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아침에 눈을 떴을 땐, 마인은 나가고 없었다. 평소에 일찍 깨던 습관 때문인지 나 또한 6시, 해가 겨우 고개를 들이미는 시간에 깼음에도 불구하고 마인은 이미 없었다.
목이 말라서 움직이려 했지만 수갑 때문에 침대에서 1m이상 벗어날 수 없었다.


붕대는 언제 갈았는지 피가 다시 새어나왔던 것이 아닌 깔끔한 하얀색으로 덮여 있었다. 온몸이 따끔거리는 고통에 이를 질끈 깨물곤 어기적 침대 위로 올라왔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또다시 똑같이 무기력한 하루가 반복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갑이라도 풀면 좋을 텐데. 어차피 도망갈 곳도 없는 몸인데.


속으로 투덜투덜 거리며 이불을 덮었다. 어차피 움직이지도 못할 것, 잠이나 잘까. 차라리 이런 평화로운 날만 계속 되면 좋겠다는 헛된 바람을 꿈꾸며 다시 잠에 들었다.




***




"저기........리, 리안......님?"



몇 번이고 애처롭게 불리는 가녀린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얼마나 잔 건지, 몸이 아까 깼을 때 보다 더 무거웠다.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뜨자 침대 옆에서 안절부절 못하며 끙끙대다 내가 일어난 것을 확인하곤 기뻐하는 14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보였다.



옛 웨리아에선 익숙하지 않은 선분홍빛의 단발 머리에 메이드 복을 갖춰 입은 앳된 소녀는 왼쪽 가슴에 메리나라는 명찰을 달고 있었다.



"어.....그러니까, 메리나? 무슨 일이신지.."



나는 어떻게든 피로한 몸에서 정신을 차리려 애쓰며 몸을 일으켰다. 메리나는 나의 은빛 눈동자를 마주하곤 살짝 흠칫했으나 곧 정신을 차렸다.



"아....황태자께서 황제폐하의 명령으로 수갑을 푼 뒤, 데려오라고 하셨기에..."


"황제폐하께서?"



역시 평화로운 날을 보내는 건 내 분수에 맞지 않았다. 속으로 한숨을 내뱉곤 침대에서 반쯤 내려와 걸터 앉았다. 메리나가 어색한 손놀림으로 수갑을 푸는 동안 다른 시녀들도 쭈뼛 쭈뼛 들어와 붕대 위에 입혀져 있던 하얀 셔츠위에 넥타이며 조끼며 이것저것을 걸치기 시작했다. 물론 무난한 디자인이긴 했으나, 포로에게 너무 후한 대접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뭔가 불안한데...?'



수갑을 풀고 어느 정도 머리까지 정돈을 받고나자 그제야 사람같이 보이는 듯 했다. 상처 때문에 일어서자 마자 찌릿하는 고통을 받긴 했지만 조금씩 익숙해졌다.


메리나의 안내를 따라 처음으로 이 방을 벗어났다. 복도는 붉은빛이 감도는 대리석 바닥에 세밀하고 화려한 장식들이 걸려있는 벽으로 꾸며져 있었다.



"저기 메리나라고 했나요."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말을 걸었다. 메리나는 살짝 어깨를 떨며 뒤를 돌아보았다.



"네, 네....아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아 그래. 카인이라고, 내 호위무사는 어떻게 되고 네가 대신 온건지 설명해 줄래? 분명히 카인이 앞으로 내 시중을 맡을 거라 들었거든."


메리나는 골똘히 생각하는 듯 눈동자를 굴리다 깨달은 듯 고갤 돌렸다.


"아, 그 분이구나..! 그 분이라면 기사단에 들어가시라는 명령 때문에 실력 검증을 받고 계신다고 들었어요. 한동안 바쁘실 거라, 제가 대신 시중을 들게 된 것 같아요."


기사단이라는 말에 놀라긴 했으나, 그 녀석에겐 차라리 그 편이 더 안전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에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아..그렇구나.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


자신의 생각보다 친절한 태도였는지 그녀는 살짝 놀란 표정이었다. 그러나 곧이어 아까부터 가지고 있던 긴장을 조금 풀고는 헤실 웃었다.


"네! 리안님."


'뭐야, 다른 시녀들이 말한 것 보단 훨씬 착하시잖아...? 눈동자도 예쁘시기만 하고..'



메리나와 몇 가지 더 이야기를 하는 동안 어느새 커다란 황금빛으로 칠해진 문 앞에 도착했다.


"여기예요."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곤 심호흡을 했다. 가리어드를 대제국으로 이끈 남자다. 아무리 마인의 살기에도 기절하지 않을 정도의 강단을 가진 나라도, 긴장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메리나가 옆으로 물러나고 문 옆에 서 있던 기사들이 문을 열었다.


"들어와라."



문을 열자, 생각보다 초췌한 얼굴에 황좌에 앉아 있는 가리어드의 황제와 그 옆에 서서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있는 마인이 보였다. 황제는 대제국의 영웅이라는 칭호와는 다르게 매우 병들은 상태였다.


"네가 그 여자의 저주받은 아이구나."


말 안에 분노가 깃들어 있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난 최대한 태연하게 예를 갖추어 인사했다.


"네 어미는 이제 공개처형될 것이다."


"예. 들었습니다."



너무도 태연한 내 목소리에 황제가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냐."


"글쎄요.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에게 모정을 느낄 수 없기에 슬픔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기분이 안 좋긴 하지만요."


"그렇군. 아무리 그래도 피는 못 이기나 보구나. 독종인 것 마저 서로 닮다니. 모순적이군."



난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라 생각하지 않는 여자를 닮은 '나'인가.



"이번에 널 부른 이유는 별 것 아니다. 같이 그 마녀 같은 여자의 죽음을 보러 가자는 것이였지. 생각보다 반응이 없어서 얘기가 짧게 끝났다만."



마인의 시선이 날 향했다. 내가 어떻게 반응할 지, 보고 싶은 듯 했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녀가 아무리 내게 애정을 주지 않고, 몇 년 동안 가둬놓으며 전쟁에까지 내몰았더라도 어머니인 것은 변하지 않을 텐데.

슬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난 그냥 가만히, 황제를 응시하며 서 있었다. 마인은 그것을 보곤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미간을 살풋 구겼다.




황제와 마인을 뒤따라, 처형장으로 갔을 땐, 많은 민중들이 모여 있었고 황제 자리와 마인의 자리를 비워두곤 황비를 포함하여 다른 왕족들이 앉아 있었다. 이 정도 규모가 모여야 할 정도로 그녀의 죽음이 큰 의미던가


내가 들어오자 모두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이렇게 많은 시선이 쏠린 것은 오랜만이라, 순간 당황했다. 그리고 그 당황은 곧, 고통이 되었다.



"저 녀석이 황비 마마를 죽인 마녀의 저주 받은 아들이다!!!"


정적을 깨고 누군가 소리침과 동시에 주위에 몰려 있던 민중들이 모두 분노 가득한 목소리로 나에게 욕설을 시작했다. 다른 왕족들의 표정에 비웃음, 경멸이 피어 올랐다.


"죽어버려, 네 어미를 따라!!!!!!"


"저 녀석도 죽여라!!!"


"눈을 봐! 남자가 저 눈동자를 가지다니, 저주받은 게 분명하다고!"



누군가가 돌을 던졌다. 바로 잡을 수 있을 만큼 선명하게 보였지만 그냥 맞았다. 이마가 찢어지며 하얀 머리카락을 물들이는 게 느껴졌다. 황제와 마인은 마치 무언가를 시험하는 듯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하여 몇 명이 더 오물인지, 돌인지, 계란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을 던졌다.



그때 내 시야에 들어온 것.


단두대 앞에 서 있는 , 죽음이 다가올 것도 신경쓰지 않고, 분노에 대상이 된 날 보며 꼴 좋다는 듯 웃고 있는, 많이 초췌해진 데리지아였다.



"하........"


입에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평화는 무슨, 내가 꿈꾸기에 그렇게 평화로운 일상이 어려운 것이었나. 속에서 가두어졌던 신력이 들끓어 마치


토할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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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6-12-25 21:11 | 조회 : 4,119 목록
작가의 말
렌테

역시 물타기는 한 명으로부터 시작된다져 모두 메리쿠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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