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뜨니 전라였고 옆에는 누구세요?_1

동물과 꽃을 사랑하는 맘씨 고운 23세 복학생 권민구. 그가 거리를 거닐 때마다 모세의 기적을 일으킨다. 그의 별명은 권모세.

맘씨가 아주 어여쁜 권민구가 왜 권모세라는 별명으로 불리느냐. 깔끔한 성격의 그는 운동할 때를 제외하고는 늘 흰 셔츠와 검은색 슬랙스, 검은 구두를 대학교 교복처럼 입고 다녔다. 평범한 패션이다. 하지만 그가 이 착장일 땐 ‘당장 어느 가게에 쳐들어가 받지 못한 월세를 받으러 온 옛날 깡패’를 떠오르게 했다. 이 옷이 제일 단정하다 생각해 지금까지 고수해온 패션이었다. 하지만 그의 의도와는 다르게 오히려 그의 험악한 아우라를 레벨업시켜버렸다. 하지만 이 사실을 권민구는 몰랐다.

운동이 취미인 그의 근육은 아주 불끈불끈했다. 인간 바위 그 자체. 그 불끈불끈 한 근육과 큰 키. 그의 덩치만 봐도 보통 사람들이 봤을 때 위압감을 주기엔 충분했다. 이 정도만 되었어도 슬픈 ‘권모세’라는 별명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권민구는 앞은 강이고 뒤는 산, 배산임수 지역의 시골에 태어났다. 어릴 때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산골에 살았던 권민구는 당찬 사내아이답게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황사가 날리나 푹푹 찌는 무더위에도 밖으로 뛰어나가 놀았다. 덕분에 유전자의 힘으로 타고난 까무잡잡, 그의 피부는 더욱더 까매졌다. 어릴 땐 그저 까만 피부의 삐죽하게 생긴 귀여운 사내아이였다. 그러나 사춘기를 겪으며 폭발적인 테스토스테론 덕분에 그는 현재의 권모세가 되었다. 그의 ‘살인’미소도 한몫했다. 이것도 모자라 권모세 레벨업에 더욱 도움을 준 것은 그의 오른쪽 눈에 있는 찢어진 흉터.

어른이 되고 나서 그냥 웃었을 뿐인데, 사람들이 놀라고 무서워하니 그의 성격은 자연스럽게 소심해질 수 밖에 없었다. 겉은 태백산 호랑이지만 속 알맹이는 저기 남산에 있는 다람쥐 식구의 장남 다람쥐인 권민구에겐 유일한 친구가 한 명 있는데, 그의 이름은 박재훈. 권민규의 유일한 친구이며 현재 유일한 말동무이다. 권모 세라는 별명을 만들어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야. 너 어떻게 이럴 수 있어.”

권민구는 복학하고 난 뒤, 개강총회에 갔다. 평소 그의 소심한 성격으로는 절대로! 혼자 사람들이 많고 모르는 사람들 천지인 개총엔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혼자 밖에 잠깐 나와서 골목 구석에 가서 재훈에게 전화로 불만을 털어놓았다.

“야..진짜 미안….!”
“네가 와라 그래서 나왔잖아…이..이! 나쁜 놈!”
권민구는 욕을 쓰지 않는다.

그는 박재훈의 제의로 개강총회에 왔다. 큰 사건 이후, 한동안 우울감에 빠져서 집에만 박힌 채 좋아하는 스펀지밥을 보며 눈물을 삼키던 권민구. 그의 친우였던 재훈은, 그 좋아하던 운동도 마다하고 집에 박혀있는 권민구가 짠했다.
“맨날 스펀지밥만 쳐보지 말고 좀 밖에도 돌아다니고 그래라. 한 번 차인 거 가지고 무슨 궁상을 이렇게 심하게 떨어. 세상 무너졌냐?”
권민구는 인간관계가 남들보다 훨씬 좁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인간관계라 할 만한 게 그냥 없다. 그런 권민구에겐 특별하게 여자친구가 있었다. 중학교 2년, 고등학교 3년 그리고 군대에 오기 전 1년 무려 총 6년의 세월을 함께했었다. 그녀의 이름은 최민희. 민구가 대학교에서 재훈을 만나기 전까지 유일한 권민구의 친구였으며 현재 전 여자친구이다. 그 둘은 영혼의 단짝이었다. 그리고 권민구의 태양 같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그 둘을 2년 동안 갈라놓았다.
권민구가 군대 훈련소에 들어가는 날 둘은 서로 부둥켜 안고 매우 슬프게 울었다. 민구는 민희에게 말했다.
“제대하면 제일 예쁜 꽃신 사 들고 만나러 갈게..!”
그 둘은 훈련소 앞에서 부둥켜 안고 세상 무너진 것처럼 계속 울었다. 민구는 민희에게 약속했던 말을 잊지 않고 늘 가슴에 새겼다. 그래서 제대한 날, 민구는 군대에 들어오기 전에 모았던 돈과 군대에서 조금씩 모았던 돈을 가지고 처음으로 명품구두를 사서 최민희를 만났다. 다시 만났던 최민희는 여전히 예뻤다. 민희는 살벌한 외형의 민구와는 전혀 반대의 사람이었다. 키는 민구보다 훨씬 더 작아서 그녀의 정수리는 그의 어깨보다 좀 더 아래에 있었다. 작고 귀엽지만, 어딘가 모르게 청초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자였다. 성격도 민구보단 좀 더 외향적이었다. 그래서 민구보단 인간관계가 넓은 편이었다. 하지만 대학교에 들어오기 전까지 그 둘은 언제나 둘만의 세계 안에 빠져 있었다.
재훈이 민구와 친해진 것은 민희의 덕이었는데, 민희는 대학교에 오고 나서는 사람들을 조금씩 만나기 시작했고 그 사람 중 한 명이 재훈이었다. 민구가 다른 친구도 만들면 좋을 것 같아 소개해줬던 것이다.
근데 그런 그녀가 고무신 거꾸로 신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 일은 민구에게 인생을 돌아볼 만큼 아주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미안해. 민구야. 헤어지자.”
민구는 큰 충격에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녀를 잡지도 못했다. 열심히 손수 포장했던 애꿎은 선물상자만 구겼다. 그리고 현재 그 선물은 처량하게도 아직 버리지 못하고 민구의 자취방에 나뒹굴고 있다. 민구는 울지 않았다. 현실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민구는 한동안 자취방에서 틀어박혔다. 진짜 필요할 때가 아니면 얼굴에 먼지가 쌓일 정도로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가 바로 복학할 수 있었던 것은 재훈의 덕이었다. 재훈의 피나는 말과 피나는 사랑의 손길로 결국 지금의 민구는 좀 나아질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최민희는 현재 3학년이고 그는 이제 2학년이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얼굴을 마주할 일이 적었다.

“미안하다..! 갑자기 알바사장님이 도와달라고 하도 사정을 하니까…”
“됐어..”
그래서 민구는 재훈 없이 혼자 개강총회에 앉아있던 것이다. 그가 앉아있던 테이블에는 민구 포함해서 총 4명의 사람이 앉아있다. 다른 테이블은 다 떠들썩했지만 유독 민구의 테이블만 조용했다. 2명은 새내기였고 한 명은 민구보다 어린 남자였다. 민구는 아주 죽을 맛이었다.
다들 술이 점점 들어가니 민구를 제외한 나머지 3명은 어색한 분위기가 조금 풀어졌다. 그 사이에 끼지 못한 건 만 구뿐이었다.
개강총회는 대학로 앞에 있는 달빛주막이라는 술집에서 열렸다. 9시부터 시작했던 총회는 12가 다되어가자 점점 분위기가 무르익어서, 다들 자리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놀았다. 처음 앉았던 자리를 계속 지키고 있던 사람은 민구뿐이었다.
민구는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나마 놀 수 있는 시간이 많던 새내기 때도 술을 싫어하는 민희의 영향으로 민구는 최대 한잔이었다.
민구는 이날 처음으로 한잔 이상 마셨다.
‘윽, 사람들은 이걸 왜 이렇게 좋아하는 거야…?’
술이 달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제일 이해하지 못하는 민구였다. 이상한 화학적인 알코올 맛이라고 민구는 생각했다. 하지만 민구는 오늘 그 화학적 알코올을 거의 목구멍 속으로 들이부었다. 술이 점점 들어갈수록 목구멍이 뜨거워지고 머리의 혈관이 위험하게 쿵쿵 울렸다.
민구는 까만 얼굴이 까만 토마토가 될 때까지 계속 혼자 술을 들이켰다. 머리가 어릴 때 팽글팽글 돌렸던 팽이처럼 돌아갈 때까지…
‘…….이제 가자.’
민구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지금 가세요?”
2학년 과대 남자애가 그에게 물었다. 민구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만 구를 딱히 붙잡진 않았다. 인원 체크 때문에 그냥 형식적으로 물은 것이었다.
“저 사람 이번에 들어온 복학생이지?”
과대 남자애 옆에 있던 남자애가 말했다.
“응,”
과대 남자애는 누가 봐도 사람이 좋아 보였다. 엄청나게 잘생긴 것은 아니었지만 20대 새내기들의 마음이 설레기엔 아주 훈훈한 얼굴이었다. 훈훈하고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 남자의 이름은 도재희 2학년 과대였다.
“헐, 그럼 저 사람이 권민수야? 그 민희 선배 전 남자 친구.”
“응, 맞을 거야.”
“헐, 민희 선배가 왜 저런 사람이랑 만난 거래? 누가 봐도….”
“그런 소리 하지 마. 안쓰럽잖아.”
“안쓰럽긴 뭐가. 딱 봐도 민희선배랑 어땠을지 각 나오네. 왜 헤어졌는지 알겠다.”
도재희은 자신의 친구를 나무랐다. 그리고 얼른 다른 주제로 이야기를 바꿨다.

빙글빙글 천방지축 돌아가는 지구에서 민구는 혼자만 남은 쓸쓸함을 느꼈다. 다른 사람들은 술에 취하면 텐션이 높아진다던데, 왜 민구는 점점 지구의 핵에 가까워질 만큼 내려가는 것일까. 어디까지 걸었는지, 빛이 반짝이던 대학로와 사람들이 점점 사라지고 외진 곳이 나왔다. 마시지도 않던 술을 마셨더니 속도 울렁거렸다. 땅이 울렁이는 건지 자기가 울렁이는 건지 잘 알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 민구는 하필 바닥에 살짝 튀어나온 보도블록에 걸려서 엎어졌다. 조용한 거리에 민구가 처량하게 엎어진 소리만 울렸다.
그가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멍하니 보도블록 바닥과 입맞춤하고 있을 때,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뭔 소리야?”
고개를 아주 살짝 들어보니 그가 누워있는 지점에서 바로 한 3미터 정도 되는 거리에, 유일하게 아직 문을 닫지 않은 가게에서 한 남자가 나왔다. 그 가게는 유일하게 어둡고 인적 드문 거리를 빛냈다. 고개만 살짝 들었기 때문에 민구는 그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리고 곧장 기절했다. 그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지만 민구는 멀어져 가는 정신을 잡을 힘이 없었다.
.
.
.
.
.
“으으…”
목이 쩍쩍 갈라지는 소리를 내며 민구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악.”
일어나자마자 민구는 다시 푹신한 침대에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허리가 날이 새도록 짓눌린 것 마냥 아팠다. 처음 느껴보는 통증이었다. 민구는 누워있는 침대와 천장이 처음 보는 것이라는 걸 깨닫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엄습하는 불안함에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누군가 옆에서 색색 숨소리를 내었다. 이 숨소리가 이렇게 두려울 수 있다는 것을 민구는 처음 깨달았다. 그의 손에 식은땀이 삐죽삐죽 흘렀다. 부드러운 이불의 감촉이 아주 잘 느껴지는 것을 보니 자신은 지금 빤스만 입은 채 전라였다. 그리고 이곳은 남의 집이었다. 눈알 굴리는 소리도 조심스러워 아주 천천히 민구는 자신의 옆에서 자고 있을 사람을 확인했다.
“우리 구, 일어났어?”
하지만 그 사람은 자고 있지 않았고 민구의 얼굴을 빤히 보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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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1-01-08 18:12 | 조회 : 1,477 목록
작가의 말
최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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