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오래된 불행

"죄송합니다."

고개 숙인 바다의 머리칼이 폭포처럼 내려왔다. 공손히 모은 하얀 두 손은 무릎 위에 얹었다. 잠시 침묵을 지킨 바다의 머리로 불쑥 다나의 손이 들어왔다. 다나는 바다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됐어. 네 상태도 고려했어야 했는데, 너무 성급하게 일을 시켰던 것 같다. 아무래도 심리적으로 안정이 된 이후에 업무를 하는 게 좋겠어."

다나는 고개 돌려 귀능을 불렀다. 귀능은 얼굴을 빼꼼 내밀어 바다를 살피다, 이윽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뀨뀨' 거리는 소리와 함께 바다를 달랬다.

"너무 자책하지 말아요 바다 양. 그래도 덕분에 기억소거도 잘 진행됐고, 두 피해자는 병원에 안전하게 이송되었잖아요."

바다는 쉽사리 고개를 들지 못했다. 꼭 깨문 입술엔 찢어졌다 덜 아문 상처가 있었다. 바다는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귀능의 말대로 어제의 일은 어찌저찌 잘 마무리되었다. 바다는 새빨개진 눈매를 숨길 생각도 못 하고 혜나의 손에 붙잡혀 일어섰다. 줄에 매달린 인형극 속 인형처럼, 저항도 하지 않은 채 비틀대며 걸었다. 그리고 무슨 말을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어지러운 정신으로 둘을 마주했다. 꽤 오랜시간 갇혀져있던 것 같은 두 사람.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바다는 말 없이 손을 들었다. 그 작은 행동마저도 녹이 슬어 어색했다. 원래는 그렇지 않았다.

가슴 한 켠에 남은 두려움을 그들에 대한 동정심으로 억누르고, 그녀는 두 사람의 기억을 지웠다.

'나가는 내 얼굴을 살필 겨를도 없어 보였고. 혜나는 말이 없었지.'

바다는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부드럽게 떨어진 머리칼이 손에 닿았다. 미끄러운 느낌. 바다는 눈을 찡그렸다.

후끈한 바람이 온 얼굴을 매만지고 안개처럼 흩어졌다. 먼 허공을 쏘아보자 그 시선은 높다란 건물에 다다랐다.

혜나는 눈치챘겠지.
바다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입사할 때 써낸 순혈인간이란 항목도 이젠 아무런 소용이 없어졌다. 눈치 빠른 혜나는 이미 의심하기 시작했다. 내가 혼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기억을 지울까.'

고개 돌린 바다의 눈동자가 푸르게 빛났다. 그 색 안에서 혜나가 헤엄치고 있었다.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자 바다는 아무렇지 않게 다른 곳을 보았다. 마음 속으로 수 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게 가능할 리가 없지. 중간의 기억이 텅 비어버린 혜나를 보면 다들 바다를 의심할 게 뻔했다. 이제 할 수 있는 거라곤 혼혈이 아닌 척 뻔뻔히 연기만 하는 수밖에 없었다.


"바다 선배. 준비 다 됐어요?"

바다는 황급히 고개 돌려 나가를 바라보았다. 나가는 약간 상기되어 발그레해진 얼굴로 바보같이 웃고 있었다. 억지로 웃음을 내고 있었다. 나가 또한 어제의 일로 충격이 컸다. 바다 또한 생긋 웃음진 얼굴로 지친 표정을 가렸다.

"네. 기대되네요. 바다에 가는 건 엄청 오랜만이거든요."

두 사람은 서로의 가면을 보고 대화하고 있었다.

그들의 뒤로 키네시스와 유나가 기다렸다. 가볍게 준비한 옷과 풍성한 모자, 시원한 음료수들이 그 손에 가득 담겨있었다.
'어차피 초능력도 쓸 수 있는 거, 부족한 건 텔레포트로 집에 다녀오면 되지 않될까'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으나, 분위기용이란 키네시스의 말에 어느정도 납득이 되었다. 그래. 소풍가는 것처럼.

"나도 가고 싶은데! 안 그래, 사사 오빠?"

혜나가 팔꿈치로 사사의 다리를 툭 쳤다. 겨우 근신이 풀린 사사는 피로에 푹 젖어보여, 딱히 혜나의 말에 공감하진 못하는 듯 했다. 간간이 쓴 술 냄새도 베여있었다. 하지만 뱀처럼 쏘아보는 그 시선에 떠밀려 그도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유나는 눈썹을 살짝 들어올리며 혜나를 향해 말했다.

"넌 여기서 숙제나 하고 있어. 우린 재밌게 놀고 올게."

겹쳐진 두 팔과 살짝 올라간 말투가 혜나를 더 도발했다. 그녀는 두 팔을 허우적대며 유나에게 소리쳤다.

"나중에 언니 빼고 어디 놀러가는 일 생기면, 그땐 각오해!"


-


"뭐야. 벌써 도착이야?"

"난 텔레포트에 거리제한 없다니까요. 한 번에 지구 반대편도 갈 수 있어요."

바다는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새에 달라진 풍경에 익숙해지려 눈동자를 굴렸다. 눈부신 햇살을 손으로 가리며 그 빛에 익숙해지려 했다. 하지만 붉다못해 주황색 빛은 손가락 사이로 스며들었다. 붉은 색감이었다. 도저히 낮의 햇빛으론 볼 수 없는 빛이었다.

바다는 한순간에 등까지 흘러내리는 서늘한 심정을 느꼈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 돌려, 태양을 바라보려던 찰나였다.

"예쁘다!"

유나의 환호가 앞섰다. 그들의 눈 앞을 맞이한 것은 대낮의 호수같은 하늘도, 새벽같은 아침도 아닌, 그저 황홀한 저녁노을이었다. 황금빛으로 하늘을 물들이고, 푸르다못해 검게 일렁이는 파도까지 붉게 침범한 노을.

바다는 정신없이 사위를 훑었다. 그 모든 경치를 눈동자에 전부 담으려는 다른 이들과 달리, 그녀는 계속해서 머리를 굴렸다. 지금 이 해가 떠오르는 것인가 혹은 지는 것인가. 진다면 어느 정도? 이 지역의 시간은 몇 시 정도 되는 거지? 언제쯤 해가 완벽히 질까?

'밤이 오는 건 언제야?'

"···나가. 우리 가까운 바다로 가는 것 아니었나요?"

바다는 등 뒤로 숨긴 메모지를 꼭 움켜쥐었다. 종이가 힘 없이 바스라졌다. 나가는 쭈뼛대며 조심히 대답했다.

"여기가 풍경이 좋다고 그래서요. 괜찮아지지 않을까 싶었어요."

"······."

바다는 잠시 파도를 타고 오는 바람을 맞이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 여행이라도 가자고 제시한 건 키네시스였지만, 바다에 가자고 말한 건 바다 자신이었다. 가까운 곳에 갈거라고 생각한 자신이 멍청했다. 이건 내 잘못도 있었어.
찰나의 순간 바다의 얼굴에 딱딱히 굳은 감정이 드러났지만, 이내 부드러운 미소로 바뀌어 있었다.

"좋은 생각인 것 같아요. 나가도 많이 당황했을 거잖아요. 어제."

나가의 어깨를 톡톡 두드린 손길이 차가웠다. 대답할 겨를도 없이 바다는 나가를 지나쳐갔다. 그 눈빛이 차가워보여, 나가는 뒤돌아선 바다를 붙잡지 못했다.
바다는 절벽 위로 올라갈 곳을 찾고 있었다. 기껏 바다까지 왔다면 수영 한 번은 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나가는 굳이 강요하고 싶지도 않았다.


키네시스는 한 쪽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서, 노란 모래사장 위를 천천히 걸었다. 그 옆엔 유나도 같이 서 있었다.
그는 유나의 반대편에서 서서히 모습을 지워가는 해를 눈에 담았다.

"예쁘다, 바다."

유나가 잠시 걸음을 멈춰 키네시스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의 끝이 푸르른 바다와 빛나는 경치임을 깨닫고, 그녀는 눈에 띄게 안심한 얼굴을 비쳤다.

"···놀래라."

작게 웅얼이는 소리를 그가 놓칠 리 없었다.

"뭐가?"

키네시스가 능청스럽게 유나에게 고개돌렸다. 화려하게 빼어난 미모는 웃음을 더하자 더 아름다웠다. 꽃처럼 활짝 핀 얼굴에 유나의 볼이 달아올랐다. 유나는 팔짱을 끼고서 한참을 머뭇대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

"착각했어."

키네시스는 말없이 바다를 찾았다. 빠르게 돌아가던 시선은 한 지점에 머물렀다. 오른쪽 가파른 절벽 위, 두 다리를 오므린 바다가 있었다.
그는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를 내비치며 바다를 가리켰다.

"유나. 설마 내가 저 바다가 예쁘다고 한 걸로 알아들은 거야?"

"···이름이 똑같으니까 그럴 수도 있지! 물론 아니었지만, 이름이 같으니까. 착각한 거야. 응."

얼떨결에 버럭 소리지는 유나의 앞으로 키네시스의 얼굴이 불쑥 들어왔다. 산뜻한 비누향이 바람을 타고 쓸어왔다. 유나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유나. 난 예쁘다는 소리 함부로 안 해. 한 사람한테만 해."

유나는 엉겁결에 호흡을 들이마셨다.

"누구?"

우아히 곡선을 그리며 내려온 속눈썹이며 유려하게 뻗은 콧대며 곧은 턱선까지. 유나는 그 모든 곳을 하나하나 눈도장을 찍듯 보았다.

키네시스의 커다란 손이 유나의 머리 위에 툭 놓여졌다. 남은 한 손으로는 밀려오는 파도를 가리켰다. 하얗게 거품 낀 바다가 구슬같았다. 그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평소같은 웃음을 머금었다.

"네가 이 바다보다 예뻐."

그리곤 터지기 직전의 폭탄마냥 부풀어오른 유나를 뒤로한 채 절벽을 향해 걸어갔다. 뒤의 '장난치지 마!' 란 외침에도 호탕하게 웃으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진짜, 저 장난!"

유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멀어지는 키네시스의 등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뜨뜻하게 달아오른 것이, 어쩌면 감기기운이 도로 도진게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마지막 말을 곱씹고 있었다.

네가 이 바다보다 예뻐.
예뻐.
네가 예뻐.


-



"여기 있네."

키네시스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휘어지며 웃음을 지었다. 그는 조심스레 절벽 뒤쪽의 오솔길에 발을 들였다. 길을 찾느라 한참을 고생했다.

갑자기 생겨난 장난심에 그는 발걸음를 죽였다. 염력까지 써가며 공중에 떠 있었는데, 멀리서부터 바다가 고개 돌려 그를 보고 있었다. 들켰구나.

"뭐야. 눈치챘,"

평소처럼 호탕한 웃음소리를 내려던 찰나였다. 키네시스는 바다의 얼굴을 뒷말을 삼켰다.

"왜 왔어요?"


모든 것이 바스라져 있었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바람이 파도의 냄새만 불어온 것이 아니라, 그녀의 감정까지도 저 멀리로 보내버린 듯 했다. 눈동자 속 얼음같은 반짝임은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희미했다. 대신 얼굴엔 지친 피로가 가득했다.

키네시스는 웃음기를 싹 빼내었다.

"왜 그래? 바다."

키네시스는 바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옷 속의 뼈가 만져졌다. 너무 놀라, 얼떨결에 손을 뗄 뻔 했다. 게임에서나 나올 법한 뼈만 남은 괴물들. 그런 느낌이었다.
그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턱을 까닥여 눈 앞의 바다를 가리켰다. 푸른 파도 속에서 새하얀 거품이 일렁이고 있었다. 바다는 데구룩 눈동자를 굴렸다.

"기껏 네가 오고 싶어하던 바다까지 왔는데 왜 이렇게 멀리서 보고만 있어. 물놀이라도 해. 어차피 물에 젖어도 상관 없잖아. 바로 집에 갈 수도 있는데 말야."

키네시스는 손목에 걸린 리미터를 툭 건드리었다. 암묵적인 특기자의 상징이 된 esp리미터의 붉은 불빛이 한 번 번쩍였다. 바다는 아주 천천히, 건전지가 다 된 로봇마냥, 그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이동했다. 그녀는 다리를 모은 채 얼굴을 묻기 직전의 자세를 취했다.

"낮에 올 줄 알았으니까 바다에 오자고 한 거에요. 수영은 해 본지 오래였으니까요. 수영하고 싶었어요. 밤바다였으면 절대 얘기 안 했어요."

"왜?"

"뭐가 그렇게 궁금해요?"

키네시스는 갑자기 어려진 듯한 말투의 바다를 가만 살폈다. 반면 바다의 시선은 그에게 맞추어져있지 않았다. 아무렇게나 널브러져있었다.

"항상 키네시스는 나한테 뭔가 묻고 있어요. 왜 그렇게 궁금해하는지 나도 궁금해요."

동그랗지만 어딘지 모르게 슬퍼 보이는 눈매부터 빨갛게 익은 사과같은 입술,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품은 새하얀 피부까지. 그렇게 하나하나 곱씹고 나서야 그는 바다의 동그랗게 말아올린 머리카락을 볼 수 있었다. 한 올도 내려오지 않았다.

"바다."

키네시스는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었다.

"너 혼혈이지?"

그의 눈동자를 내리쬐던 노을이 한순간에 덮였다. 바다는 희게 질린 낯으로 키네시스의 앞에 섰다. 그녀의 그림자가 키네시스의 얼굴을 전부 가렸다.

눈동자 속에 두려움이 눈물져 있었다. 키네시스는 어깨를 당황하며 어깨를 으쓱 들었다.

"어디서 들은 건 아니야. 그리고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그냥 물어본 것 뿐이니까,"

"얘기하지 마요."

"어?"

착각했구나. 키네시스는 단박에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제대로 마주한 바다의 눈동자엔, 두려움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세요."

그것을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키네시스는 그에 대해 한참을 고민할 수 있었다. 며칠동안 머리를 싸매며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 감정은 오랜 기간 수많은 감정이 겹쳐진 결과물이었다.

"···얘기 안 해. 누구에게도 안 할게."

그리고 그는, 감히 그리 대답할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렇게 불안해하지 마."

'오래된 불행' 이라고.


-



"제이 선배. 상담 좀 해줄 수 있으세요?"

풀이 죽은 강아지마냥, 어깨가 축 늘어진 나가가 다가왔다. 제이는 나가의 모습을 빠르게 훑어보곤 가볍게 말했다.

"조각케잌 하나에 1시간."

"···알았어요. 나중에 세트 하나 가져갈게요."

"좋아. 무슨 일인데?"

그제서야 제이는 제 옆의 모래밭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가 앉은 자리에는 돗자리가 펼쳐져있었다. 나가는 그 오른쪽에 털썩 주저앉아 두 다리를 오므렸다.

"제 친구가 고민이 있다는데요.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해야할지를 모르겠대요."

"뭐어?"

제이는 하마터면 입 속의 사탕을 모조리 뱉어버릴 뻔 했다. 풍선 터지는 소리같은 웃음에 나가의 눈동자가 빠르게 떨렸다. 제이는 뒤늦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미안. 갑자기 웃긴 생각이 나서. 응, 계속해."

'누가 봐도 자기 고민인 걸. 하지만 저렇게 진지한 얼굴인데, 따라가줘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제이는 삐죽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리며 정면만을 응시했다. 제 혼자 엄숙한 표정의 나가를 보면 분명 웃음보가 터질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까, 그 친구는 되도록이면 좀 더 친해지고 싶대요. 아직 사적인 대화를 많이 할 만큼 친하지는 않아서요."

"음. 그거 참 안타깝네."

"근데 둘 다 엄청 곤란한 상황이래요. 스트레스 받는 일을 몇 번 겪고 난 이후라 서로 조심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게다가 요즘 그 선배가 많이 힘든 것 같아요. 원래 항상 웃고 다녔는데 최근들어 부쩍 무표정한 날이 많아요. 그래서 기분을 풀어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 못 참겠다. 제이는 나가 몰래 고개숙였다. 언제부터 그 친구가 좋아하는 사람이 선배가 된 건데. 게다가 왜 그렇게 네 일처럼 말하는 거야.

'이 정도면 자기 이야기라고 광고하고 다니는 수준인데.'

제이는 마른 세수를 연거푸해 웃음기를 싹 빼내었다. 광대가 살며시 올라갔지만 아닌 척 시치미를 뚝 뗀 그는 정면을 응시했다.

"곤란하네. 어쩌면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수도 있고. 너한테 관심이 없을 수도 있겠지."

나가의 고개가 서서히 낮아졌다.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기 직전, 제이는 다시 말했다.

"하지만 아닐 수도 있지. 단지 자기 속내를 잘 말하지 않는 사람일 수도 있고. 너, 그러니까, 네 친구처럼 부끄러워서 그런 걸 수도 있고."

위험했다.
제이는 헛기침을 몇 번 하곤 말을 이었다.

"어쩌면 자기 감정을 꼭꼭 숨기는 사람일 수도 있어. 들키기 싫은 게 있어서, 그걸 숨기려고 친절하게 행동하는 사람도 있고. 원래 천성이 그럴 수도 있지."

머릿속에 바다의 얼굴이 그려졌다. 축 내려와 동글동글한 사진 속 눈매가 떠올랐다. 그 오른쪽의 남자는 영물이었다.
제이는 크게 한숨을 쉬며 기지개를 폈다. 그렇게 힘이 쭉 빠진 몸으로 어둑해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희미하던 빛들이 점차 밝아져 별을 그리고 있었다.

"나가야. 그 친구에게 말해줘."

조용히 시를 읊듯, 나지막한 목소리가 파도소리와 한 데 나부꼈다.

"중요한 건 얼마나 친해지느냐, 그 사람이 날 얼마나 좋아하느냐가 아니야. 그건 철저히 그 친구 입장이지 상대방 입장을 고려한 게 아니니까. 그것만 생각하고 성급해선 안돼. 천천히 다가가야 해. 지반이 견고해야 집을 잘 쌓아올리는 거야. 사람관계도 마찬가지잖아."

나가는 내리깐 눈으로 모래알을 움켜쥔 제 손을 바라보았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린 모래에, 남은 것은 작은 돌멩이 뿐이었다. 나가는 제이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휴!"

제이는 들으란 듯 과장된 한숨을 내뱉었다.

"모든 사람이 그렇단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내 주변에 있던 여자애들은 하나같이 예민하고 민감했어. 그래서 사소한 일에도 신경을 많이 쓰고 또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그랬지. 유나도 그렇잖아."

제이는 나가의 어깨를 토닥였다.

"너무 풀죽지 마. 사람 관계가 수학적으로 주고 받는 건 아니겠지만, 네가 다른 사람 입장도 잘 고려해주는 정 많은 사람이란 건 다들 알고 있어. 언젠간 보답받는 날이 올 거야."

"···선배. 그거 제 이야기인 줄 어떻게 아셨어요?"

나가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 번뜩이며 떠졌다. 항상 눈을 감고 다니는 나가에게선 획기적인 크기였다. 제이는 그 날 '아쉽게도 내 손에 거울이 없었어, 있었다면 보여주는 건데' 란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바보야. 누가 봐도 너랑 바다 얘기잖아."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말아주세요! 제발요, 창피해요!"

나가가 필사적으로 제이의 팔에 매달렸다.

"윽. 붙지는 말아줄래. 아직 결벽증 다 나은 건 아니거든."

제이는 질색을 하며 겉옷에 묻은 모래알들을 털어내렸다.

"어쨌거나, 난 네 말대로 누구한테 얘기하지는 않을거야. 근데 그렇다고 도와주지는 못하겠어. 난 두 사람 이어주는 거 적성에 안 맞는 것 같더라고. 쟤네들부터가 그래. 몇 년을 내가 고생했는데 결국엔 지들끼리 알아서 하더라. 내 도움은 필요없었어 애초에."

제이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등 뒤를 가리켰다. 홀로 서서 밤하늘을 찍는 유나가 있었다. 나가는 온 얼굴 가득 웃음을 피우며 깔깔대고 웃었다.

제이는 모든 것이 장난이었단 듯, 한 쪽 입꼬리를 올려 웃음지었다. 그리곤 비스듬히 고개 숙여 나가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응원은 할게. 힘 내."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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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0-05-25 00:07 | 조회 : 971 목록
작가의 말
화사한 잿빛얼굴

키네유나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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