 생각은 없다는거잖아. 대체 사람 말을 어디로 들어 쳐먹는거냐고!

욱한 마음에 옆으로 고개를 돌리고 유지원을 밀어냈다. 쉽게 밀쳐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전보다 거리가 생겨 편하게 숨은 쉴 수 있었다.


"내 말은 귓등으로 들었냐? 할거면 앞으로 나 안 건든다는 조건하에 하라고."


"그게 가능할리 없다니까?"


"진짜 사람 빡돌게 만들래?!"


"그러니까 그렇게 예민하게 굴지 않으면 되잖아. 뭐가 문제야? 내가 널 좋아하는 것 뿐이지 내가 널 괴롭힌다는게 아니잖아."


"...야, 넌 다른 사람 의사따위는 안중에도 없지? 내가 너한테 싫다는 말을 몇번이나 했는데 그거 싸그리 무시해놓고 문제가 없다고?

네가 날 좋아하든 말든 난 너 신경쓰기 싫어! 나 바쁘다고. 할 일이 태산인데 네가 옆에서 알짱거리면 얼마나 신경쓰이는줄 알아?

X발, 학생회에 든것도 너 피하려다 든거잖아. 근데 이게 뭐냐고!

하, 됐으니까 그냥 나 좀 내버려 둬라. 학생회고 전명준이고 너고 다 짜증나니까."


이게 유지원의 고백에 대한 나의 진심어린 답이었다. 세상 편하게, 조용하게 살겠다는데 갑자기 나타나서는 뭣같은 일만 겪게 만든 유지원과 더이상 엮이고 싶지 않았다.

서로 다른 인생 살면서 어차피 멀어질거 처음부터 감정에 물주지 말고 빠이하자는 말을 하고싶었다.

되도록이면 유지원이 상처를 덜 받았으면 하는 마음에 순화하고 순화해서 말하려고 했는데 상황이 이렇다보니 날 것 그대로 나와버렸다.

그래도 쌓아놨던 것을 뱉으니 속은 시원했다.

후, 나도 모르게 학생회 감투썼다고 성격 좋은 척 했었나봐. 원래 이렇게 성질머리 더러운 사람인데.

이재민 말대로 진짜 나 답지 않았어.

이제 유지원이 알아들었다는 말만하면 끝나는 상황이기에 녀석의 대답을 기다리는데 기대와 다르게 유지원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알아 들은거지? 그럼 좀 놓"


"내가 신경쓰였어?"


"뭐?"


"네 할 일도 못할만큼 내가 신경쓰였어?"


어떻게 들어도 그런 뜻이 아닌데 자기가 듣고싶은대로 번역해서 이해하는 능력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거 진짜 미친놈인가?


"어딜봐도 그런뜻은 없었는데 뭘 들은거냐?"


"어딜봐도 그런 뜻이었는데?"


와... 그냥 내가 죽어야겠다. 이 미친놈한테는 말이 안 통하니까 내가 죽어야지 X발!!


"야, 유지원, 너 진짜...!"


쵹이라는 야릇한 소리가 나면서 유지원의 입술이 붙었다 떨어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어떻게 방어할 시간이 없었다.


"너.. 유지원... 이 미친, 미친새끼야!!"


또 한번 다가오는 유지원을 밀쳐내고 재빠르게 둣걸음질로 거리를 만들었다. 미친, 진짜 개빡쳐!

있는 힘을 다해 유지원을 노려보자 녀석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한걸음 다가왔다. 그 움직임에 움찔거리며 다시 거리를 만들었지만 이름모를 패배감에 자존심이 상했다.


"난 네가 이렇게 화내는 것도 좋더라."


...이거 완전 또라이 아니냐? 미친 진짜. 돌겠네.


"그렇게 혐오스럽다는 듯 봐주는 것도 좋고."


"...너, 제정신 맞아? 정신 괜찮냐?"


혹시나 고백에 대한 거절로 충격먹고 헛소리를 하는 건가 싶어 확인차 물어봤다. 이런 의도라는걸 알고있는건지 유지원은 피식웃으며 입을 가리고 큭큭거리기 시작했다.

이제 조금 무섭기까지 하려는데... 진짜 미쳤봐.


"이것 봐. 전처럼 성희롱이다, 신고할거다 소리는 안 하잖아. 큽, 시간 여유롭게 줄게 천천히 인정해도 돼."


"...뭐, 뭐?"


"너도 나 좋아한다는 사실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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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4-14 03:17 | 조회 : 1,813 목록
작가의 말
gena

지원이는 능숙하게 주도권을 빼앗았다. 요한이의 발버둥은 대실패했다.(푸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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