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시작(始作)

「보다 순조로운 이해를 위하여 세계관 설정을 참고 후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혹은 읽으시면서 이해가 보충 설명이 필요한 것은 세계관 설정을 참고하셔서 봐주세요.」

부정한 기운이 넘실대는 어두운 지하에는 바닥을 쓸어가는 작은 소리만 낮게 울렸다.
도착하자 우뚝 멈추어 선 나타가 입을 쩍 벌리며 리자를 뱉어냈다.
리자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듯 축 늘어져 흙에 제 얼굴을 더럽혔다.
나타가 제 크고 긴 몸을 말아 마치 빙긋 웃는 듯한 얼굴로 리자를 바라보았다.

탁- 타다닥-

아무런 소리도 없던 곳에 작은 두 발소리가 들려왔다.
거친 숨을 내쉬며 뛰어오는 이들을 나타가 지그시 바라보았다.

“ 헉..허억... !!! 나타님..! ”

급하게 뛰어오던 롭이 우뚝 멈추어 서며 바닥에 무릎을 꿇어 고개를 조아렸다.
로위스도 사색이 되어 따라 조아렸고 나타는 혀를 낼름거리며 눈을 굴려 롭의 상태를 훑었다.
녹아내린 팔은 재생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눈을 살짝 옮기자 아직 다 완성되지도 않은 불완전한 타부 한 명이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 나, 나타님.. 죄송합니다. 처리하지 못했습니다. ”

롭이 몸을 벌벌 떨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제 죄를 고했다.
모든 것은 차질없이, 모든 것은 제 뜻대로 흐르는 것을 좋아하는 그였다.
정체를 들킨 것도 모자라 죽이지도 못하고 돌아온 실추는 자신들의 목숨으로도 갚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필시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은 일이었다.

“ .. 누구한테 그리 당했지? ”

“ ...아, 알리카 아르테 후작입니다. ”

“ 그럼, 신들라는? ”

“ ...? ”

롭이 지금의 제 상황을 잊고 눈을 깜빡이며 의아함에 머뭇거리자 나타가 그를 질책하듯 눈을 가늘게 떴다. 롭의 눈동자가 흔들리기도 잠시 나타의 말을 들은 롭은 경악스러움에 굳어버렸다.

“ 신들라가 죽었다. ”

“ ... ”

“ ..부서진 몸이 재생하질 못하더군. ”

“ 그, ..그런.. ”

“ 신들라는 적어도 90여 번은 살 수 있었다. 최근에는 더 많이 섭취했을 테니 더하면 더 했겠지.. 그런 애를 그 정도로 몰아붙인 아이가 누구지? ”

“ ...시, 신들라는 분명.. 남은 목격자를 처리하러.. ”

“ 남은 목격자라면? ”

“ ...아빌 보스켓 백작입니다. 그.. 마뱃잎으로 시도하던 사내 말입니다.. ”

롭이 아빌을 떠올리니 다시 화가 돋아 이를 갈며 말하자 곧 나타가 누군지 기억난 듯 말했다.

“ 아, 분명.. 누마였던.. 한 번 만난 적도 있었지? ”

“ 예... ”

“ 하.. 하하 하하하! ”

갑자기 웃음을 터트린 나타가 한참을 몸을 들썩이며 웃었다.
롭과 로위스가 멍하니 그를 바라보자 나타는 곧 웃음을 거두어들이며 세로로 찢어진 동공을 번뜩였다.

“ 설마하니 그 누마가 한 일은 아니겠지? 유능한 기사라도 둔 것인가? ”

“ ..조, 조사한 바로는 그런 자는 없었... ”

쾅-!

“ 꺼억...헉....”

“ 그럼, 네 말은 정말 그 녀석이 신이라도 된다.. 이 말인가? ”

나타가 롭을 몸으로 말아 조이며 그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롭이 나타의 눈과 마주치자 파르르 몸을 떨며 사라지는 숨을 급히 들이쉬었다.
조여오는 숨통에 몸을 본능적으로 비틀어도 꽉 쥔 나타는 굳건했다.

“ 용서..! 끄윽..헉.. 용서를.. ”

롭의 눈이 뒤집어 넘어가자 그제야 나타의 힘이 풀어졌다.
롭은 갑작스럽게 들어온 산소에 헛 구역질을 하면서도 나타에게 머리를 박으며 사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 허억..헉...나, 타님.. 욱..하아..정말 죄송합니다. 제발.. 제발 저를 버리지는 말아주십시오.. ”

자신의 신에게 버림받는다.
그것은 한낱 나약한 자신들이 버틸 수 있을 무게가 아니었다.
너무 무겁다 못하여 짓눌릴 그 무게는 결코 가까이해서는 안 될 것이었다.
죽는다고 한들 버림은 받지 말아야 했다.

“ ..죽음도 달게 받을 테니.. 제발 버리지만은!.. ”

공포에 질려 허우적거리는 그의 얼굴을 감싼 다정한 손길에 롭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온 나타가 롭을 향해 부드러이 미소 짓고 있었다.
롭이 멍하니 얼굴을 붉히다 자신을 일으켜 주는 나타의 손길에 겨우 정신을 차리며 일어났다.

“ 내가 너를 왜 버리겠어 롭. ”

“ 나타님.. ”

“ 분명 너라면 최선을 다해 힘냈을 테지.. 넌 언제나 날 위하니까. ”

다정히 속삭이며 나타가 롭의 팔을 어루만졌다.
차마 고쳐지지 않던 롭의 팔이 나타의 손길에 금방 다시 모습을 되찾았다.
나타가 롭의 찢어진 입술을 엄지로 길게 눌렀다 떼며 야살스럽게 눈웃음 지었다.

“ 이렇게 아끼는 널.. 내가 어떻게 버려. ”

“ ..나, 나타님..! ”

한껏 감동 받은 롭의 눈동자가 크게 반짝였고 얼굴은 이미 홍당무가 되어 있었다.
나타가 롭의 두 어깨를 잡아 고개를 숙이자 롭은 긴장한 듯 두 눈을 꽉 감았다.
롭의 바람과는 달리 나타의 얼굴이 제 입술이 아닌 얼굴 바로 옆에서 멈추었다.
약간의 아쉬움도 잠시 귀를 파고드는 목소리에 롭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켜 목울대를 움직였다. 그 소리가 혹시라도 들렸을까 긴장하며 숨을 들이키자 낮게 울리는 그의 웃음소리가 또 귀를 간질였다.

“ 날 위하는 넌.. 이번에는 완벽하게 해내겠지. 그렇지? ”

“ 네, 네! ”

“ ..좋아. 알리카 아르테 후작. 그 자를 다음번에는 반드시 죽여. 만일 또다시 실패한다면...그때는 조금 네 충성을 의심할 것 같은데.. ”

“ 반, 반드시!... 반드시 죽이겠습니다. 믿어주세요! ”
롭의 다급한 말을 들은 나타는 매끄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들었다.

“ 그래, 기대하마. ”

“ 네!.. ”

나타는 황홀한 표정을 한 롭을 뒤로하고 로위스의 옆에 있는 불완전한 타부에게로 향했다.
마뱃잎으로 시도한 ‘두 번째’ 누마.
나타는 머릿속으로 아빌을 떠올렸다.
겁에 질리면서도 자신은 신이 될지 모른다는 희망을 내보였던 오만하고 멍청한 누마.
그런 자는 거두어들이기보다는 천천히 좌절시켜가며 죽이는 것이 제 마음이었지만 조건에 맞는 자를 찾기는 어려워 그냥 참아야 했다.
그날 얼마나 몸이 근지러워 몇 명을 먹었던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 ..나타님? ”

로위스의 의아한 목소리가 들리고 나타는 발을 들어 여자의 머리에 올렸다.
그리고는 아주 짧은 파열음과 함께 여자의 머리는 뭉개졌다.
팔, 다리를 격하게 흔드는 여자의 모습은 기괴하게 짝이 없었다.
마치 벌레와도 같은 모습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 이건 마뱃이 될 수 없다. ”

“ ... ”

“ 이런 하찮은 건.. 마뱃이 될 수 없지.. 내가 만나러 가지. ”

“ ..누굴.. ”

로위스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나타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몸을 굳힌 로위스를 향해 나타는 느리고 짙게 미소 지었다.

“ ‘첫 번째’ 마뱃에게 ”

***

알리카는 아빌을 품에 안은 채로 울음을 흘리는 그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이대로 묻어버리기를 몇 번이고 고민했고 그를 상처 입힐까 걱정도 계속했지만 끝내 물었고 그는 대답해주었다.
자신의 죄를 누군가에게 알릴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될까.
더구나 이렇게 눈물을 쏟을 정도로 무서웠을 그가 끝내 제게는 사실을 고해주었다는 것이 고맙고 동시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 ..알리카. ”

물기 섞인 그 목소리에 알리카가 놀라 상체를 들어 올리자 어느새 눈물을 멈춘 듯
눈가만 붉게 물들인 아빌이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었다.
새빨개진 눈가가 아플 것 같아 알리카는 저도 모르게 손을 움직여 그의 눈가를 살살 눌렀다.
마력을 흘려 넣어주자 빨갛던 눈가가 점점 원래의 색을 되찾았다.
숨을 삼키는 소리에 알리카는 그제야 아빌의 얼굴을 보았고 아빌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연신 깜빡거렸다.
빨개진 귀와 꽉 다문 입술에 알리카도 덩달아 얼굴을 옅게 붉혔다.

‘ 뭔.. ’

아빌이 급하게 떨어진 알리카를 흘깃 보다가 목 뒷덜미를 매만지며 헛기침을 했다.
알리카도 제 머리를 짚으며 열을 식히기 바빴다.
기하급수적으로 변하는 공기에 겨우 적응할 때쯤 알리카가 입을 떼었다.

“ 다시 꺼내서 미안하지만.. 그래도 알려주긴 해야 할 테니까. ”

“ ... ”

“ ..전멸할 뻔했다는 거 거짓말 아니야. 피해는 우리가 훨씬 크게 입었고 겨우 살았어. ”

자신의 말에 미간을 좁힌 아빌에 알리카는 픽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지금 생각하면 더 아찔한 순간이었다.
만일 그날 죽었다면 자신은 저 아빌을 볼 수 없었을 것이고 아빌을 만질 수도 없었을 것이다.

“ 죽기 직전 마지막 오기로 찔러오는 팔을 붙잡았고.. 녹았지. ”

“ 녹아? ”

손을 펴 아빌에게 보여준 알리카가 나직이 덧붙였다.

“ ...네가 말했던 ‘녹아 버릴 것 같다’가 실제로 일어났지. ”

“ ...설마 피가 닿은 건가..? ”

“ 그래, 붙잡은 손에서 피가 났고 그 피가 닿자 팔이 녹아내렸어. 어째선지 내 피에 두 타부 모두 겁에 질려 도망갔고 겨우 살 수 있었어. ”

“ ... ”

“ 그 타부들과 네게 공통점이라고는.. 금기를 범했다는 것 정도겠지. ”

알리카는 제 손을 내려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제 피에 무엇이 있길래 그들이 모두 겁에 질리고 실제로 녹아내리기까지 하는 것일까.
저도 모르게 알리카는 제 심장 부근을 움켜쥐었다.
이 심장에 무게와 관련이 있는 것인지, 그 사람과 연관이 있는 것인지 알리카는 알 수 없었다.

“ 그럼, 네 피가 금기를 범한 모든 것에 통하는 건가? ”

“ 그건 나도 잘 모르겠더군. 지금까지 그리 다쳐본 적이 없었으니 확인한 것도 최근이니까. 어쨌건 내 피가 그 단체에 영향을 끼치는 건 확실한 사실이야. ”

“ .. 단체라고.. ”

아빌은 리자를 데려간 신들라라는 존재에 다시 이를 갈았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구하고 싶으나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고 언제 자신을 다시 찾아올지 그때까지 리자가 살아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아빌에게 리자는 살리고 싶은 존재가 아닌 살려야만 하는 존재였다.
꽉 쥔 주먹이 강한 힘에 잘게 떨려왔다.

“ 아빌 ”

자신을 부르는 알리카의 부름에 아빌이 고개를 들어 그를 보자 알리카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곧은 눈동자가 흔들리는 자신을 지탱하듯 단단했다.

“ 나와 내 티어들은 그들의 존재를 알아차렸고 너는 그 단체와 연이 있지. 그들은 반드시 또 올 거다. 내 힘만으로는.. 내 티어들로만으로는 그들을 끝낼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실하지 않아. ”

“ ... ”

“ ...아빌. 네가 흑 사자가 맞지?”

“ ... ”

“ 가능하다면 그저 널 보호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역부족이라는 걸 이번에 알았어. 그렇다면.. 적어도 내가 널 보이는 곳에서 지킬 수 있도록, 그리고 그들을 끝낼 수 있도록.. 힘을 빌려줄 수 없을까. ”

아빌은 가만히 알리카의 말을 듣다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눈을 감은 그를 알리카는 가만히 기다렸고 곧 아빌의 입술이 벌어졌다.

“ ..리자를 데려갔어. ”

천천히 띠어진 아빌의 금안은 더는 흔들리지도 두려움에 묻혀 있지도 않았다.

“ 더는 또 곁을 잃고 싶지는 않아. 반드시 되찾고.. 이번에는 지켜낼 테니까. ”

“ ... ”

“ 보호는 필요 없어. 다만.. ”

알리카를 가만히 보던 아빌의 얼굴 위로 옅은 미소가 퍼져 들었다.

“ 넌 필요할 것 같아. ”

몇 번이고 자신을 붙잡고 무너져도 기어코 다시 세워주는 그가 아빌에게 필시 필요했다.
사람이 필요하다고 소리 내어 말해본 것은 처음이었고 낯설었지만, 그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알리카가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 열 오르는 얼굴을 또다시 쓸어내렸다.
숨을 길게 내쉰 알리카가 아빌에게 손을 내밀었다.

“ 좋아. 잘 부탁할게. 아빌. ”

“ 나야말로. ”

아빌은 알리카의 손을 맞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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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0-04-28 18:59 | 조회 : 1,094 목록
작가의 말

이 정도면 본인들만 모르는 연애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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