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탈출

거친 파도가 일렁이며 절벽을 쳤다. 그에 일어난 흰 거품이 찰싹이는 굉음과 함께 일어났다. 밤에 적셔진 듯 짙은 회색빛의 구름이 수평선 너머 고개를 든 해를 가린다. 그 때문인지 어두침침한 하늘은 낮인지 밤인지 분간할 수 없다. 발 디딜 곳을 찾아다니는 갈매기만이 저물어가는 하늘을 헤집고 헤엄치고 있다.

자욱한 안개 사이로, 족히 지은 지 80년쯤 되어 보이는 오래된 수용소가 보인다. 수용소의 이름은 베룻트 수용소. 이 수용소에 들어온 죄수는 죽기 전까지 하늘을 볼 수 없다. 오직, 죽음만이 유일한 탈출구인 것이다.

수용소가 지어진 초기엔 강간, 살해 등 흉악범만 수감되었으나 그다음부터는 실없는 이유의 범죄자들도 끌려왔다. 사기 치고 나라를 뜨려던 사기꾼, 실수로 고위 간부 자식의 신체에 상처를 입힌 공장직원. 유명인과 간통한 남자 등. 죄목도 제각각인 죄수들이 이 베룻트 수용소에 발을 들였다.
또한, 죄를 저지르지 않았는데도 수감된 사람들도 있었다. 속히 '높은 사람'에게 잘못 보일 짓을 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게 수감된 사람들은 식량 하나 들어오지 않는 좁은 감옥에서 목이 쉴 때까지 꺼내달라. 울부짖었다.

죄명, 나이, 학벌도 다양한 베룻트 수용소의 죄수들에겐 한가지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죽음이 유일한 탈출구가 된다는 것이었다. 이 베룻트 수용소 밖을 제 발로 밟지 못하고, 영혼이 돼서야 이 섬을 떠날 수 있었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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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룻트 수용소에 총성이 울려 퍼졌다. 수용소에 있는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을 법한 굉음이었다. 좁은 철창 안에 있던 죄수들은 귀를 막았다. 그들의 표정은 절망적이었다. 수용소 안에서 들려오는 총성들은 누군가의 죽음을 뜻했으니깐. 곧 자신들의 차례가 될 미래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죄수가 망연자실해진 것과 다르게, 단 한 명의 죄수는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허벅지까지 검은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여자는 정신없이 철조망 울타리를 넘고 있었다. 철조망에 작게 난 가시들이 여자의 맨발에 생채기를 남긴다. 그러나 여자는 다치는 걸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겁에 질려있었다.

여자의 관자놀이 옆으로 총알이 스쳐 지났다. 자신의 머리가 조금만 틀어졌어도, 자신의 두개골은 형체도 없이 산산이 조각났을 것이다. 여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어느 정도 울타리를 오른 여자는 망설임 없이 바깥으로 뛰어내렸다. 몇 번 굴러 날렵하게 착지한 그녀는 숲을 향해 달렸다.

불빛들이 매섭게 숲을 헤집었다. 여자는 숨을 죽이고 몸을 낮췄다. 몸을 감추고 숨기는 것은 여자가 제일 잘하는 것 중 하나였다. 여자는 빛이 들어오지 않는 틈새 사이로 몸을 숨겨가며 천천히 나아갔다.

“제기랄... 샅샅이 찾아봐. 얼마 못 갔을 거다!”
“네!”

바람결을 타고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를 찾는 소리. 바닥을 딛는 발소리로 가늠하길 상당수의 군인이 자신을 쫓고 있다. 여자는 걸음을 빨리했다.

‘배가 있었지’

임무를 마치고 여자가 섬에 다다랐을 무렵. 부둣가에 서 있던 낡은 배 한 척을 보았다. 많은 짐을 실기엔 무리가 있어 보이는 배였으나, 여자 혼자 배를 탄다면 조금이라도 이 섬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 지금의 상황에선 그 배는 유일하게 이 섬을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이었다.

숲을 벗어나 바닷가로 나온 여자는 멀리 보이는 부둣가를 향해 달렸다. 썩은 판자들이 널브러져 있는 부둣가엔 낡은 배 한 척이 매달려있었다. 여자는 배 위에 오른 뒤 묶여있는 밧줄을 풀었다. 좀처럼 밧줄이 풀리지 않았다.

“젠장...”

여자는 허벅지에 달린 검집에서 단도를 꺼냈다. 두꺼운 밧줄은 쉽게 단도로 쉽게 끊기지 않았다. 그녀는 칼날로 두꺼운 밧줄을 끊어내기 위해 힘을 끌어내 칼질했다. 밧줄이 끊어지는 것이 눈에 보이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저기 있다!”

그녀는 칼질에 집중하느라 미처 불빛을 피하지 못했다. 여자를 발견한 군인은 하늘에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신호탄이 하늘을 주황빛으로 물들이며 여자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배와 여자를 붙잡고 있던 밧줄이 끊어졌다. 여자는 배 뒤에 달린 모터를 켰다. 배가 빠른 속도로 섬에서 멀어졌다. 여자가 떠난 부둣가에 서 있는 군인들은 당황한 듯 보였다.

“쏴.”“저 여자를 죽이란 말입니까...? 분명 생포해야 한다고..”
“쏘란 말이다! 죽여서든 어떻게든 잡으라고!!”

여러 번의 총성이 울렸다. 총알들이 배에 박혔다. 그중 한발은 모터를 움직이는 여자의 손등을 뚫었다. 여자의 손등이 순식간에 피로 젖어 들었다. 여자는 상처 입은 손을 꽉 잡았다. 그녀는 발목까지 내려와 있는 이브닝드레스를 찢었다. 찢은 드레스를 손목에 꽉 묶곤 여자는 몸을 낮췄다. 그녀의 아랫배에도 총알이 스치며 상처를 남겼다. 그녀가 주체할 수 없을 만큼의 피가 울컥하고 새어 나왔다.


“크흡...”

아릿하게 올라오는 고통에 여자는 이를 악물었다. 여자는 사소한 상처에 연연할 상황이 아니었다.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으나 연속된 죽음에 지친 몸이 좀처럼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흐트러진 정신에 모터를 붙잡고 있던 손이 떨어졌다.

여자는 배 위에 힘없이 쓰러졌다. 배는 거친 파도를 따라 움직였고, 그에 따라 여자의 몸도 미끄러졌다. 여자는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 힘든 상태였다. 마지막 임무에서 겪었던 여러 번의 죽음은 그녀의 정신과 신체를 최악의 상태로 만들었다.

“허무하네...”

바다가 철썩이며 재촉하듯 배를 쳤다. 밤으로 젖어 든 하늘은 어둡고 공허해 보였다. 이대로 저 바다로 뛰어드는 건 어떨까.
여자는 '임무' 때문에 지하실을 나올 때면, 지루한 삶의 끝을 상상하곤 했다. 멈추지 않고 뛰는 심장, 똑같은 호흡, 어둡고 어두운 지하실은 규칙적인 것들로만 가득했다. 그런 지하실 안에서 미약하게 들려오는 파도 소리는 유일하게 불규칙적이었다. 그녀는 만약 이 지겹고 힘없는 삶을 끝낸다면 저런 불규칙한 것들에 묻혀 사라지고 싶었다.

“왜... 명령 안에서만..”

그러나 그녀가 그럴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명령 안에서만 절대적인 사람이었으니깐. 그녀는 자신이 어쩌다 이 조직과 엮인 것인지 떠올려보았다. 답은 하나였다.

“... 날 죽일 수 있으니까..”

그녀가 바라는 것은 영원한 죽음이었다. 자신의 신체가 재생되지도, 끊겼던 의식이 되돌아오는 느낌도 느껴지지 않는 영원한 안식.

여자는 상처 입은 손등을 들어보았다. 피가 멎은 것인지 더 팔목을 타고 피가 흐르지 않았다. 흠뻑 젖은 드레스 천을 풀어보았다. 금방까지 구멍이 뚫려 손의 형체로 보기 어려웠던 상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물어 있었다.

“... 하”

여자는 자신의 손등을 보며 실소를 흘렸다.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미소였다.

“저항하지 마라, 미르”

프로펠러가 돌아가는 굉음과 함께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여자의 위로 날아온 헬기에 바다가 거세게 일렁였다. 배가 위태롭게 움직였다. 금방이라도 뒤집어질 듯 아찔한 모습이었다. 헬기에 탄 조직의 간부는 확성기를 대고 소리쳤다.


“왜 명령에 따르지 않는 거지? 쯧..”

간부의 손짓에 여자를 향해 총구가 겨눠졌다.

“저항하지 못 하게 하도록.”

간부는 무미건조한 어조로 말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여자의 몸으로 총탄이 발사되었다.

“커…. 흡!”
여자의 온몸에 무수한 수의 총알들이 박혀 들었다. 여자의 코와 입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그녀의 볼을 타고 바닥에 피 웅덩이가 고였다. 총알이 뚫고 지나간 상처들에서 불에 지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미간을 찌푸린 여자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총알이 그녀의 몸에 박힐 때마다 그녀의 몸이 발작하듯 튀어 올랐다. 여자가 의식을 잃은 듯해 보이자 군인은 손을 저었다. 군인 몇 명이 죽어있는 여자를 어깨 위에 들쳐 맨 뒤 줄을 묶어 여자를 헬기 위로 들어 올렸다.

“윽, 많이도 젖었군”

바닷물로 젖은 여자는 염분 냄새와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그들은 여자의 손과 발을 다시 묶었다. 쉽게 풀 수 없도록 여자에게 맞춤 제작된 구속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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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를 태운 헬기가 다시 베룻트 수용소를 향했다. 쓰러져 있던 여자는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어때? 다시 지옥으로 온 소감은?”

간부는 여자를 비웃으며 말했다. 그는 여자의 손과 발에 묶인 수갑을 매만지며 말했다.

“이제 네가 그토록 원하던 죽음을 맞을 수 있는데 왜 그런 거야? 쉬게 해준데도.”
“...”
“변덕스럽긴. 물론 앞으로 너에게 ‘임무’ 따위 내려오진 않겠지만 뭐 어때. 너도 편하잖아. 이제는 외부에서 폭탄으로 몸이 터지든, 고문당해 죽든 하는 일은 없을 거니까.”
“아...”
“넌 그냥 여태껏 그래왔던 대로 영원히 살아가면 돼. 우리가 준비한 너의 방에서”

그녀의 방. 최초의 기억에서부터 지금까지 자신이 갇혀있어야 했던 지하 감옥. 창문 하나 없어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수용소의 밑바닥.
여자는 ‘임무’가 자신을 부르지 않는 이상은 그 감옥에 홀로 있어야 했다.

“네가 이러면, 널 죽여줄 수 없을지도 몰라. 궁금하잖아? 네 엄마가 어떻게 죽은 지”

조직은 그녀의 어머니 또한 자신처럼 불멸의 존재라고 말했다. 그녀의 어머니를 죽이면서 불멸의 존재를 영원히 죽일 방법을 알아냈다고. 여자를 ‘영원한 죽음’으로 평생을 부여잡아왔다.

“...거짓말”
“응?”

여자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분명 절망적이어야 할 상황에 여자가 웃음을 흘리자 간부는 흥미로운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경멸의 눈빛으로 간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다 봤어.”
“그…. 그게 무슨”
“내가 가져온... 군사 문서 말이야.”
“네가 봤다고..?”
“하하... 찔리나 보네”

여자가 단호하게 말하자 간부는 당황한 듯 보였다. 자신을 감시하던 간부의 시선이 흐트러졌다. 여자는 단단히 묶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움직일 수 있어.’

여자는 눈동자를 굴리며 헬기를 둘러보았다. 자신의 옆에 앉은 간부, 그리고 헬기 내 타고 있는 군인 3명. 묶인 손과 발을 움직일 순 있었지만, 모두를 쓰러뜨리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의 양쪽에 앉은 간부와 군인은 안전벨트를 둘렀다. 그러나 자신은 내부공간이 충분하지 않은 것인지 그 가운데 걸터앉은 상태였다. 그녀를 붙잡은 양쪽의 팔만 떼어낸다면, 그들에게서 충분히 벗어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여자는 문을 보았다. 수동으로 열 수 있는 개패 장치가 보였다. 온갖 중장비, 전투기, 정찰용 헬기 등의 운전법을 배운 그녀는 익숙하게 다룰 수 있는 것이었다.

여자는 손에 달린 무거운 구속구로 총을 든 군인의 얼굴을 가격했다. 그 힘이 얼마나 센지, 군인이 휘청이며 쓰러졌다. 여자의 돌발행동에 당황한 간부가 손을 움직이기 전에 여자는 묶인 발로 간부의 가슴을 가격했다. 둔탁한 구속구에 맞은 간부의 몸이 바깥쪽으로 돌아갔다

“컥..!”

자신의 어깨를 잡아 오는 군인에 여자는 그의 힘을 이용해 뒤 돈 다음, 군인의 명치를 팔꿈치로 쳤다. 남자의 의식이 꺼질 만큼 강력한 힘이었다. 군인이 정신을 잃자 여자는 허벅지에 차고 있던 단검을 재빠르게 들어 간부의 목에 가져다 댔다.

“낮춰.”
“..예?!”
“고도 낮추라고!”

여자와 군인들의 기세가 달라진 것은 한순간이었다. 조종사는 달라진 분위기에 어쩔 줄 몰라고 하고 있었다. 조종사는 목숨을 위협받는 간부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곤 여자의 말을 따랐다.

헬기가 아래쪽을 향해 점차 낮아지고 있었다. 여자는 어느 정도 파도의 물결이 보일 만큼의 높이가 되자 조종사에게 멈추라는 듯 손짓했다.

“자…. 잠깐..! 어쩌려고!!”
“신경 쓰지 마”

몸을 버둥거리는 간부를 뒤로한 채 여자는 개폐장치를 풀었다. 문이 열리고, 압력에 의해 바람이 세게 불어 들어왔다. 여자는 묶인 몸을 움직여 문 난간에 섰다. 물이라지만, 사람이 맨몸으로 뛰어내리기엔 무리가 있는 높이였다.

“후...”

여자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여태껏 셀 수 없는 죽음을 거쳐왔지만, 자신이 죽음을 선택한 상황은 처음이었다. 익숙한 일이라 생각했지만 스스로 행하는 것은 생각보다 긴장되는 일이었다.

여자의 손이 작게 떨렸다. 맞잡은 손에 땀이 고여 축축해지는 게 느껴졌다.

“다시 돌아갈 순 없지”

여자는 그 말을 뒤로하고 망설임 없이 뛰어내렸다. 간부는 놀란 듯 몸을 젖혀 밖을 바라보았다.

“뭐 하는 거야!!!”

간부는 허공에 대고 소리쳤다. 쓰러져 있던 군인, 조종사는 그녀가 사라진 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핏자국을 남기고 사라져버렸다. 헬기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홀린 것처럼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녀와 관련된 계획이 틀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그저, 잔잔하게 일렁이던 바닷물 사이로 작게 하얀 거품이 이는 것을 바라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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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0-03-10 03:03 | 조회 : 1,107 목록
작가의 말
방학식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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