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1)

유국은 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대국이었다. 이곳에 비오리가 후궁으로 들어온 것은, 그가 15살이 되던 해였다.

남자도 아이를 가질 수 있기에 아주 가끔 황제나 군주들은 자신이 총애하는 남자를 후궁으로 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비오리는 조금 달랐다. 라인국의 군주이자 비오리의 아버지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술에 취해 아무나 데리고 자버렸더니 떡하니 생기고 만 아이였다. 그냥 내치기에는 당시 라인국에는 후계자라고는 오직 비오리 뿐이었고, 워낙 왕족들이 태어나질 않아 비오리는 왕족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15살이 되던 해, 라인국의 군주는 군후와의 사이에서 정식후계자를 얻었다. 수많은 후궁들과의 합방에서 조차 생기지 않았던 아이가 생겨버린 것이다. 이제 라인국에서 비오리를 왕족취급해 줄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간의 대우가 어디로 가버릴 수는 없었다. 때문에 라인국의 군주는 비오리를 재빨리 유국의 황제에게 화친의 조약이라는 이유로 바쳤다.

처음 비오리가 황제를 만난것은 15살. 아마 황제가 17살이었을 것이다. 황제는 빼어난 외모를 지니고 있었고, 6척이나 되는 장신에 왠지모르게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이 비오리를 짖누르고 있었다.

제아무리 유국이 강대국이라 하나, 라인국은 유국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국력과 재력을 지닌 나라였기에 비오리의 존재는 유국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고, 왕궁에서 거의 유폐되다시피 살아왔던 비오리는 유국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기에 반황족 세력이 비오리를 구슬리는 것은 아주 식은죽 먹기였으며, 얼마지나지 않아 비오리는 황제의 첫번째 비가 되어 귀비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비록 황후의 자리까지는 아니었지만, 황후가 없는 지금은 그에 상응하는 권력과 영향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

비오리는 유국이 좋았다. 라인국에서는 언제나 아버지의 눈에 띄지 않기위해 숨쉬는 것 조차 조심해야 했고, 저를 탐탁지않게 바라보는 주변인들의 시선에 정말 죽을맛이었으니까. 하지만 유국은 달랐다. 자신의 주변엔 늘 자신을 보살펴주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따가운 눈초리가 아니라 다정한 눈길로 비오리를 바라보았으며, 때때로 수다를 떨기도 했고, 함께 정원을 산책하는 등의 라인국에서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들을 할 수 있었으니.


"귀비님이 황후가 되시면 더 많은 사랑을 받을거예요."


비오리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언젠가 부터인가 비오리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유국에 오고나서부터 비오리는 사랑받는법을 알아버렸다. 그것은 너무 달콤했고, 아름다웠으며,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그 때부터 비오리는 줄곧 생각하고 있었다.

사랑받고싶어.

비오리가 유국으로 온지 2년이 다 되어갈 때 쯤, 황제가 갑자기 황후를 들였다. 그녀는 멸망한 테나국의 공주였다. 많은 대신들이 반발했지만, 황제의 뜻을 꺾는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아마 그때부터 였을테지. 비오리가 황후를 싫어하게 된 것은.

황제의 미모는 빼어났지만, 그것은 황후역시 마찬가지였다.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차분한 성격, 달빛은 닮은 새하얀 피부와 황제를 꼭 닮은 푸른색 눈동자. 그녀는 백성들을 위해 황제에게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는 당당한 사람이었고, 황제는 그런 그녀를 많이 총애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황후의 곁에 모이는 이들은 점점 더 많아졌다. 모두들 따뜻한 그녀를 사랑했다. 비오리는 그런 그녀가 너무 미웠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녀를 좋아했다. 그녀의 사랑을 받는건 어떤 기분일까.

그러던 그녀가 회임을 하였다. 만백성들이 황후의 회임을 축하했고, 나라는 경사가 일어났다면서 축제를 벌였다. 비오리가 그녀를 본 것은 귀비로써 황후의 회임을 축하하기 위해 잠시 황후궁에 들렀을 때와, 황후가 아이를 낳다가 그만 죽어버려 싸늘한 시체를 본것 이었다.

황제뿐만 아니라 나라가 침통해했고, 그라도 불운 중 다행이라며 아이는 건강한 사내아이로 태어났다. 황제를 닮은 검은 머리칼과, 황후를 닮은 새하얀 피부, 그리고 그 둘의 아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새파랗게 빛나는 눈동자. 어쩌면 비오리는 그 눈동자가 아름답다고 느꼈다.

황자가 태어난지 3여년이 지날 때 쯔음, 조정은 시끄러워졌다. 그 이유는 황제가 어떤 후궁도 들이지 않으려고 하고 있었고, 그나마 있는 비오리와도 첫날밤을 제외하고는 단 한번도 합방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많은 황족을 생산하는 것 또한 황제의 의무였고, 결국 황제는 어쩔 수 없이 비오리와 잠들게 되었다.


"... 귀비."


그 목소리가 처음으로 섬뜩하게 느껴졌다. 그날 비오리는 내내 굳어있었다. 황제의 손길은 전혀 다정하지 않았다.

황자가 12살이 되던 해에 비오리는 8살인 제 딸을 데리고 황자의 탄신제에 참석했다. 비오리의 딸은 단지 서출이라는 이유만으로 황족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비오리는 그런 아이가 너무 가여웠다.

또한 걱정이 됬다. 행여나 저처럼 사랑받지 못한채 살아가면 어쩌나. 그건 너무 끔찍했던 기억이라 비오리는 자신의 아이만큼은 자신과 다르게 아버지에게 사랑받길 바라며 황제와 라인국의 군주이자 자신의 아버지의 이름을 하나씩 따와 리진이라고 지었다.

리진은 참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황제를 닮아 영특하고, 비오리를 닮아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으며 한번도 본 적이 없을 황후처럼 다른이를 사랑할 줄 알았다. 그렇기에 비오리는 리진을 많이 사랑하고, 아꼈고, 리진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 날은 황제가 찾아왔다. 황후가 죽은 다음, 리진이 태어난 이후에도 황제는 때때로 비오리를 찾았다. 황제는 아주 화가 나거나 슬프거나 울적해지는, 기분이 좋지않을 때 그를 찾아왔다.

어째서지. 황자의 눈은 그렇게 아릅답다고 느꼈는데 황제의 눈은 전혀 그렇지 않아. 너무 무서워.

처음으로 비오리는 사랑받고 싶지 않았다. 황제가 무서워 달아나버리고 싶었고, 리진을 데리고 몇번이나 나라를 떠나버린 적도 있었지만, 늘 그렇듯 다시 황제에게 끌려돌아왔다.


".... 귀비는 이곳에 화친의 조약으로 온것이오. 자꾸 그리 도망치려하면 곤란해."

"......"

"분명 이곳에서 부족한 것은 없을텐데요? 먹는것, 입는것 무엇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소."

"......"

"아, 설마 황후의 자리라도 원하는게요? 그도 아니면 리진이 황족으로 인정받기를 원하는게요?"


비오리는 후자를 원했다. 리진이 정식황족으로 인정받게되면, 분명 비오리 자신과는 다르게 남들에게 사랑을 받고, 또한 그만큼 사랑을 베풀테니까. 하지만 리진이 정식황족이 될 수는 없었다. 그건 비오리가 남자였기 때문이다. 과거 대륙의 그 어떤나라에서도 남자가 낳은 아이는 정식적으로 황족이나 왕족으로 대우받지 못했다.


"근데 리진에 황족이 되지 못한게 내탓입니까, 비오리?"


그 때 비오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단순히 그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만이 아니었다. 그 푸른 눈동자가 어찌나 두려웠던지.

.... 그럼 리진이 황족이 되지 못한게 남자로 태어난 내탓인거야?


언제부터인가 비오리의 곁에 있던 이들이 하나둘씩 그를 떠나갔다. 황자는 곧 황태자가 될 것이고, 남성이 정식적인 황후가 된적은 단 한번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무엇보다도 황제가 그를 황후의 자리에 앉히지 않을것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이제 비오리에게 남은건 리진뿐이었다.

하지만 리진이 12세가 되던 해에, 황제는 리진을 비다국으로 보내버렸다. 뛰어난 학자들이 많은 곳이니 유학을 보내어 학문에 정진하라는 황명이었다. 비오리는 황제에게 울면서 빌었다.


"제발 리진을 나에게서 떠나보내지 말아요."


바로 곁에 황자가 있었지만, 비오리의 눈에는 오로지 황제만 보였다. 비오리는 황제의 부루마기 끝에 비참하게 매달려 빌고 또 빌었지만 황제는 싸늘한 시선으로 비오리를 내려다 보다가 그를 내버려두고는 그대로 나가버렸다.

결국 리진은 비오리를 떠나게 되었다. 서찰을 주고 받을 수는 있었지만, 워낙에 비다국이 유국과 떨어져있고, 중간에 험한 산들이 많아 리진과 비오리는 자주 편지를 주고받을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리진이 떠난 이후, 비오리의 삶은 점점 더 피폐해져갔다. 날이 갈 수록 비오리는 힘이들었다. 어째서인지 황제가 자주 비오리를 찾아왔다. 리진마저 없는 이 적막하게 넓은 황궁에서 비오리가 기댈 곳은 없었다. 황제의 두려운 푸른 눈동자를 보고 나서 더 이상 자신을 위로해 줄 이가 없었다.

비오리는 매일매일 울었다. 너무 울어 울다지쳐 잠이 들기도 했고, 또 눈이 너무 아파 의원을 부르기도 했으며, 때로는 눈물이 마른 것인지 눈물이 나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이젠 너무 힘들었다. 이전보다 자주 찾아오는 황제도, 자신을 측은하게 여겨 챙겨주려는 황태자도, 그리고 죽지못해 살고 있는 자신도.

비오리는 오랜만에 붓을 꺼내어 들었다. 아직 이전번의 답도 받질 못했으나, 리진에게만큼은 꼭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아니, 사실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그저 누군가에게 털어놓기만 하면 됬다.

비오리는 리진에게 편지를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목을 매달고 죽었다.


사랑받지 못하는 이만큼 비참한 존재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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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8-01-05 00:32 | 조회 : 3,958 목록
작가의 말
류화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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