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계략(2)




그 이후로 마인이 다시 리안에게 입을 맞춘다던지, 별다른 스킨쉽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둘 사이에, 전과는 확연히 다른 달달한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된 것은 확실했다.



카인과의 대련 이후로는 기사들 사이에서도 나름대로 평판이 좋아졌다. 몇몇은 리안에게 찾아와선 검술에 대한 객관적인 피드백을 요청하기도 했으며, 시녀들 중에서도 대놓고 수군거리는 이는 대부분 사라졌다.


그래서 리안은 조금은 마음을 놓았다. 이 가리어드에서의 생활이 점차 안정되어져 가며, 이제야 '평화로운 행복'이란 것을 느끼게 된 순간이었다.






"리안님, 지나 영애께서 차와 다과를 준비했다고 하세요."




그녀를 찾아가기 전까진, 그렇게 생각했다.





***





"거기 앉아요, 리안님."



리안이 옷을 갖추고 별궁으로 그녀에게 갔을 때, 지나는 다소 편안한 차림으로 간식이 놓여진 테이블에 앉아 그를 맞이했다. 여전히 온화하고도 따뜻함이 가득한 미소를 지으면서.



리안은 불편함을 숨기곤 태연하게 그녀의 앞에 마주 앉았다. 메리나가 찻잔에 차를 따라주자 향긋한 향기가 퍼졌다.

그것과 동시에 지나가 입을 열었다.




"리안님께선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



"그야....평소처럼-"



리안이 대답하려던 찰나, 지나가 싱긋 웃으며 말을 잘랐다.



"-전보단 확실히 나아진 대우를 받으신다고요?"



리안은 그녀의 숨겨진 의도를 눈치채기 시작했으나, 표정의 변화 없이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나가 손짓으로 메리나를 포함한 시녀들을 물렸다.

방에는 리안과 지나. 두 명과, 따뜻한 차의 향기만이 남았다.




지나의 표정이 언제 미소를 지었냐는 듯 싸늘하게 식어갔다. 리안이 찻잔으로 손을 뻗으려던 때, 차가운 지나의 말이 그것을 멈추었다.



"자신의 주제에 맞지 않게도, 꽤 즐겁게 지내시는 것 같아 보입니다. 망국의 황태자."



둘만 남으니 본성을 들어내는 건가. 180도 달라진 그녀의 태도에 리안은 헛웃음을 삼키며 찻잔을 들어올렸다. 아무리 그래도 리안은 많은 것을 겪어온 소년. 그녀의 철 없는 장난에 멍청하게 당해줄 생각은 없다. 그러나, 일단은 그녀의 말을 들어보자고. 그렇게 생각했다.



"스스로도 어이가 없지 않나요? 당신같은 하등한 버러지가, 이런 대우를 받는다. 그것에 의문을 가지지 않나요?"



리안이 조소를 지었다. 마주보는 지나의 표정은 한없이 싸늘하며, 더러운 것을 보는 양 눈빛엔 경멸이 가득했다. 리안 또한 차분히 입을 열었다.



"하등한 버러지라. 뚫린 입이라고 참으로 어여쁘게 말씀하시는군요. 제가 지금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지나는 감정이 담겨져 있지 않은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당신은 현 상황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 같군요......그러니까 네 녀석 따위가 나한테 질문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닐텐데..? 여기서 네 까짓 게 나에게 그 따위로 답한다면 제일 먼저 누구의 프라이드를 실추 시킬 거라 생각하는 거지?"



자연스럽게 반말로 대하는 지나의 태도에 리안은 어이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녀의 말인 즉, 마인의 약혼녀인 저에게 리안이 막대하는 순간 그것은 모조리 마인에게 나쁘게 돌아온다. 이 뜻이다.

그래, 뭐 좋다. 자신을 욕하고 깔아 뭉개는 것은 상관없다. 그녀가 뭐라고 떠들던, 그냥 넘기면 되는 일이다.



"망한 나라의 마녀의 자식 주제에 나대지 말란 말이야. 더 이상 후회할 일 만들기 전에 알아서 구석에 박혀 살던지,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네 주제에 맞춰 사는 게 서로 좋을거라고?"




그녀의 외관과는 다른, 소름이 돋을 정도로 날카로운 말들이 쏟아진다. 리안은 그저 한 귀로 흘리기로 하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제대로 무시당한 지나의 얼굴에서 냉랭한 무표정이 사라지고 아까의 상냥한 미소가 다시 걸렸다.



"지금부터 내 말을 한 번만 더 무시한다면, 황태자의 명예에 흠집을 내는 일이 벌어질거야."



리안은 그녀를 바라보며, 마찬가지로 웃어주었다.



"질문을 해도 안된다, 심기에 거슬리는 대답을 하지도 마라, 무시하지도 마라.... 어쩌라는 겁니까?"



지나는 몇 초간 리안을 가만히 응시하다, 차가 식기 시작할 즈음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하.........정말이지-"



그리곤 그녀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그대로 리안의 멱살을 잡곤 소름이 돋을 만큼 차가운 웃음기 어린 얼굴로 리안의 귀에 대고 소근거렸다.



"그냥 네, 예로 대답하고 눈 깔아란 얘기야, 버러지. 하여간 어째서 내 주변의 남자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답답할까."



리안은 멱살을 잡혔음에도 눈 하나 깜작하지 않았다. 지나는 공작가의 영애라는 '조신한 소녀'의 껍질은 버린 지 오래였다.



"어째선지 넌 황태자와 닮은 구석이 있단 말이야.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우리 가문에 빌빌대긴 커녕, 오히려 나를 제대로 무시한다는 점이나. 현 상황에 대해 파악하지 않고 무식하게 몰아붙이는 그 답답하고 한심한 성품이나. 사람들은 그가 냉철, 냉혈하다고 하겠지만 그는 단지 본능에 충실한 괴물일 뿐이야. 너랑 마찬가지로."



정말로 화가 난다는 듯, 하나 하나 비틀어짐이 없게 내뱉는 그녀의 말들에 리안의 표정이 처음으로, 진심으로 굳어갔다. 그녀는 마인을 정말로 사랑하고 있는 게 아니었나? 한 나라의 황태자를, 앞에선 한 마디도 못하면서 뒤에서 괴물이다 어쩐다... 그렇게 매도하는 건가? 이렇게 당당하게?-


마인을, 자신의 친구를. 아니, 이젠 좋아하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소중한 이를 저 더러운 혀로 더럽히고 있는 건가?



리안은 제 멱살을 잡고 있는 그녀의 가녀린 손목을 움켜쥐었다. 지나가 순간 흠칫하며, 손을 빼내려 했지만 남자의 힘에 대항하기엔 그녀는 육체적으론 너무도 약했다.



"저를 욕하는 건 그냥 어느 정도 참아주려고 했습니다만. 언제부터 가리어드가, 황태자가, 당신같은 나약한 여자에게 빌빌 대야 할 약한 존재로 바뀐거지? 나를 버러지라 부르는 건 상관없지만 그를 욕하는 건 제대로 엇나갔다고. 영애."



지나는 미간을 좁히며 손을 빼내려 했다.



"어디서 감히...! 망국의 왕자 따위가 뭘 안다고 이 나라와 괴물에 대해 잘난척 떠들어!"



괴물. 그 말에 순간 리안의 마음이 울컥함과 동시에 치솟아 올라왔다.



그 입으로 마인에 대해 욕하지 마....! 그를 괴물이라 하지 말란 말이야..!



리안이 이성을 잃은 듯 손을 들어 올리던 순간, 처음으로 '맞는다'라는 생각을 한 지나는 위험을 느끼곤 그대로 반대편 손으로 리안의 뺨을 때렸다.



-철썩



리안의 고개가 그대로 돌아갔다. 어느덧, 붉게 부어오르기 시작한 뺨을 돌보지도 않은 채 리안은 그대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곤 흐트러져버린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지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고맙군요. 방금 그것때문에, 머리가 식었네요."



리안은 그 말을 남기곤 뒤로 돌아섰다. 지나는 리안의 뒷모습을 매섭게 노려보며 톡 쏘아 붙였다.



"......감히 날 때리려 하다니, 오늘 일 후회하게 될거야."



리안은 아무 대꾸 없이 방을 나섰다. 그녀가 뺨을 때린 덕택에 정말로 황태자의 약혼녀를 때리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순간 이성을 잃은 자신을 반성한 후 리안은 그대로 빠르게 복도를 지나쳐 걸어갔다. 그때 복도에서 다가오던 메리나가, 차갑게 식은 리안의 표정을 보곤 걱정스럽게 물었다.



"리안님, 무슨 일 있으세요...? 지나님과는요..?"



리안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메리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곤, 다시 그녀를 지나쳐 방을 향해 걸어갔다.




'예상이지만, 그때 날 죽이려 했던 건 저 여자일 수도 있겠군.'




리안은 심호흡을 하곤 마음을 진정시켰다. 문득 마인이 떠올랐다. 그는 약혼녀가 어떤 성격을 지닌 여자인지, 알고 있을까.


그때 저 편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다가왔다.




"여~ 리안! 멍하니 서서 뭐하는 거야?"



콘들이었다. 리안은 오랜만에 보는 그의 모습에 서둘러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콘들은 씨익 웃으며 리안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딱딱하게 그러지 말라니까~. 그나저나, 잠시 좀 도와줄래?"



"예? 무엇을요?"



"그게, 내 아기고양이에게 검술을 가르쳐줘."



리안은 '아기고양이'라는 소리에 소름이 돋음을 느끼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아, 아기고양이라면...."



"응, 내 애인."



콘들이 당당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리안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곤 물었다.


"지금 당장이요?"



"응응. 그래서 내가 널 찾아온거라구? 물론 내가 가르쳐 줄 수도 있지만, 이래보여도 재상이라 많이 바빠서 말이야~."



리안은 빤히 쳐다보는 그의 시선에 머리카락으로 뺨 맞은 부근을 살짝 가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당히 열 받았었는데, 기분 전환이나 할까. 라는 마음으로 리안은 콘들을 따라나섰다.



***



"....있지, 계획을 앞당겨야 겠어. 오늘 꽤 큰 수모를 당했거든-."


"수모라면...?"



지나가 비틀어진 가식적인 웃음을 지으며 아까 일을 회상했다.



"맞을 뻔 했어. 진심으로. 그러니까, 제대로 준비해. 내일 당장 시작할 수 있지?



...-메리나."



어둠 속에서 그녀에게 대답한, 늘 리안의 곁에 있어 주었던 소녀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 지나님."



메리나는 싱긋 웃으며 지나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지나의 아름다운 얼굴에, 잔혹한 미소가 걸렸다.


어서 빨리, 리안의 상처받은 그 표정을 보고 싶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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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7-01-08 01:00 | 조회 : 3,346 목록
작가의 말
렌테

그 전의 복선들이 하나 둘 쓰이겠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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