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네가 증오스럽다



밤기운이 가득찬 서늘한 바람에 리안의 몸이 살짝 움찔하며 무겁게 닫혔던 눈이 떠졌다. 그리고 몇 초 있지 않아서 왼쪽 눈을 덮고 있는 답답한 무언가가 붕대라는 것을 깨달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따듯하고 보드라운 실크로 만들어진 침대의 느낌에 적응하지 못하고 몸을 일으키자, 온몸에서 찡한 고통이 몰려왔다.



"윽...."



고통에 눈썹을 살짝 찌푸린 리안은 시야를 방해하고 있는 하얀색 앞머리를 손으로 대충 걷어내곤 주변을 살펴보았다.


-철그럭


"? 뭐야 이건."


몸을 제대로 일으키자마자 들리는 철이 부딪히는 소리에 그의 손목을 바라보자, 왼쪽 손목에 신력이 담긴 듯한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마지막 기억이 마인의 손에 붙잡혀 가리어드로 온 것이었으니, 이곳은 가리어드의 궁궐일 터다. 황실치곤 덜 화려하면서도 고풍스러운 온갖 가구들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손목에 채운 수갑도, 도망가지 못하게 해놓은 것이겠지.


이해가 안되는 점은 굳이 노예로 쓸거면서 상처 치료를 해 놓은 점이나, 딱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넓은 침대에 눕혀놓은 점이다. 방심하게 해 놓고 무언갈 할 속셈인가.


한참을 상황 정리에 힘쓰고 있을 즈음, 갑자기 세밀하게 무늬들이 새겨진 방의 문이 열렸다. 절로 어깨에 힘이 들어가며 긴장을 한 리안은, 그 주인공이 웨리아에서 유일하게 자신에게 진심으로 대해주던 호위무사, 카인이라는 것을 확인하곤 그가 여기 있음에 대한 당황스러움과 안도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일어나셨습니까, 태......아니 리안님."


이제 더 이상 한 나라의 태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듯 카인은 멋쩍게 호칭을 변경했다. 리안은 여전히 놀란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여전한 보랏빛이 진한, 긴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은 독특한 스타일에 적당히 큰 키와 듬직한 몸매. 어디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결투를 한 이후론 보이지 않아서 걱정했다만.


"네가 왜 여기 있어? 형제들과 어머니는?"


카인은 리안의 질문을 듣자마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침대 바로 옆에 있던 나무로 된 의자에 앉았다.


"다른 태자분들과 황비께선 지하감옥에 갇혀 계십니다. 내일 아침에 공개처형을 한다더군요. 저 또한 같이 처형 될 운명이었습니다만, 마인 황태자가 한 명 쯤은 시중을 들 사람이 필요하다며 살려주었습니다."


"그건 다행이네. 형님들과 어머니의 처형은 피할 길이 없어 보이고.. 마인은 지금 어딨어?"


어릴 적 친구인 만큼 자연스럽게 마인의 이름을 부른 리안은 긴장을 풀고 편하게 침대에 기대어 카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는 지금 망국이 된 웨리아를 가리어드로 통합시키는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아마 몇 분 후면 돌아올겁니다. 아 참-....."


"음?"


"마인 황태자가 리안님이 깨어나시면 상황 정리를 시켜주라고 했습니다. "


리안은 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카인이 한 번 숨을 들이쉬곤 의자를 침대에 좀 더 가까이 하며 입을 열었다.


"전쟁이 끝난 후, 황비께서 마인 황태자의 어머니를 죽인 죄를 황비는 공개처형하고 리안님께 물을 것이라 했습니다. 백성들의 민심에 의해 황비는 처형하지 않으면 안되고, 분풀이 할 곳은 리안님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이 부분에서 카인은 분하다는 듯 주먹을 쥔 손에 힘을 넣었다. 리안이 괜찮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그래서?"


"그래서 그 죗값을 치루기 위해 첫째는 신분을 포로로 하락시키고 자유로운 행동을 금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할 일은 자신의 피로와 스트레스를 풀어줄 것이라 했습니다. 어떠한 방법으로든요."


리안은 살짝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한 마디로 화풀이 대상이라는 건가.



"제가 드릴 수 있는 설명은 이까지입니다. 저도 한동안은 리안님과 만나는 것도,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기에......"


카인은 곤란하다는 듯 고갤 살짝 숙였다. 리안은 괜찮다는 듯 살짝 손을 들었다 내렸다.


"아아. 됐어. 이제 그만 가봐. 너도 푹 쉬어야지."


수갑이 채워져 있는, 마치 감금당한 상황임에도 리안은 태연하게 카인의 안부를 걱정했다. 카인은 그 모습에 안심했다는 듯 살짝 웃고는 가볍게 인사를 한 후 방을 나갔다. 그가 나간 것을 확인하자마자 리안은 참았던 한숨을 내뱉었다.


"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카인이 마인의 말을 최대한 순화시켜서 전했음은 분명하다. 말을 할 때마다 떠듬 떠듬 거리며 곤란해 했으니까. 아마 마인의 성격상으론, 제대로 일을 하지 않는다면 곧장 사지를 찢어버리겠다- 고 했겠지. 아니면 거슬리니까 닥치고 도망갈 생각은 하지 마라, 라고 하거나.


오랜만에 만난 마인의 태도는 예상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제 부모를 죽인 여자의 자식이 좋게 보일 리 만무하다. 이제 그는 화풀이로 자신을 어떻게 할까. 겁이 나는 건 아니었지만 좋게 생각되지도 않았다.


더 이상 생각하면 머리만 아플 것이라 생각한 리안은 방 안을 멍하니 응시하며 뭐라도 흥미거리가 될 만한 것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자신이 미쳐 깨닫지 못한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 방은 마인의 방이었다. 값어치도 매길 수 없을만큼 비싸보이는 가구들을 분명히 봤음에도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 또한 이 실크로 된, 넓은 침대도 마인의 것, 한 나라의 황태자의 것이다. 그런 곳에 전쟁 포로가 누워 있는 것이었다. 상황이 앞 뒤가 맞지 않았다.


밤 바람이 리안의 하얀색, 윤기 나는 머릿결을 훝고 지나갔다. 그 덕에 약간 머리가 맑아짐을 느낀 그는 침대에 제대로 기대 앉았다. 어쨌거나 그가 없는 상황에서 머리를 굴려봤자 얻는 것은 없겠지.


"이게 무슨 엿 같은 상황인지......"


리안은 또 한 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몇 분을 상황 파악을 하려다 포기하고, 멍하니 방을 바라보다가 또 다시 상황 정리를 하는 것을 반복하던 중 또 한 번 문이 열렸다.



"일어났나."


이번에 들어온 것은, 마인이었다. 피 비린내에, 여기저기서 아우성이 섞인 소음으로 혼잡한 전쟁터와는 달리 조용한 방 안에서 그와 단 둘이서 있어서 그런지 마인의 달라진, 좀 더 어른스러워진 모습이 제대로 보였다.

또한 자신을 내려다보는 차갑고 어두운 푸른 시선까지도.


"네 호위무산가 뭔가 하는 녀석에게 들었겠지. 네 놈에게 앞으로의 선택지는 두 가지 밖에 없다."


마인은 천천히 살기를 거두지 않은 채 다가와선 눈 깜박할 새에 허리춤에 찼던 검은색의 검집에서 은빛의 칼날을 가진 검을 리안의 목에 들이밀었다.



"차라리 죽고 싶을 만큼 어둡고 침침한 지하감옥 안에서 사지를 찢기고 치료받길 반복하거나, 그나마 인간같은 대우를 받으며 내 화풀이 대상과 기사단 일을 맡거나."



리안은 검이 제 목 바로 옆에 겨누어져 있던 말던 쳐다도 보지 않았다. 마인은 괜한 동정심을 가질 위인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혼자서 황제를 위협할 정도의 힘을 가진 황태자로 성장한 만큼 감정 절제가 큰 편이었기에 표정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살기를 억누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죽지 않을 만큼 몸을 갈라버릴 듯한, 그런 위압감이 리안을 덮쳤다. 한 마디로 '괴물'을 보고 있는 듯 했다.

태연한 척 해도, 그의 엄청난 살기에 슬쩍 겁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이불을 손으로 붙잡은 채 리안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마인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어차피 저한테 선택권은 후자밖에 없다는 것 알고 있지 않습니까. 꼴리는 대로 하실 거면서 왜 물어보시는 겁니까."


마인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결코 웃겨서 지은 것은 아니었다. 냉담하고도 서늘한 것이었다.


"겁이 없는 건지, 없는 척 하는 건지."


마인은 마치 리안이 살짝 겁을 먹고 있다는 걸 안 것인지 이불을 붙잡고 있는 리안의 손을 흘깃 바라보았다.


"적당히 까부는 건 귀여운 용기 정도로 봐줄 수 있지만, 적당히 하는 게 이로울거다. 지금도 그 여자의 핏줄인 네 녀석을 없애 버리고 싶어 몸이 근질거리니 말이다. 네 필요 가치는 그 여자 대신 내 분노를 받을 인형이다. 거기서 그 가치가 없어진다고 생각되면 가차 없이 죽여버릴거야. 죽이지 않겠다고 한 것도 일종의 변덕이다. 잘 생각하는 게 좋아."


뭐라 더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의 '없애 버리고 싶다, 죽여버릴 것이다.'라는 말은 진심이었기에 리안은 살짝 미간을 구기며 입을 다물었다.



" 앞으로 네 놈은 이곳에서 있을 거다. 그편이 감시하기 수월하겠지. 오늘 밤, 조용히 쥐 죽은듯이 있어라. 쓸데없는 행동은 안 하는 게 좋을거다. 죗값이고 뭐고 정말로 목을 날려 버릴 수도 있으니까."


"이곳, 침실에서..말입니까?"


"왜, 불만있나?"


"그건 아니지만......"


리안은 전혀 침실이라는 점에 무감각해 보이는 마인을 한 번 쳐다보곤 혼자서 별 생각을 다한다며 고갤 살짝 좌우로 흔들었다.


"뭐하고 있지, 알아들었으면 옆으로 비켜라."


리안은 순간 멈칫하다가 곧 그가 침대 위에 올라올 것이란 것을 깨닫곤 자신이 생각해도 우스울 만큼 주춤거리며 침대 가장자리로 몸을 옮겼다. 마인은 위의 겉옷을 같이 들어온 시녀에게 맡기곤 회의 끝난 후 바로 목욕을 하고 온 건지 살짝 젖어 있는 푸른 머릿결을 쓸어넘기며 침대 위로 올라와 누웠다.


포로가 되어 차가운 바닥에서 자는 것을 상상했건만, 갑작스러운 그와의 동침이라니. 당황스러운 상황의 연속이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여 내 잠을 방해했다간 가만두지 않겠다."


마인은 미리 경고한다는 듯 차갑게 말하곤 침실을 밝히고 있던 주황빛의 불빛을 껐다. 시녀가 리안을 흘깃 쳐다본 후, 문을 닫고 나갔다. 그제야 제대로 된 어둠이 찾아왔다. 리안은 갑자기 이것저것 닥친 상황에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쓸고는 억지로 잠을 자보려 안간힘을 썼으나 옆에 제 사지를 언제 잘라버릴지 모르는,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두려움과 반가움의 대상이 있다는 점에서 그건 불필요한 노력이었다.


마인이 눈을 감은 채 잠을 청하고, 한동안 커튼이 바람에 펄럭거리는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정적을 깨고 들려온 마인의 말에 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굳힐 수 밖에 없었다.



"네가 증오스럽다. 그 여자의 혈육이라는 것이. 그러니 내가 널 그나마 살려둔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내 분노를 풀 방법을 생각하는 게 좋을 거다."



리안은 그의 깊은 어둠이 잠재된 목소리에 그가 보이지 않도록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어디서도 내가 다른 이에게 분노를 산다는 것을 변하지 않는다. 그것이 마인이라 해도. '


이 사실은 리안이 달빛을 닮은, 저주받은 은빛 눈을 가지고 태어났을 때 부터 그가 지니고 있던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또 다른 그에 대한 분노를 마주칠 것이란 것을 리안은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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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6-12-23 02:30 | 조회 : 4,208 목록
작가의 말
렌테

댓글 달아주시는 분들, 챙겨 봐주시는 분들 정말 감사함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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