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눈(2)

방 안으로 들어오자 마자 훅 하고 풍겨오는 하늘씨의 체취. 그 체취에 젖어 나른한 한 숨을 쉬다가 너무 늦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옷장을 열었다.

그리고 검은 옷의 파티에 알면서도 놀라 움찔했다.

"역, 역시 하늘씨는 검정 옷만 있구나."

고개를 끄덕이고 하늘씨 관찰일기라고 적혀 있는 수첩을 열어 '검정 옷만 있는 것으로 추정됨.' 을 수정하려는 찰나 보이는 보래색 옷. 새로 산 옷인지 텍도 떼어져 있지 않다.

"훔... 하늘씨 취향이 갑자기 바뀐건가?"

고개를 갸웃하고 '검정옷이 압도적으로 많지만 보라색 옷도 있음.' 이라고 수정했다.

"어? 이옷은..."
'하늘씨가 제일 많이 입는 옷이다.'

남들은 이 검정 옷들이 모두 같아 보이겠지만 나와 하늘씨는 알 수 있는 옷들의 미세한 차이. 이런 옷 들 중에서 하늘씨가 가장 많이, 자주 즐겨 입는 옷이 지금 내 손에 들려 있는 옷이다.

"입... 어볼까?"

쿵쿵쿵쿵 마치 금기를 어기는 처녀처럼 뛰는 심장에 심호흡을 하고 옷을 벗고 하늘씨의 옷을 입었다.

"와... 역시 하늘씨 크다.."

수첩에 하늘씨의 신장을 '187cm'라고 적으놨는데 이렇게 그의 옷을 입어보니 187이라는 숫자가 실감이 나는듯 했다.

그리고 방에 들어왔을때 나를 적신 하늘씨의 체취와는 좀 다른, 마치 하늘씨가 나를 안고있는 듯 포근하게 감싸는 그의 체취는 환상적이었다.

'하늘씨의 옷을 입은 내 모습은 어떨까?'

잔뜩 기대 어린 마음으로 장신 거울 앞에 섰다. 그리고 거울앞에 선 나는 너무나 낫설어 얼굴을 확 붉힐 수 밖에 없었다.

"으으...."

여자들의 원피스 처럼 내려오는 하늘씨의 셔츠. 소매가 너무 길어서 손을 덮고도 남고 단추를 끝까지 채웠음에도 하늘씨의 어깨가 넓어서 인지 어깨에 셔츠가 걸쳐있다.

"난 167인데..."

거울을 봄으로서 극명하게 느껴지는 이 차이는 안그래도 덜컥 거리던 심장을 망가지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뛰게 했다.

"으.... 더 뛰면 과부하로 쓰러질것 같은데... 이런걸 심쿵사라고 하는건가?"

습관적으로 민망한 얼굴을 가리기 위해 손으로 얼굴을 덮었는데 손을 덮은 옷 덕분에 그의 체취가 심장으로 술렁술렁 들어와 맴돌았다.

'아, 이 체취. 하늘씨의 향에 홀려 하늘씨를 사랑하게 됐었지.'

얼굴에서 손을 떼고 거울을 힐끔 봤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았다. 행복에 젖어 얼굴을 붉히고 있는 내 모습이 낫설기 그지 지만, 그렇지만... 그래도.

따뜻하다. 너무 따뜻해.

'몇 번을 속삭여도 부족해. 사랑해요. 사랑해요. 하늘씨 사랑해요.'





"아, 하늘씨가 의심할텐데."

너무 오랫동안 그에게 젖어 있었다. 고개를 붕붕 털어 애써 끈적한 미련을 걷어내고 다시 잠옷을 찾았다. 그런데....

"없어!"
'하늘씨는 잠옷을 따로 두지 않는건가?'

"어....."

그럼.. 이 옷을 입고 그대로 잘 수 있는거? 그런... 거어??!!!

'그래. 은근슬쩍 이 옷을 입고 나가서 잠옷이 없다고 하면서 어쩔 수 없이 이걸 입었다고 하는거야.'

결의를 다지며 문손잡이를 잡으려다가 다시 이제는 좀 멀어진 거울을 힐긋 보고 아까의 모습을 떠올렸다.

'헤헤. 이렇게 하고 있으니까 내가 하늘씨의 애인같.... 으악! 정신차려. 정신 바짝 차리고 하늘씨의 옷을 입고 자는거야!'

"저.. 하늘..! 헙!"

나도 모르게 바짝 올라간 목소리로 그를 부르려다고 급하게 내 입을 틀어막았다.

자고있어!
'하늘씨가.. 자고있어!!!'

나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르 떨고 황급히 가방을 뒤져 카메라를 챙겼다.

'터졌구나. 잭팟이!'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하늘씨에게 다가가 렌즈를 들이밀었다.

"예.... 예쁘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다가 화들짝 놀라고 하늘씨를 살펴봤다.

"자, 자는거겠지?"

다시 촬영을 하기 시작했다.

그를 찍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특히나 이런 잭팟일 경우는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다.

여러 각도로 찍었고 필터도 바꿔서 찍었다. 동영상으로도 찍어서 그를 최대한 이 카메라에 담을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겔러리를 살피다가 혼자 세우기도 했다.

'이건.... 야한 잡지야.'

'내 인생에서 이렇게 야한 잡지는 처음이야....' 라고 중얼거리다가 쇼파로 슬쩍 다가가 올라탔다.

그리고 하늘씨를 다리 사이에 두고 마치 내가 그를 덮치려는 것 같은 각도로 하늘씨를 카메라 화면에 담았다.

이것도 역시 여러 각도로 찍고 필터도 바꾸고 동영상으로 바꿔서 촬영버튼을 눌렀다 그때 갑자기 하늘씨가 몸을 돌려 몸이 천정을 향하게 누웠다.

'야..... 야해! 야하다고!'

흰 조명을 받게 된 몸은 너무나도 야했다. 흐트러진 갈색 머리칼이 검은 쇼파에 흩으져 있고 옆을 보고 있는 얼굴의 턱선은 얇으면서도 선명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스의 목선을 타고 내려와 본 상체는 유려하기 짝이 없었다.

'이 유혹을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이 모습또한 최대한으로 카메라에 담고 쇼파에서 내려왔다. 멍청하게도 유혹을 견뎌내지 못하고 덮치는 남자들은 결국은 그 죽은 스태프와 지금까지 잔인하게 차인 남자들과 같은 꼴을 당할 뿐이다. 미래를 위해서라면 어떤 유혹이라도 견딜 수 있어야 하지 않겠어?

쇼파에 걸쳐있는 검은 코트를 가져와 하늘씨에게 덮어줬다. 그리고 볼에 뽀뽀를 한 후 하늘씨의 옆, 바닥에 누웠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하늘씨. 사랑해요. 당신과 나를 위해 재미있는 계획을 세웠어요. 그리고 진행중이죠.'


당신을 가지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못할까요.








"감독님!"
"응? 뭐지?"
"이.. 이사람 뭐예요?"
"음?"
"이 것 좀 봐요."

눈물바다가 된 회식자리는 결국 금방 끝나버리고 말았다. 집에 돌아가려는 찰나 감독과 여주인공 하 연은 유일하게 술 안먹고 마지막 정리를 한 직원의 창백하게 질린 표정을 본 후 직원이 가지고 온 종이를 봤다.

"응?"
"어?"

그리고 온 몸에 끼치는 소름에 단추구멍만한 눈은 바르르르 떨렸고 하 연은 침을 꼴까닥 삼켰다. 그리고 둘은 동시에 생각했다.

'그 사람이다.'

종이에는 아까의 순진하고 소심해 보이는 남자 배우가 있었다. 하지만 그 배우는 단 한번도 영화에 등장한 적이 없다.

"이 사람...! 여기 보면 배우라고 적혀있는데 제 기억상 이 사람은 단 한번도 출연한 적 없잖아요!! 애초에 이 영화에는 왕세자 역이 없어요! 어쩌면 우리 영화의 중요한 정보가 빼돌려 졌을지도 몰라요! 당장 상영을 시작해야 해요..!"
"괜.. 괜찮아. 정보가 빼돌려 지지는 않았을거야."
"네? 하지만...!"
"이봐. 살고 싶으면 이 일은 잊어."
"네?"

멍하게 있던 하 연이 여직원의 손을 잡고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거예요. 이 일도 이 사람도. 살고싶으면 그렇게 해요. 알겠죠?"
"네...? 네... 네."

어리둥절하게 주춤주춤 사라지는 여직원을 보며 하 연운 중얼거렸다.

"큰 손이 이 사람이었군요."
"응. 하지만... 이 정도로 자연스럽게 녹아들 줄이야. 아무도 몰랐어. 어떡해 이럴 수 있지? 단 한번도 출연하지 않는 남자 배우를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어."
"이런 능력이 있기에 그 업계에서 최고인 거겠죠."
"그러겠지.."

당연히 모든 스태프들은 영화의 스토리를 알고 있고 그러기에 왕세자역은 조연이라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소품담당들은 당연하게 왕세자 소품을 준비했고 메이크업 담당은 왕세자에 걸맞는 화장을 해 주었으며 코디는 왕세자옷을 그에게 잘 맞게 리폼을 하고 입혔다. 그리고 그는 자연스럽게 촬영장을 활보했다. 그럴때면 사람들은 그에게 '왕세자 역을 맡은 사람이네.' 하고 자연스럽게 자기 할 일을 했다.

심지어 감독 마저도.






"아. 여기서 잠들었네."

멍한 정신으로 부스스스 일어나 자연스럽게 바닥에 발을 디디려는데 무언가 있는것 같아서 밑을 내려다 보니 익숙한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왕세자 역을 맡은 사람이었지. 이 사람이 왜? 아, 내가 데려왔었지 참."
'근데 내가 이 사람을 왜 데려왔었지? 아... 귀찮다. 데려오고 싶어서 데려왔겠지.'

몸에 덮여 있던 코트를 들어 내 셔츠를 입고 있는 그에게 덮어줬다.

"근데 춥지도 않나.... 맨 다리로 바닥에서 자고 있네."

한 번 기지개를 쭉 펴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장 화장실로 들어가 샤워기 물을 틀었다.




"헤. 하늘씨가 나한테 코트 덮어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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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6-11-15 16:23 | 조회 : 3,862 목록
작가의 말
뚠뚜니

서브남주 등장입니다요./ 다음 편은 Q&A로 찾아 뵙겠습니다./중간에 글 쓰던게 날아갔어요....! 으아아아앙 폭스툰은 웹소설 지원을 안해주는것 같네요. 환경이 열악해...! 그래도 열심히 쓸게용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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