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투쟁과 평화 (7)

"공녀님."

키르토와 헤어지고 무작정 공녀의 저택에 도착했다.

나도 내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공녀님... 제발, 문 좀 열어주세요..."

*

"니콜라이? 무슨 일이지?"
"공녀님 보고 싶어서 왔죠."
"으, 어울리지 않게 존댓말은..."
"뭘, 음... 들어가도 돼?"
"어, 들어와."

오늘도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 넌 정말 나한테 아무 것도 아니었던 거야? 정말 난 그냥 심심풀이용이였다고?

"무슨 일 있어서 온 거야?"
"음~ 아니! 그냥 너 보고 싶어서."
"...별 목적 아니네."
"응, 예전에도 이런 식으로 많이 왔잖아."
"..."

그땐 반겨줬는데.

"그렇지."

지금은 떨떠름 해 보인다.

"...미안한데, 잠시 담배 한 개비만 펴도 되냐?"
"응, 펴."
"...너도 한 개비 할래?"
"아니, 생각 없네."

공녀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 끝에서 일어나는 아지랑이가 위태로운 내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공녀는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말했다.

"뭐 할 말 있는 거 아니야?"
"...공녀님."
"왜 또 존댓말이야. 어색하다니까?"
"...공녀님."
"...말해 봐."

손 끝이 벌벌 떨렸다. 말해도 될까? 말해선 안되는 거 아닐까?

"공녀님께 전... 뭡니까?"
"..."

공녀가 나를 만날 때도 다른 남자를 만났다는 걸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분명 난 그녀에게 1순위 아니었는가... 하지만 지금은 카틀로우 공작, 바그너 남작까지. 그 자식들은 공녀님의 1순위 자리를 꿰차기 시작했다. 공녀를 보는 횟수도 현저히 줄었다. 공녀를 보러 오면 이미 둘 중 하나가 공녀와 함께 있었다. 분했다.

분명... 한 때는 결혼을 약속했던 사이 아니었는가. 그런 사이가 이리 빨리 끊어진단 말인가? 정말 지독히도 부질 없다. 분명 결혼을 약속했고, 세상에 누구보다 공녀가 가장 소중했고... 공녀는 나의 첫 번째 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일 것이라 생각했다.

...

날 이렇게 만든 건 도대체 누구던가? 날 이렇게 하찮고, 부질 없게 만든 게 도대체 누구던가? 카틀로우 공작? 바그너 남작? 아니다... 날 이렇게 만든 건, 내 바로 앞에 있지 않은가? 프뢸리히 공녀. 공녀다.

공녀는 날 사랑했소? 아니, 적어도 날 다른 이와 다르다고 생각 해본 적이라도 있소?

"궁금한가?"
"...네."

공녀는 담배 연기를 들이마시더니 내게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후 하고 연기를 내 입 속으로 내뱉었다.

"윽, 콜록, 콜록... 아, 아윽..."

속이 메스껍다. 속이 무지하게 사납다. 숨 마저 쉬기 어렵다.

내가 괴로워하며 의자에서 넘어져 바닥에 무릎을 꿇고 목을 붙잡고 있자 공녀는 내게 말했다.

"음, 이제 좀 알겠나? 니콜라이, 넌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야. 원하면 이딴 식으로라도 널 이렇게 만들 수 있어. 네 꼴이 어떻지? 지금 봐봐. 얼마나 추한가..."
"..."

아, 그렇구나. 내가 정말 생각이 짧았어.

공녀가 날 사랑했냐고? 아니, 전혀. 공녀에게 난 그저 다른 이들처럼 가지고 놀기 좋은 장난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예상은 했다만 이 말을 공녀에게 직접 들어야 한다니...

"공녀님."
"응, 그래. 말해보렴."
"정말입니까?"
"뭐가."
"당신이 절 한 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요."
"응, 단 한 번도 사랑한 적 없단다."

아...

"진심입니까?"
"응, 입 아프게 더 말하게 하지 마렴."

...이렇다면 내 선택에 후회는 없겠지.

허리춤에 숨겨 두었던 단검을 집어 들었다.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공녀는 마지막까지 날 처참하게 만드는구나.

공녀의 아랫배에 칼을 꽂아 넣었다.

"아, 아윽..."
"공녀님, 죄송합니다."

눈물이 흘렀다. 그런데... 입꼬리는 올라가는 게 아닌가.

공녀님, 마지막까지 사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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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3-06-26 19:56 | 조회 : 239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