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양호실

1교시, 2교시, 3교시가 휙휙 지나가... 기는 무슨. 정말 길게도 지나갔다.

1교시가 문학이요, 2교시가 영어요, 3교시가 수학이란 환상의 조합의 수업시간이 짧을 리가 없다. 게다가 하나같이 성가신 과목들이어서 머리가 굉장히 지끈거린다. 대체 왜 이렇게 짜신건지.

지금은 3교시가 끝나고 쉬는 시간. 바다와 시율이는 뭐하는지 흘낏 보니 바다는 잘 자고 있고, 시율이는 묵묵히 교과서에 쓱쓱 써내려가고 있었다. 응 평소대로네.

바다는 다 풀어서 자는 거고, 시율이는 다 못 풀어서 열심히 하고 있는거다. 매번 보고 잘 아는 거지만 분하긴 하다. 나나 시율이는 머릴 싸매도 이해 못하는 게 많은 편인데 바다 저건 잘 안 하면서 금세 뚝딱 다 풀어서 쉬어버리곤. 천재를 질투하는 기분이 이런건가 싶다.

“강우야. 너 지금 톡 건드리면 쓰러질 것 같은데?”

“어? 어어....”

박하가 걱정해주는 말조차 이젠 대답도 못하겠다. 박하가 제대로 봤다. 정말 쓰러질 것 같다. 밤에도 했는데 오늘 아침 일어나자마자 또 해버리고 거기에 국영수 콤보...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한계다. 그리고 여기에 무려 4교시가 체육이다.

“자고 싶어....”

지금 나에게 절실히 필요한 건 휴식, 정확히는 잠이다. 그런데 이런 상태에서 체육을 뛴다? 나보고 쓰러지란 소리지.

“그러니 양호실에 갔다 올게. 체육쌤에게 잘 말해주고.”

“응. 쉬다 와.”

“아! 나도 같이 가. 사실 나도 죽을 것 같아.”

딱 봐도 나 수업 안 들을래 라는 티가 팍팍나는 찬규의 말에.

“아니. 넌 지금 베스트 컨디션 상태야. 오히려 소모해야 돼.”

“아니. 바보는 지치지가 않는대.”

“이게~ 뭐라는 거야아~!”

“아아아아... 곧 쓰러질 것 같은 사람에게 헤드락이라니.”

웃으면서 헤드락질이라니. 지금 내 비명이 안 들리니?

“으아앗! 이 자식이! 지금 내 젖꼭지 꼬집고선!”

“그니까 누가 헤드락 걸으래.”

어쨌든 풀렸으니 찬규 녀석에게 더 잡히기 전에 빨리 양호실로 갔다. 으으... 평소에는 길지도 않는 복도가 오늘따라 유달리 길어보인다.

“야. 너 괜찮아?”

정말 쓰러질 것 같던 찰나에 괜찮냐는 말과 함께 매일 느끼는 온기와 함께 뒤에서 시율이가 부축해줬다. 그 말에 나는 솔직하게.

“아니. 전혀. 그래서 양호실에 가게.”

“데려다 줄게.”

“...응. 그래줘.”

시율이는 고개를 끄덕이곤 처음에는 그냥 부축해 갈 줄 알았다. 하지만 갑자기 시율이는 내 몸을 번쩍 들더니 그대로 공주님 안기로 들어올렸...!

“어? 어어어?! 저기, 굳이 이렇게 들어줄 필욘 없거든?! 다른 애들도 다 있고?!”

내가 내 얼굴을 못 보지만 엄청 달아오르는 게 느껴진다! 주위에서 우리 둘을 보곤 수군거리는 애들도 꽤 되고. 하지만 지금 그런 것 보다 매일 보는 얼굴이고 매일 이렇게 얼굴을 가까이서 보지만 볼 때마다 두근거리는 걸 넘어 쿵쾅거린다. 안경을 쓰고 있긴 해도 이런 건 반칙이잖아....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진 아무래도 좋고 이렇게 가는 게 더 빨라. 다들 알아서 생각하겠지 뭐.”

“그렇게 생각 안 하거든?”

얼굴과 다르게 의외로 이런 건 생각도 안 한단 말야. 정확히는 안경을 벗었을 때의 얼굴.

시율이에게도 말했지만 안경을 썼을 때와 벗었을 때의 인상은 정말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 안경을 쓰면 무뚝뚝하고 좀 어두운 인상이긴 하다. 애들이 말했던 그대로. 하지만 벗었을 때는 말 그대로 빛이 난다. 분위기도 좋은 방향으로 전혀 달라서 솔직히 애들에게 보이기 싫다. 치근덕 댈까봐.

그 사이 어떻게 됐는지는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수군거리던 것도 그렇고 시율이가 어떤 얼굴이고 어떻게 다녔는지도. 하지만 도착했단 말에 그제서야 양호실에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너희 둘 왜 그렇게 온 거야?”

아주 가끔 보지만 뭐랄까 엄청나게 완고해보이는 인상의 중년대의 여자 양호 선생님이다. 농담은 조금도 통할 것 같진 않지만 질문은 어디가 아프냐란 말이 아니라 인상과 다르게 좀 엉뚱한 질문이었다. 뭐, 동급생인 남학생 둘이 있는데 한 명은 같은 남자를 무려 공주님 안기로 들고 있고 나머지 한 명은 그대로 안기고 있으니 무리도 아니겠지.

“강우가 몸도 제대로 못 가눠서 안고 왔습니다.”

하지만 시율이는 마이페이스로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사실을 얘기했다.

“그래. 일단 침대에 눕혀줘라. 어떤지 상태를 봐야하니까.”

새하얀 침대에 눕혀지고 양호 선생님은 학교 양호 활동 치곤 생각보다 꼼꼼하게 상태를 살펴봤다. 그래봤자 3분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선생님은 상태를 안 듯 했다.

“단순히 체력이 떨어지고 피곤해서 그런 거고 기분탓이지만 정기가 쫙 빠진 것 같네. 어제부터 뭐했길래 체력이 이렇게 소모된 거야? 잠 안 잤고 밤새도록 자위라도 했니?”

“풉!”

갑자기 나온 직설적인 말에 나도 모르게 뿜어버렸다. 당황스러운 것도 당황스러운 건데 비록 어제 한 행위가 자위는 아니지만 자위행위처럼 정력을 소모했었으니 정곡이 찔렸으니까. 물론 어젯밤과 오늘 아침은 혼자 자위하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되지만.

“엄청 직설적이시네요.”

그러나 시율이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는다. 안경끼고 있을 때 시율이는 표정이 잘 안 보이지.

“이런건 직설적으로 말해야 사실을 알 수 있거든. 그리고 이 녀석 반응으로 볼 때 사실인 것 같아.”

뭐 이런 분이... 이분도 만만치가 않게 지독한 사람이구나.

“뭐, 좀 자두면 된다. 그러니 자고 수업하면 얘 재우고 있다고 얘기 좀 해다오.”

“알겠습니다.”

양호 선생님이 커튼 밖으로 나가는 걸 확인하고 시율이는 내 머리를 살짝 쓰다듬곤.

“푹 쉬고 있어. 알았지?”

“...응.”

시율이가 나가는 걸 보곤 쓰다듬은 곳을 만져봤다. 하아~ 아까 엄청 놀랐네. 본 사람들도 많았는데. 게다가 이상한 일은 삽시간에 퍼진다고 분명 시끄러워 질텐데....

“...아, 몰라. 배째.”

단순히 생각해보면 몸도 부축하지 못하는 사람을 들고 간 것뿐이잖아. 뭘 켕긴다고.


“으... 아.”
시야에 보인 것은 방이었다.

현재 우리 셋이 살고 있는 방이 아니고 예전에 서로 알긴커녕 만나지도 못했을 때의 내가 지내던 방.

정말 지저분하고 어두우면서도 조금의 배려도 없는 방이다. 이불은 다 헤지고 비품도 다 낡아빠져서 언제 파손되도 이상할 게 없는 상태. 그리고 또 다른 방이나 다름없는 낡은 장롱....

“...기분 나빠.”

이게 꿈이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이곳만은 애정을 줄래야 조금도 줄 수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런 나쁜 곳에서도 유일하게 좋은 기억 하나는 있었다.

끼이익....

귀에 거슬리는 소리에 이젠 있을 리도 없지만 저도 모르게 몸이 움찔거렸다.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극복하지 못했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문 밖에 있는 아이 둘을 보곤 약간씩 떨리던 몸은 제어하지 않아도 떨림이 멈추었다. 이때는 몰랐는데.


“.......”

부스스 눈을 뜨니 새하얀 천장이 보였다. 요샌 안 꿨는데 나와서 기분은 별로 안 좋았지만 마지막에 둘을 봐서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꿈이 짧게 끝나서 얼마 못 잔 것 같은데.

“지금 몇 시....”

일어났으니 시간을 보려고 옆으로 시선을 돌렸고.

“아, 깼어?”

돌린 곳엔 천연덕스러운 시선으로 보는 바다가 누워있었다.

“헉! 아, 깜짝이야. 지금 수업 중 아냐?”

“축구하다 다쳐서 양호실 왔어. 그리고 어떤지 보고 가려고 했는데 상태가 좀 안 좋아 보여서 옆에 누워있었는데 바로 깨버렸네.”

다친 곳은 왼쪽 무릎이었다. 아무래도 까진 것 같지만 반창고만 붙여있는 걸 봐선 그렇게 심하게 다치진 않은 것 같다. 그나저나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라....

“들키면 어쩌려고. 것보다 양호 선생님 없었대? 그 선생님 열라 직설적이라 상당히 놀랄 말 많이 하던데.”

“응. 양호 선생님 잠깐 밖에 나갔다 오신대서 내가 알아서 치료했어. 어차피 난 양호위원이고.”

그러고 보니 그랬었지.

“그리고 밖엔 자리 비웠다고 쪽지 붙여놓고 문도 잠궈놔서 여기엔 우리 둘 뿐이야.”

이 뭔 싱글싱글한 표정을... 아!

“그러니까~”

안돼! 막아야 돼!

“야! 여긴 학교라고! 게다가 양호 선생님이 잠 안 자고 밤새 자위라도 했냐고 말했을 때 얼마나 철렁 거렸는 줄 아냐?! 여기서 한 번 더해버리면 그 선생님도 알 테고 나도 분명 하루 종일 내내 기절해버릴 거라고!”

“무슨 소리야? 점심시간까지 같이 있자고 말하려고 한건데?”

“거짓말.”

아까 그 얼굴은 분명 하고 싶단 얼굴이었거든!

“뭐야~ 학교에서까지 하고 싶었던 거야? 우리 강우는 엄청 호색한이네~.”

이, 이이...!

“가장 원하는 건 너잖아악!”

결국 참지 못하고 베개를 잡아서 바다 녀석에게 휘둘렀다.

“아야야야! 잠깐만 나 환잔데 베게 스윙이라니!”

“그냥 무릎까진 녀석에겐 환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생각해보니 아침에 괜히 이 녀석이 시율이를 자극시키지만 않았으면 됐잖아! 다 이 녀석 때문이네!

그렇게 투닥이고 금방 힘이 빠져버려 풀썩 드러누웠다. 어우... 잠 자서 좀 회복됐나 싶었는데 역시 단잠이어서 또 뻗어버리고 말았다.

“하아... 하아... 으으... 괜히 힘만 뺐어.”

“네~ 네~. 참 기운이 넘치구나~.”

지금 힘들어서 죽어나가는 내 모습이 안 보이니?

“이제 괜찮지? 그러니 다시 자도 그 때 일을 꿀 일은 없을 거야.”

“아....”

항상 느끼는 거지만 이래보여도 바다는 눈치가 빨라서 같이 지낸 시간을 빼더라도 내 상태가 어떤지 잘 알고 있다. 방금 이런 행동도 아마 아까 내 상태를 보고 일부러 놀려댄 거겠지.

“...뭐, 이렇게 휘둘렀는데 다시 꿀 일도 없겠지.”

“그치?”

밝게 웃는 바다의 얼굴을 보면서 다시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누웠다.

“...고마워.”

“그러니 끝날 때까지 같이 자자.”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이불 속으로 쏙 들어왔다.

“아~! 또 좁아졌잖아! 베개와 이불은 하나 뿐이구만!”

“그럼 이렇게 안고 자는 건?”

“더워 그리고 불편해.”

“그래도 잠은 잘 올 것 같지?”

“.......”

잠은... 잘 오겠지 뭐.

9
이번 화 신고 2017-05-01 02:13 | 조회 : 7,620 목록
작가의 말
순수한O2

쉬는 날 없어서 시험기간이 빠르게 왔네요. 시험보신 분들은 잘 보셨길! 근데 이 작품 성인 등급으로 올려야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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