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획득(獲得) 뒤엔 상실(喪失), 상실(喪失) 뒤엔 획득(獲得)

「보다 순조로운 이해를 위하여 세계관 설정을 참고 후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혹은 읽으시면서 이해가 보충 설명이 필요한 것은 세계관 설정을 참고하셔서 봐주세요.」

볼을 적셨던 눈물이 말라 얼굴이 땅길 때쯤 그제야 알리카와 아빌은 떨어졌다.
민망한 정적이 흐르고 아빌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민망함을 털어냈다.
저를 지그시 바라보던 알리카가 숨을 길게 내쉬고는 조심히 입을 열었다.

“ 아빌, 무례한 언행을 해 죄송하군요. ”

“ ..괜찮습니다.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

“ ...아빌도 편하게 말해도 됩니다. ”

“ 예 ”

다시 짧은 정적이 흐르다 알리카가 의자를 끌고 와 침대 옆에 바로 앉아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 겨우 말을 내뱉었다.

“ ...사정은 들었다. ”

아빌이 고개를 들어 알리카와 눈을 맞췄다.
아직도 죄책감으로 가득한 눈동자였으나 이성이 되찾은 눈동자는 곧게 알리카를 보고 있었다.

“ 습격한 ‘그것’에 대해 알아낸 것이 있어. 들을 건가? ”

알리카의 말에 아빌은 짧은 고민을 끝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 ...일단 먹으면서 듣지. ”

알리카는 운을 띄우려 입을 열다가 식어가는 음식을 보며 말을 바꿨다.
아빌은 괜찮다며 고개를 저으려다 먹지 않으면 말하지 않겠다는 알리카의 태도에 결국 식기를 쥐었다.
아빌이 은색 스푼으로 수프를 떠 입안에 밀어 넣자 그제야 알리카가 다시 입을 열었다.

“ 4일 전.. 나와 아시페로, 로코와 포코, 칼리도는 랭게스타라는 클럽에 갔다. ”

“ ... ”

아빌은 익숙한 이름에 미간을 찌푸리며 기억을 되짚었다.
그 이름은 아빌 보스켓의 일기장에 수시로 나왔던 가게 이름이었다.

“ 그리고 모두 전멸할 뻔 했지. ”

“ !! ”

아빌도 알리카가 어느 정도 강한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
마력의 응용력은 훌륭했고 그 양은 강대했다.
그의 티어들도 저가 많은 티어들을 봐온 것은 아니나 적어도 전생을 통틀어 강한 사람들임은 확실했다.
그런 그들이 전멸을 할 정도였다는 것은 결코 가벼이 여길 일이 아니었다.

“ 랭게스타, 그곳은 단체의 집합소이더군. ”

“ ..단체, 신인가..”

“ 그래, 알아본 바로는 ‘나타’라는 신을 숭배하는가 싶더군. 과거의 기록에도, 전설이나 동화에도 나오지 않으니 아마 만들어낸 신이 아닌가 싶다. 다른 단체와는 조금 다른 것이 있다면.. 그곳은 타부들이 이끌고 있었다는 점이겠지. ”

“ 타부의 수가 많았...나? ”

“ ..그리 많지는 않았어. 겨우 두 명이었으나 어째서인지 죽여도 죽지 않아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위험해지는 건 우리 쪽이었지. 기껏해야 그들은 죽을수록 이성이 사라져 간다는 것 정도가 다였다. ”

아빌은 알리카의 말을 듣다가 식기를 내려놓고 고개를 저었다.

“ 죽지 않는 것이 아니야. ”

“ ..? 아니라고? ”

“ 원래 마인.. 아니 타부는 그 정도의 이성과 질긴 목숨을 가지고 있어. 타부들은 사람을 먹을 때 그 사람의 지능의 1/100 밖에 얻어낼 수 없고 한 사람처럼 이성과 지능을 가지기 위해서는 적어도 100명의 사람을 먹어야만 하지. ”

아빌의 전 삶.
그곳에서의 타부들은 적어도 80명의 사람은 족히 먹어 치운 타부들이었다.
당연히 말을 할 수 있고 전략을 세우며 잔혹함은 더 짙어졌다.
때로는 평균 사람의 지능보다 높아진 타부가 도시를 휩쓸기도 했고 그럴 때마다 인류는 절망적인 상황에 빠져갔다. 그런 인류는 그들을 막아내기 위해 끝없이 싸우고 연구해야 했다.

“ 타부들이 가진 이성, 지능은 죽는 그 수만큼 잃게 되고 타부가 얼마나 먹었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결국 일정 수준까지 지능이 낮아지면 몸이 가루로 변해 사라져 완전히 죽게 된다. 이걸 보고 자멸했다거나.. 제 몸을 유지시키는 기관까지 퇴화하여 결국 몸을 지탱하지 못했다는 등 가설은 많으나 아직 정확히 알려진 건 없어. ”

“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지? ”

“ ...살려면 알아야만 하지. ”

알리카는 아빌을 멍하니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다면.. 그들을 죽이기 위해선 적어도 100번은 죽여야 한다는 거군. ”

아빌의 끄덕임을 본 알리카는 방법을 알았다는 기쁨과 그 방법이 결코 희망적이지는 않다는 좌절감에 섞여 미간을 찌푸렸다.
한숨을 내쉰 알리카가 제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말을 이었다.

“ 그 단체에 문제는 하나가 더 있다... 제물의 의식. ”

“ 제물은.. ”

“ 사람이다. 대부분 누마이거나 혹은 동화율이 낮은 티어들을 제물로 사용해 힘을 키운 것 같다. 헌데 그 의식이 여타 의식과는 다른 부분이 너무 많았지. ”

알리카는 제 품에서 마력이 담긴 병으로 잘 막아둔 돌을 꺼내었다.

“ 돌? ”

“ 싸웠던 타부의 몸 중 일부다. ”

알리카가 보여준 것은 롭의 몸 일부 조각이었다.
날카로운 돌은 살짝 닿기만 해도 베일 듯 위험해 보였다.
아빌이 병을 건네받아 유심히 보던 중 알리카는 또 다른 돌을 꺼내 보여주었다.

“ 같은 조각? ”

“ 그건 타부의 몸이지만.. 이건 약재 및 마약으로 쓰이는 ‘롭’이라는 돌이다. ”

아빌은 어딜 봐도 똑같이 생긴 두 돌에 눈을 가늘게 떴다.
아빌의 반응을 본 알리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덧붙였다.

“ 타부들은 ‘마약’의 이름으로 제 자신을 부르더군. 그건 롭이라는 자의 것이고 또 다른 한 명은 로위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

“ .. 롭이라는 자의 몸이..롭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건가..? ”

“ 그래, 그것이 전례와는 좀 많이 달라. 그 어디에도 이런 경우의 타부는 없었어.
단순히 붙인 이름이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리 얕은 이유는 아닐 것 같다. ”

아빌은 알리카의 말을 듣고는 저와 싸웠던 타부의 몸을 떠올렸다.
길쭉이 늘어나던 나무 뿌리같은 줄기.
확실히 다른 타부들 보다는 기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 ...그럼, 이곳에 침입했던 그 녀석은.. ”

“ 오른이 보내준 줄기를 건네받아 알아본 결과.. 신들라와 유사하더군. ”

“ ... ”

“ 랭게스타의 2층에 그 의식이 치러지고 있던 것 같다. 족히 60구는 넘어가는 시체와 피로 쓴 문자, 그리고.. ”

알리카가 아빌에게 나직이 말했다.

“ 마뱃잎이 있었다. ”

“ ... ”

“ 그들이 널 죽이려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 말해줄 수 있겠나? 아빌. ”

“ ... ”

“ 대체 네가 랭게스타와... 나타의 단체와 어떤 연관이 있었는지. ”

알리카는 조용히 물었고 아빌은 어떤 대답도 해주지 못했다.
예상가는 것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단체와 랭게스타, 신이 되고자 했으며 금기를 범한 아빌, 타부가 이곳을 습격한 것 전부 아빌이 범한 금기와 관련되어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그것을 결코 알리카에게는 말할 수 없었다.
알리카 뿐 아니라 그 누구에도 말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이 말을 내뱉는 순간 그것이 마침표를 찍는 일이 될 테니까.

“ ..아빌. ”

“ ... ”

알리카는 아빌의 이름을 한 번 더 부르며 그를 재촉했으나 아빌은 더욱 입을 다물 뿐이었다.
아직까지도 제 몸에 맴도는 알리카의 마력 때문일까? 제 혀가 목구멍으로 사라져버린 느낌이었다.

“ ...아빌, 너 때문에 모든 것이 어그러졌다고 들었어. 설령 그 말을 못 들었더라도 네가 그들과 같은 편에 서 있을 거란 의심은 안 했을 거야. 널 의심하는 게 아니라...단지. ”

그의 불안한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 알리카의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알리카의 찬 손이 아빌의 손에 겹쳐지자 마력이 흐르는 것도 아닌데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분명 처음에는 마력 탓에 그에게 곁을 내주기 시작했을지 모르지만 지금, 지금 이 순간도 그런 것인지 아빌은 혼란스러웠다.
정말로 그냥 알리카의 마력이 기분이 좋아서, 그가 착한 사람이라 제 죄를 숨겨줄 것 같아서, 고작 그런 이유로 그의 곁에 머물게 된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 단지 네가.. 위험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무것도 모르다가 네가 위험해진 상황이란 걸 뒤늦게 알아버린 그 상황을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아. 말하기 어려운 것이란 걸 알아. 그래도.. 그래도 말해줄 수 없을까..? ”

“ ...난... ”

“ 부탁해 아빌. ”

알리카가 아빌의 손을 조금 더 강하게 잡아 왔다.
아빌이 떨리는 눈으로 고개를 들자 알리카가 아까 전 자신에게 지었던 표정으로 저를 보고 있었다. 가늘게 떨리는 그의 눈꼬리와 힘이 들어간 손이 그가 얼마나 간절한지 느껴졌다.
알리카는 4일 전부터 지금까지 쭉 자신을 책망했다.
아무것도 모르다가 아빌에게 위협이 발생하고 나서야 모든 것을 알았고, 결국 그 위협은 아빌을 상처 입혔다.
자신이 조금만 더 아빌에 대해 알았더라면.. 아빌이 겪고 있는 아픔을 알았더라면
혹시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에 더 자신을 무겁게 했다.
그에게 고개를 들 자신이 없었고 그에게 더 다가갈 자격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알고 싶었다. 이제라도 알고서 그를 지켜주고 싶었다.
그가 더는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가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알리카는 알고 싶었다.
이 모든 행동이 자신이 하기에는 너무 이기적인 일이지라도..

“ ..내게 네 곁을 내어줘. ”

아빌은 알리카의 말에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그의 말을 믿어도 될까.
사실을 고해도 되는 것일까. 하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이미 저도 모르게 깊이 들인 그를 이 이상으로 더 들여도 되는 것일지 알 수 없었다.
차라리 저 말들이 거짓말 같았다면 더 굳게 마음을 닫을 수 있었을 텐데.
그가 마력을 내서든 위로를 해줘서든 달콤한 행동들로 절 꿰어냈다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차라리 그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 ...신이.. 되고자 했을 겁니다. ”

“ ... ”

그랬다면 결국 제 입이 벌어지는 일은 없었을 것을..

“ 그들의 말에 신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

분명 모두 말해버린다면 미래의 나는 지금의 자신을 한탄할 것이다.

“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질렀습니다. ”

그러나 다시 닫아버리기에는

“ ...금기를 범했어요. ”

이미 들어온 그를 밀어낼 수 없었다.

“ .. 내가, 사람이라면 결코 해서는 안 될.. 금기를 범했습니다. ”

설령 이것이 그와의 마지막이 될 마침표가 될지라도.

“ ..그게 내가 그들과 연이 생겨버린 이유..입니다. ”

“ ... ”

“ 미안.. 미안해. 알리카. ...미안합니다. ”

사과할 이유가 없었지만 아빌은 자꾸만 새어 나오는 사과를 내뱉었다.
고개를 들어 변했을 알리카의 얼굴이, 이제는 사라질 이 손의 온기가 너무나 두려워서 고작 하는 것이라고는 고개를 숙여 사과를 내뱉는 일뿐이었다.
알리카의 손이 결국 아빌의 손에서 떨어지고 아빌의 심장도 함께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이내 이것을 받아들이듯 눈을 감았다.
모든 것이 끝났음을.. 이제는 그를 볼 수 없음을..
그러나 제 손에 닿아왔던 온기보다 더 큰 온기가 제 몸을 감싸 안았다.

두 번째.
두 번째로 알리카가 아빌을 끌어안았다.

“ 괜찮아.. 괜찮아 아빌. 이제 괜찮아. ”

아빌은 사라졌다고 생각한 온기가 오히려 더 크게 다가오자 제 몸 깊이 응어리졌던 무언가가
녹아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놀란 아빌이 몸을 굳히며 눈을 연신 깜빡였다.
그런 그를 조금 더 꽉 끌어안은 알리카는 아빌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 ..말해줘서. 네 곁을 내줘서 고마워. ”

알리카의 작은 소리가 귓가에 닿자 아빌은 아까 와는 다른 의미로 눈을 감았다.
안심과 기쁨이 떨어졌던 심장을 채워나갔다.
마침표는 결국 찍혔지만 그랬기에 새로운 문장을 쓸 수 있었다.
그것이 더없이 기뻐서 아빌은 이미 잔뜩 흘려 더는 나올 것 같지 않던 눈물이 다시 흘렀다.
떠날 것이라 생각한 그가 떠나지 않았고 사라질 것이라 생각했던 온기는 사라지지 않고 되레 다른 것이 사라졌다.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아빌은 이 믿을 수 없는 현실이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했다.
아빌은 그렇게 새로운 문장의 운을 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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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0-04-26 18:04 | 조회 : 1,206 목록
작가의 말

여러분 손이 오그라드셨다구요? 다리미 챙기세요. 전 이미 쫙 폈습니다. 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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