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편] 외면의 외전

"그래, 그랬던거야....."

소녀는 다리에 차고 있던 단검을 빼어 들었다. 그리곤 죽을 생각으로, 그 날붙이를 목 앞까지 올려들었다. 며칠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죽길 바랐을 남자가 지금은 간절히 소리치는 꼴을 보니 꽤 우스웠다. 그 우스운 얼굴을 보지 못하는 처지를 꽤나 아쉬워할 정도로.

죽는 것이 괜찮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최악의 순간에 마지막 수단이 되어주는 것 뿐, 사실은 모두 살고 싶어한다. 지금의 소녀 또한 그렇다. 죽을 만큼 죽기 싫다. 하지만, 죽지 않으면 안된다. 지금 포기하면 다시는 닿을 수 없으니까.

듣고 싶다, 닿고 싶다, 맡고 싶다, 그리고 보고 싶다. 한번도 본 적 없는 너의 모습을 이 눈에 담고 싶다. 네가 구하러 와주었으면 한다. 궁지에 몰린 나를, 너를 사랑하는 나를. 이만큼의 사랑을 받고도, 이기적이라는 말을 듣더라도, 내 안이 너의 사랑으로만 넘쳐날 때까지 그 마음을 받고 싶다.


아아, 들리기 시작한다.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잡으려하는 가여운 사람들의 소리가. 무능하고, 탐욕적인 왕은 타인을 사랑할 줄 모른다. 그의 사랑는 언제나 권력이니까. 불쌍해라, 소녀는 진정한 사랑을 깨닫자 살아가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가, 안쓰러워졌다.

"고마워, 아스터. 날 사랑해 주어서."

[콰득]

검은 잔디가 피에 물들었다. 고통이 찾아온다. 목을 통과한 검의 감각이 잔인하게 느껴져온다. 다만, 그것은 소녀의 슬픔을 이기지 못했다.

죽은 눈에서, 후회의 눈물이 고여 흐른다. 황금을 닮아 눈부신 머리칼이 생기를 잃고 스러져간다. 호수를 담아 끝을 모르고 푸른 눈동자가 시들어간다.

'나의 시체만이라도 찾아주길'

그것이 소녀의 마지막 소망이었다.

*

"아....안됩니다 공주님.....당신은...당신만은 절 떠나면 안된단 말입니다......"

"아, 안돼! 절호의 기회가! 연합국에 들어갈 마지막 찬스였거늘.....이렇게 허무하게..."

슬퍼한다면 슬퍼했다. 한쪽은 자신의 무력함을 슬퍼했고, 한쪽은 날아간 권력을 슬퍼했다.

"죽지 마십시오...제니트 공주님...제가..제가 잘못했습니다...부디 어리석었던 절 탓하시고...당신만은..."

기사에게 더이상 죽음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검은 숲에 들어와, 소녀를 안아서 필요없는 생사확인을 시도했다. 당연하게도 소녀는 이미 숨을 거뒀지만 기사가 그 현실을 쉽게 받아드릴 수 있을리가 없었다.

["당신은 나라를 구한 영웅이잖아요, 윈스톤?"]

"아니에요....아니란 말입니다...저 따위는...영웅이..."

["당신은 애써주었는걸요...그러니까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나의...기사님"]

  "당신의 따님만은....반드시..구해보이겠다고...맹세했는데....."

["당신은 상냥한 사람이니까요, 윈스톤"]

기사가 무릎을 꿇으며 쓰러졌다. 그의 눈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응시하며 눈물을 흘렸다. 마력의 숲이든, 죽음이든 상관없었다. 그저 자신이 죽을태니 소녀의 목숨만은 돌려달라고 신께 사정할 뿐이였다. 하그니스를 살피는 물의 신에게, 혹은 감히 불러선 안될 타국의 신에게 은혜를 간청했다. 하지만 신은 한낮 작은 인간의 염원을 들어줄 정도로 한가하지 않았다. 기사는 이 순간 마지막 삶의 이유를 잃었다.

"아아, 제가 염치없이 살아있어선 안되죠....제발..지옥에 떨어지길....그곳에선....영원히 당신들을...만나지 않길...."

  소녀가 떨어뜨린 단검을 집어들었다. 기사는 자신이 모두를 죽였다며 자신이 죽는 순간 까지도 자책했다. 아마 그 검을 기사가 선물해 주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일까.
소녀와 같은 고통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한 건지, 그도 그 날붙이를 목 앞까지 올려들었다.

"당신을 사랑해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제니트 아가씨....그리고.."

  그 말엔 무슨 의미가 담겨 있을까.

"정말 사랑합니다, 아리엘"

검은 잔디가 붉게 물들었다. 기사는 소녀를 바라보며 서서히 눈을 감았다.

왕은 그들을 저주하며 그의 병사들을 데리고 걸음을 돌렸다. 병사들은 공주를 잡아오지 못한 벌을 받을 생각에 벌벌 떨며 그의 뒤를 쫓아갔다.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난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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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1-02-04 14:33 | 조회 : 83 목록
작가의 말
시작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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