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획득(獲得) 뒤엔 상실(喪失), 상실(喪失) 뒤엔 획득(獲得)

「보다 순조로운 이해를 위하여 세계관 설정을 참고 후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혹은 읽으시면서 이해가 보충 설명이 필요한 것은 세계관 설정을 참고하셔서 봐주세요.」

아빌은 머물기로 한 일주일의 마지막 날까지 알리카를 만나지 않고 방에만 있었다.
아빌이 이곳에 머물게 된 이유는 알리카가 아빌에게 마력을 계속 주입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기에 계속 만나지 않을 것이라면 굳이 이곳에 머물지 않고 제 집으로 돌아가도 문제가 없었다. 그럼에도 아빌이 방에만 있을 것이면서 기어코 후작가에 머무는 이유는 이대로 돌아서면 정말로 다시는 그를 만나지 못할까 싶은 마음에서였다.

어느새 너무 깊어진 존재에 아빌은 괴롭게 발버둥을 쳤다.
만나려고 하면 감히 예상할 수 없을 아픔이 두려웠고 이대로 돌아가려고 하면 그건 그것대로 서글펐다.

‘ 이 밤만 지나면 다 끝이구나.. ’

어느새 밤이 내려앉은 마지막 밤, 아빌은 평소라면 억지로 침대에 누워서라도 잠에 빠지곤 했지만 오늘만큼은 가만히 창가 근처에 앉았다.
유독 찬바람이 아빌의 뼈마디를 전부 꿰뚫는 듯 했다.

“ ...저..백작님..”

“ ... ”

리자가 아빌의 곁에 서서 우물쭈물 거리면서도 꼭 쥔 양 손이 그녀의 어떠한 강한 결심이 엿보였다.
아빌이 창밖을 보던 시선을 돌려 리자를 바라보자 리자는 고개를 깊게 숙이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크게 말했다.

“ 주, 주제 넘는 이야기 인 것을 압니다만..! 그래도, 그래도 백작님을 위해서... 후, 후작님을 만나보시는 것은 어떠신지요..”

“ ... ”

“ ...불, 불쾌하셨다면 벌을 받겠습니다. 그래도... 그래도 백작님이 꼭 만나셨음...좋겠습니다. ”

몸을 파르르 떨 만큼 겁에 질려 있음에도 제 말을 제게 정확히 전하는 모습이 참 낯설면서도 어딘가 간지러웠다.
아빌은 리자의 말을 듣고는 고민할 것 없이 바로 고개를 저으려 했다.
그러나 저렇게 겁에 질리면서도 제게 그 말을 하는 리자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아빌은 의문스러웠다.

“ ..왜지? ”

“ ... ”

“ 왜, 내가 후작님을 만나 뵈어야 한다는 건가? ”

“ ..경을 칠 일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 그럼에도 솔직히 답하자면.. ”

리자가 눈을 질끈 감으며 마른침을 삼켰다.
리자의 깊게 숙이고 있던 고개가 올라가고 저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똑바로 보였다.
그 눈에는 오직 저를 향한 걱정과 온기만이 담겨 있었다.

“ 백작님이... 만나시고 싶어하시는 것 같아 그렇습니다. ”

“ ... ”

“ 미, 미천한 제가 감히 백작님의 의중을 알 수 없겠지만..! 그래도.. 후회는.. 미리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

“ ... ”

“ ...죄, 죄송합니다. 벌은 달게 받겠.. ”

“ 그래.. 후회는 미리 하는 것이 아니지. ”

아빌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여전히 두려웠다.
과거에 이미 많은 상처를 입은 그를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
아빌은 눈을 질끈 감으며 숨을 길게 내빼었다.

‘ 이래도 저래도 후회한다면.. 차라리 확실하게 이 미련을 버리는 것이 낫겠지. ’

아빌은 그리 생각하며 리자에게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 후작님을... 만나 뵐 수 있는지 여쭤봐 주겠나? ”

“ ..! 네! 알겠습니다. ”

리자는 아빌의 말을 듣자 저가 더 기뻐하며 방을 나섰다.
차라리 그의 차가움이 자신의 미련한 생각을 완전히 끊어 내주기를 바라며 아빌은 다시 질끈 눈을 감았다.

***

똑똑.

“ 들어오십시오. ”

알리카가 차분한 어조로 대답하자 그의 집무실 문을 열고 그리 오래도 아니 것만 참 그리웠던 얼굴이 보였다.

“ 늦은 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

“ 아닙니다. 앉으시지요. ”

저가 그토록 애타게 떠올리면서 보지 못 했던 얼굴, 아빌 보스켓이 현재 그를 찾아왔다.
시종을 통하여 그가 자신을 만나기를 원한다는 말을 들은 순간 저도 모르게 작은 기쁨이 피어올랐다.
마지막 날까지 그를 보지 못했다는 실망감과 울적함에 일도, 랭게스타 건도 전부 손에 잡히지 않았고 조금 그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던 때 그가 저를 찾아와 줬다는 것이 그토록 기뻤던 것일까 계속해서 생각하고 의문스러웠던 그날의 일도 별로 물을 생각도 나지 않았다.

“ ...후우 ”

“ ... ”

아빌 보스켓은 여전히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바라볼 뿐 저와 눈을 마주치지 못 했다.
연신 숨을 몰아쉬며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것이 그가 적잖게 긴장한 듯 보였다.
그 모습을 보자 알리카는 그 날의 사실이 그가 저를 바라보지 못 하게 만든다면, 그를 불편하게 한다면 더더욱 별로 알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 ..말하고 싶지 않다면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니 이 말도 그를 다그치려 하는 것이 진심이었다.
고개를 퍼뜩 들어 올리는 아빌이 눈을 잘게 떨더니 고개를 느리게 저었다.

“ 말해주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말하지 못 하는 겁니다. ”

“ ... ”

“ 저도, 저도 왜 그날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피를 보았더니 순간 온몸이 떨렸습니다. 온 몸이 녹아내리는 듯 했습니다... 계속 이유를 찾았지만 아직도 그 이율 모르겠습니다. ”

“ 피 공포증이 있습니까? ”

“ ...아니요. 없습니다. 그냥..그냥..하아.. 저도 모르겠습니다.”

말을 마친 아빌은 마치 곧 다가올 무언가에 대비하듯 고개를 떨궜다.
무엇이 그를 저렇게 떨게 만든 것일까..무엇이 그를 저토록 서글픈 표정을 짓게 만든 것일까.. 알리카는 마음이 불편했다.
알리카는 살면서, 아니 설령 죽어서라도 그를 걱정하게 될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빌 보스켓이 언젠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도 별 감흥이 없을 만큼이나 그에게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시작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 거짓말은 아닙니다.. 정말 .. 그냥 저도 모르겠습니다. ”

피를 토해내듯 괴롭게 말하는 아빌의 모습에 알리카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잘게 떨리는 아빌의 손도, 고개를 들지 못하고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그의 얼굴 전부 알리카의 눈에 잘 보였다.

“ ...그게 끝입... !”

떨리는 아빌의 손 위로 제 손을 감싼 것은 무의식적이었다.
평소보다도 훨씬 작게 느껴지는 그가, 두려워하는 와중에도 어딘가 애절한 그의 목소리가 알리카를 이끌었다.
아빌은 놀란 눈으로 알리카를 바라보았고 알리카도 적잖게 놀라 이 상황을 모면하려 얹은 손으로 마력을 흘려보냈다.
알리카의 마음을 대변하듯 그의 마력이 아빌의 몸을 따스하게 감싸 안았다.

“ ... ”

알리카도 아빌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고요한 정적이었지만 말을 내뱉던 방금 전보다도 훨씬 따뜻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

아빌은 알리카의 들어오라는 목소리를 듣자 마치 바로 앞에서 사망선고라도 받은 듯 철렁였다. 그러나 그것과 동시에 그는 차분함을 되찾았다.
문고리를 돌리는 것에도 망설임이 없었고 그의 얼굴을 보고 말을 내뱉을 때도 떨림이 없었다.

“ 아닙니다. 앉으시지요. ”

차갑고 딱딱한 목소리를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그의 목소리는 그냥 차분했다.
아니, 조금 부드러웠던 것 같기도 했다.
차라리 알리카의 목소리가 차가웠더라면 빨리 입을 떼고서 제 아둔한 욕심을 무너뜨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그렇지 않았고 오히려 제 욕심을 자꾸만 부추기는 듯 했다.

“ ...후우 ”

무겁고 긴 한숨을 내쉬며 어떻게 입을 떼야할지 머뭇거렸다.
자꾸만 혹시나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어 나오려는 말보다도 다른 말이 먼저 치고 나오려 했다. 그러나 제 긴 침묵이 그는 불편했던 것일까 알리카가 먼저 입을 열었다.

“ ..말하고 싶지 않다면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

그 말을 들은 순간 아빌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빠르게 들어올렸다.
그리고서는 빠르게 그의 말을 부정했다.
혹시라도 그가 오해할까봐, 그가 당장이라도 돌아가 보라고 할까봐서 평소보다도 말이 더 빠르게 나왔다.
드문드문 멈칫거렸지만 그럼에도 하나하나 그 날의 일을 말하고 있었다.
아빌은 말을 아끼는 편이었다.
침묵이 그가 할 수 있는 저를 지키고 남을 지켜내는 방법이었다.
굳이 남의 오해를 정정해주지 않았고, 굳이 남에게 제 일을 알려주지 않았으며, 굳이 구구절절 묻지도 않는 것에, 궁금해 하지 않는 것에 이야기 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그럴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으니까.

“ 거짓말은 아닙니다.. 정말 .. 그냥 저도 모르겠습니다. ”

그런데 지금 아빌은 그 어느 때보다도 길고 간절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가 오해하지 말아줬음 해서, 그가 저를 싫어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서, 그래서 아빌은 침묵을 깼다.
남을 지키고 나를 지키는 침묵이 그의 대화였으나 이를 져버릴 만큼이나 아빌은 절절했다. 고개를 들어 올리지 못할 만큼 두려워도 계속 버티고 앉아있을 만큼 애절했다.
그러나 알리카는 더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저를 바라보는 시선이 짙게 느껴질 뿐이었다.
아빌은 문득 저가 이렇게 간절한가 싶었고 그런 저에게 비웃음이 들었다.
비웃음에 미소가 얼굴 위로 드리워지려다 깊은 슬픔과 섞여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 ...그게 끝입..! ”

이제는 전부 끝이라며 이 밤이 지나고 난다면 어차피 지나갈 일이라 생각하며 아빌은 힘없이 말을 내뱉었다.
그런 그의 손 위로 차가운 손이 맞닿았다.
제 손을 덮는 커다란 손의 주인은 알리카였다.

‘ ...왜? ’

아빌은 알리카의 행동에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언제 제 속이 뒤틀렸냐는 듯 멀쩡해지며 알리카를 바라보았다.
얼마나 바라보았을까 제 손을 타고 따스한 마력이 온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 ... ”

알리카는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고 그저 마력을 제 손으로 흘려 보내줄 뿐이었다.
고작 그것뿐임에도 아빌의 일그러졌던 얼굴 위로 안도가 퍼져들었다.
마력이 퍼져들며 아빌은 그제야 알리카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고 그의 얼굴은 어떠한 혐오도, 차가움도 없이 부드러운 따듯함만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마치 제게 주는 이 마력처럼 그는 더없이 따듯하고 다정했다.
그것이 아마 안심돼서, ..기뻐서 분명 고요한 정적뿐임에도 제 심장소리가 크게 들리는 듯 했다. 아빌은 아주 조금, 아주 조금의 욕심을 내며 알리카와 눈을 맞추었다.
그의 불안은 눈 녹듯 사라지고 따스함만이 맴돌았다.

***

“ 꺼허어--..허... 으으.. ”

“ 하, 하하하! 하하하하!! 좋아 좋아. 아주 성공적이야! ”

얼굴 전체가 피부가죽이 벗겨져 근육이 전부 드러난 여자가 기이한 소리를 내며 몸을 괴롭다는 듯이 비틀었다.
그 모습을 보며 롭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음을 흘렸다.

“ 그나저나 마뱃잎으로 다시 하다니.. 저번에 시도하지 않았어? ”

옆에 있던 로위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왔다.
그의 몸은 얼핏 멀쩡해보였으나 장기가 모두 사라진 그는 뱃가죽이 늘어지고 홀쭉했다.
로위스의 질문에 롭을 대신해 아름다운 직원, 신들라가 답했다.

“ 그건 맞는데.. 이상하게 요새 도통 오시지를 않네? 나름 이번에는 좀 직위 있는 사람을 노려본 건데.. 누마 주제에 호우트가 되겠다는 야망도 있겠다.. 적당한 그릇이었는데.. ”

“ 혹시 죽은 거 아니야? ”

로위스가 앞에서 괴롭다는 듯 비명을 지르는 여자가 짜증나는지 발로 그녀의 입을 짓이겼다.
롭이 적당히 하라며 본인도 짜증난 다는 듯이 머리를 헝클였다.

“ 그 고집불통 새끼가.. 기어코 물건을 훔쳐 제 집으로 간 거 같더군. 그대로 비명횡사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런데 그런 거 치고는 어째 계속해서 웃긴 영웅담이 들려온단 말이야? ”

“ 영웅담? ”

“ 그래, 하이빌 지옥에서 모든 이들을 전부 살려 제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만든 영웅. 아주 영지 사람들이 찬양을 하더군. ”

“ 와, 근데 그 방법을 진짜 시도하는 멍청이가 있었다는 말이야? 그거 골 때리는 놈이네? 그걸 정말 실행했다고? 근데 살아있어? ....그럴 리가 없잖아? ”

로위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롭을 바라보았다.

“ 그래, 살 수 있을 리가 없지. 그게 가능한 존재는 우리들의 신이나 가능한 일이니까. 그러니 그 겁쟁이가 결국 무서워 몸을 사렸을 지도. 무튼 그 새끼를 마뱃으로 삼으려고 했는데.. 틀어져서 이렇게 다시 했으니.. 하아 시간이 더 지체됐어. ”

“ 이 여자가 마뱃으로 각성하면 곧바로 여길 뜨자고 시간이 너무 지체됐으니.. 곧 수상함을 느낄 때도 되었으니까.”

“ 그 전에.. 우리들의 흔적을 아는 사람은 전부 죽여야지. ”

신들라가 고혹적이게 웃으며 두툼한 제 입술을 혀로 느릿하게 핥았다.
퍽 섹시한 모습이었지만 기이하게 자라난 신들라의 뿌리와 흉흉한 눈동자에 등골이 섬뜩해졌다.

“ 그래, 우리 손님들은 물론이고.. 겁쟁이씨도 죽여야지. 겁쟁이씨는 나한테 줘? 그 예쁜 얼굴을 울린다면 정말 아름다울 것 같아..후후 ”

신들라의 말에 롭은 마음대로 하라며 어깨를 으쓱였고 로위스에게 짓밟혀 이가 뭉개진 여자의 입에 마뱃잎을 다시 우겨넣으며 히죽 웃었다.

“ 모든 것은 ‘나타’를 위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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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0-04-08 19:30 | 조회 : 971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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