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대박이 아니라 쪽박

콜록.
무거운 기침소리가 공기에 가라앉았다. 유나는 뜨겁게 달아오른 이불을 휘적거렸다. 작은 움직임에도 몸이 둔해 따라오지 못했다. 결국은 뒤척이다 힘이 빠진 두 손을 툭 떨구었다.

키네시스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유나. 몸은 좀 어때?"

그의 손이 자연스럽게 뻗어져 유나의 이마를 쓸어넘겼다. 수건의 한 쪽 면이 데워져있었다. 키네시스는 수건을 뒤집어주었다. 유나는 민망함에 작게 웅얼거렸다.

"독감인가봐. 예방접종 맞았는데."

"주사 맞아도 걸릴 사람은 걸리더라. 난 원래 잘 안 아픈 몸이니까. 넌 어릴때부터 감기도 자주 걸렸잖아."

유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키네시스가 커다란 손을 거침없이 내밀었다. 유나는 깜짝 놀라 두 눈을 퍼뜩 감았다. 그 손은 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고 내려갔다. 한껏 몸을 움츠린 모습을 찬찬히 쓸어내려본 키네시스는 호탕하게 웃었다.

"그래도 내가 있으니까 괜찮지 않아?"

"무슨, 장난 치지 마!"

유나의 목소리가 힘없이 바스라졌다. 그녀는 안개 낀 듯한 목소리로 거친 기침을 두 어번 했다. 키네시스가 등을 토닥였지만 필요없다며 팔로 뿌리쳤다. 하지만 진심이 아니란 건 키네시스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난 재밌는데' 란 소리를 내뱉을 리가 없었다.

'뜨거워.'

뜨거운 숨이 훅 뿜어졌다. 유나는 자신의 얼굴이 빨간 게 무슨 이유인지 헷갈렸다. 열 때문인지, 아니면,

'.....몰라!'

유나는 시선을 피했다.



-


수족관 속 형형색색의 물고기가 유유히 물 속을 헤엄쳤다. 부드러운 비늘은 해초를 스치고, 동그란 눈은 이리저리 굴러갔다. 혜나는 반짝이는 어항에 쉽사리 눈을 떼지 못했다.

"에메랄드 피쉬에요. 비늘의 빛깔이 투명하고 맑을수록 진귀하다고 평가된답니다. 비싼 건 한 마리에 보석 하나 정도의 가치에요."

열심히 설명하던 판매원의 뒤로 나가와 바다가 서로 눈짓을 보냈다.

'지금? 지금이에요?'

'그래요. 어서 말해봐요 나가.'

언제 물어야 하는건지, 또 뭐라 물어야 하는건지. 감도 못 잡고 나가가 갈팡질팡 하던 때에, 바다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종업원에게 한 발자국 다가갔다. 이대로 가다간 간만 보다 하루가 다 갈 것 같았다. 바다는 조용히 숨을 골라 뱉었다.

"죄송하지만, 저희가 원하는 건 저런 물고기 따위가 아녜요."

그녀의 눈이 차게 번뜩였다.

"여기서 파는 가장 값비싼 걸 원해요."

팔짱을 낀 채 당당한 표정을 지은 바다는 마음속으로 다나를 떠올렸다. 그리곤 세상 그 무엇에도 꿀리지 않는 태도를 이끌어냈다. 조금이라도 수가 틀리면 새어나오는 짐승같은 송곳니를.

"뭘 말하는 지 당연히 알겠죠?"

그리고 그것은 생각보다 꽤 소용이 있었다. 동그란 눈매 속 날카로운 눈빛이 종업원에게로 쏘아졌고, 정중하지만 위협적인 말투는 그녀를 한껏 긴장하게 만들었다.

"따라오시죠."

'딱 걸렸네.'

혜나는 말없이 나가의 손을 잡고 종업원을 따라갔다.


겉으로 보기에 작아보이던 가게는 지하로 내려가는 긴 계단을 숨기고 있었다. 평범한 비상통로로 보이던 문이 그 입구였다. 그 아래로는 모든 것을 삼킬만큼 어두운 구덩이가 있었다.

"저도 이 바닥에서 제법 오래 일했답니다. 여러분처럼 어린 손님을 본 적은 많이 없지만, 아예 없는 일은 아니죠. 가끔은 추적을 피하기 위해 미성년자를 사용하기도 하니까요. 중요한 건 나이대가 아니잖아요?"

그녀는 동의를 구하려는 듯 고개를 돌렸으나, 험악하게 구겨진 바다의 표정에 지레 겁 먹은 웃음을 지었다. 바다는 굳은 얼굴을 쉽사리 펼치지 못했다.
설마 성공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하고많은 가게들 중 하필 여기가 펫샵일 것은 또 뭐야. 바다는 입을 꾹 다문 채 발걸음만 재촉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었으나, 보는 눈이 많았다.

종업원은 두 손을 공손히 모았다.

"이 손님이 어떤 손님인가, 대박을 안겨줄 손님인가는 눈을 보면 알 수 있답니다."

'대박이 아니라 쪽박일텐데.'

'혜나야, 쉿!'

나가는 황급히 검지손가락을 자신의 입에 끌어댔다. 다행히도 그들의 발소리가 통로에 울리는 바람에 혜나의 속삭임을 눈치채지 못한 듯 했다. 나가는 쿵쾅거리는 가슴을 머릿속으론 수백번을 움켜쥐었다.

종업원은 친절하게 웃었다.

"여기서 보신 것은 전부 비밀로 해주셔야 합니다."


그녀의 손 아래에서 오래돼 낡은 문이 맞닿았다. 녹이 슬어 붉고 거친 색이 눈에 담겼다. 문고리를 열자 기괴한 소리가 귀를 긁었다. 찐득하게 벽을 어루만진 피 냄새가 역하게 풍기고, 무거운 쇳덩이가 찬 바닥을 끌었다. 그리고 이따금씩 흐느끼는 목소리. 어두운 방 안에서 느껴지는 미세하게 떨리는 어깨.

"두루미 암컷입니다."

한 여자가 힘없이 벽에 기대어 있었다. 크고 흰 날개는 초라하게 떨렸고, 붉은 빛 눈동자에서 구슬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바다는 툭툭 끊기는 시선으로 그녀를 매만졌다. 한 눈에 봐도 성인은 아니었다. 아직 어려. 가슴 한 켠에 무거운 짐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아직 어리고 상태도 양호하고, 매우 순종적이에요. 구입하시면 윙컷은 무료로 해드립니다."

그녀는 제법 신이 나 보였다. 지금까지 본 모습 중 가장 들떠있었다. 돈을 벌 생각에 그리 들뜬 것인지, 그냥 그 행위 자체가 행복한 것인지, 그 자리의 모두는 감히 판단할 수 없었다. 그저 그 모든 것들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나가는 무언가에 가로막힌 듯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바다는 숨도 쉬지 않고 눈동자만 굴려 그녀를 좇았다. 시선이 다다른 또다른 곳에는 다른 이가 쓰러져있었다.

"이쪽은 사막여우 영물이에요. 수컷이고, 단점이라면 저쪽 두루미보단 저항성이 강합니다. 하지만 저희 쪽에서 나른 손질을 했기 때문에 구입하셔도 큰 위험은 없을 거에요. 하지만 그 때문에 제품에 손상이 입힌 건 어쩔 수가 없네요."

재잘대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늘진 공간 속에서 검붉은 피가 흐르는 것이 분명히 보였다. 바다는 두려운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그저 이해되지 않는 단어들이 많아서일 뿐이었다.

알 수 없었다.
암컷, 수컷, 손질. 그런 건 동물에나 붙이는 말이었다. 적어도 같은 사람으로 보았을 때 절대 사용할 수 없는 단어들이니까.


남자의 눈망울엔 그치지 않는 홍수처럼 눈물이 젖어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 담겨있는 희미한 원망이 보였다.
그들은 들떠서 자신들을 소개하는 종업원만큼이나, 그들을 구매하려는 바다 일행을 원망했다. 단단한 목줄이 채워지고 커다란 몽둥이가 온 몸에 떨어져도 그들은 그 눈빛을 절대 없애지 못했다. 오히려 점점 더 심해져만 갔다. 그리고 피로가 원망을 가릴만큼 짙어졌을 때, 비로소야 그들은 손질이 끝났다고 말했다.


"저 옆의 카메라는 뭐죠."

애써 떨리는 목소리를 누르며 바다는 나가의 옷깃을 잡았다. 이미 고개는 숙여져있었다. 얼굴을 들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나가는 그 사실마저도 눈치채지 못했다. 눈알을 굴리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종업원은 바다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좁은 방 안의 깊숙한 곳에 작은 카메라가 달려있었다. 작고 여린 붉은 빛이 반짝였다. 하나가 아니었다. 그녀는 숨이 섞인 웃음을 내뱉었다.

"세상엔 생각보다 미친놈들이 많아서요. 손질하는 과정이나 그 외의 상품들의 다른 행동들이 담긴 영상을 판매하기도 한답니다. 생각보다 돈이 되어서....."

대답은 끝까지 듣지 못했다. 바다는 명치를 미친듯이 두 어 번 내리쳤다.

"아. 아."

가슴이 너무 빨리 뛰었다. 뇌를 끄집어내 주먹으로 내리치고, 다시 머릿속으로 집어넣은 기분이었다. 손가락까지 저릿저릿한 느낌이 들었다. 눈앞이 새카맣게 변해 빙글빙글 돌고, 혀끝까지 올라온 메슥거리는 느낌이 기분나빴다.

'내가 뭐라고 말하고 있는거지? 제대로 서 있기는 한건가? 두 발로 서 있나? 팔은 붙어있어?'

이미 연기는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읍!"

"언니!"

헛구역질을 참지 못한 바다는 곧장 문을 열었다. 뒤에서 부르는 혜나의 목소리는 분명히 들었으나, 그것은 부드럽게 귀에서 빠져나갔다. 코와 입을 막은 손으로 눈물이 뜨겁게 닿았다. 온 몸에 달라붙은 기분나쁜 냄새가 여전했다.


혜나가 바다와 나가쪽을 빠르게 바라보았다. 온 얼굴에 걱정에 드리워져있었으나, 한편으론 분노가 가득 차올라있었다. 그녀는 종업원에게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있는 힘껏 소리쳤다. 핏대가 약하게 돋아나있었다.

"네가 그러고도 인간이야?! 이 쓰레기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던 나가의 염력이 종업원의 등 뒤를 휩쓸었다. 그녀의 머리와 바닥이 부딪히는 소리가 마치 총성처럼 났다. 종업원의 이마 아래로 검붉은 피가 맺혀져나왔다. 나가는 그 모습에 뒷걸음질로 주춤거리다 곧이어 두 명의 혼혈에게 다가갔다. 열쇠구멍이 나 있는 손목에 걸린 쇳덩이와 목을 두른 목줄로 두 손을 뻗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버드나무처럼 잔떨림이 손을 감쌌다. 그는 제 손에서 시선을 떼어냈다.

"풀어드릴게요."

목줄은 염력에 쉽게 부서졌다. 그렇게 오랜 기간 그들을 힘들게 하던, 평생 풀리지 않을 것만 같던 목줄이. 그렇게나 쉽게 깨졌다.

남자는 동그랗게 커진 눈망울 속 두려움을 잔뜩 담았다. 눈동자에 나가와 혜나가 비쳐져있었다. 영문을 알 수 없단 표정이었다.
나가는 시선을 피한 채, 재빨리 벽 모퉁이의 카메라를 모조리 부쉈다.

"아....."

종업원이 바닥을 기어다니며 앓는 소리를 해댔다. 나가는 천천히 눈망울을 굴려 아래를 바라보았다. 꼭 감았던 두 눈은 번쩍 뜨여진 지 오래였다.
그녀의 얼굴엔 광기 서린 웃음이 가득차있었다. 뭐가 우스운지, 머리를 처박힌 상황에서도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정상은 아니었다.

그녀는 고개만 돌려 두 명의 혼혈과 영물을 바라보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죽이는 건데. 박제로 만들어둬도 돈은 꽤 되거든요. 괜히 아끼다가 다 잃었네요."

"지금 그게 사람을 가지고 할 소리에요?!"

"이쪽 일 하려면 제정신으로는 못해요. 애초에 제정신 아닌 사람들만 도전하는 게 펫샵 일이거든요. 난 무조건 돈만 있으면 돼서 이 일 하는 것 뿐이에요."


그제서야 나가의 마음속에 두려움이 겨우 자라난 새싹만큼 자리잡았다. 그리고 불안과 걱정을 먹고 자라나 점차 나무가 되어갔다.
그녀는 사람이 아니었다. 인류의 범주 속에 포함시키기에는 너무도 잔인했으며, 너무도 비정상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나가의 온 몸에 소름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이거 과잉진압에 들어가지 않나요? 뇌진탕이라도 걸렸으면 어떡하나. 내 인권은 인권도 아니라 이거에요? 변호사라도 불러와야겠,"

"벼농사? 잉꼬? 말이 되는 소릴 해!"

혜나가 나가의 손을 붙잡으며 소리쳤다. 그 짧은 찰나 간 나가의 마음속으로만 수십번을 외치던 말이었다. 나가가 하고 싶었지만 차마 하지 못했던 말들을, 혜나는 우수수 쏟아내렸다.

"사람이 사람다워야 인권이 있는거야! 그리고 변호사는 범죄자 편들어주는 사람들이야? 억울한 사람들 변호해주는 게 변호사라고! 되도 않는 논리 펼치지 마!!"

판매원은 쓴 웃음를 뱉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나가는 그제서야 떨리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두려움이 가슴 깊은 구석까지 뿌리내렸다. 혜나는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기절한 여자의 머리카락을 있는대로 쥐어뜯었다. 나가는 애써 그녀를 말렸다.
그리고 그런 그가 주위를 살펴, 두 사람과 눈이 마주쳤을 때. 문득 한 생각이 나가의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왜 혼혈들이 인권주장을 펼치는 지 알겠어.'


전국에는 이런 펫샵이 수십, 수백개가 존재했다. 펫샵이 이곳 하나일 리는 아닐 것이었다. 아무리 다양한 방법으로 그들을 규제하고, 찾아내고, 벌을 주어도, 돈이 되니까. 이 이유 하나만으로도 펫샵은 사라지지 않았다.

혼혈이며 영물이며, 순혈인간이 아니면 전부 동물로 취급하는 사람도 수백명이었다. 나가는 그동안 혼혈인권신장운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충분히 이해받고 있으며, 요즘은 딱히 차별받는 일도 없다고 생각했다. 생명을 위협받는 일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갑자기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믿어왔던 신념이 뿌리채 흔들렸다.

"나가 오빠!"

"어, 어?"

나가는 뒤늦게 고개를 돌렸다. 혜나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가를 바라보았다. 나가는 날카롭게 경직된 표정을 쉽게 풀지 못했다. 혜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정신차려. 오빠라도 정신차려야 해.
지금 이 분들 많이 다치셨는데, 일단 구급차부터 부르는 게 좋을 것 같아. 난 언니 찾아올게."

말은 그렇게 했어도 나가의 복잡한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는지, 혜나는 쉽게 발을 떼지 못했다. 겨우 복도에 나선 그녀는 손을 동그랗게 말아 입에 가져다대었다.

"바다 언니!"

혜나는 어둡고 넓은 복도를 뛰어다녔다. 바다가 방 문을 열고 뛰쳐나간 것은 보았지만,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는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길은 넓었고 마음은 조급해졌다. 혜나는 제자리에 멈추어서서 눈을 꼭 감았다. 어두운 복도 속 꽉 막힌 침묵은 귀를 가렸다. 그리고 그 사이로, 희미하지만 눈물진 흐느낌이 있었다.


"언니!"

혜나는 곧장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달렸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복도의 폭은 좁아졌고, 나중에 되어서야 한 사람이 서 있기에도 좁을 정도가 되었다. 흐느낌은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혜나는 거침없이 한 손을 뻗어 바다의 옷소매를 잡아쥐었다. 땀에 젖어 축축해진 옷깃이 손바닥에 닿았다. 그녀는 양 어깨가 딱 달라붙은 틈 사이에서 바다를 보았다.

"언니, 진정해. 언니 도움이 필요해. 적어도 종업원의 기억은 지워야 해. 안 그러면 여기 있었던 일들을 얘기해버릴 지도 몰라, 부탁이야."

"혜나야."

바다의 잔잔한 목소리가 혜나를 어루만졌다. 평소였다면 어떻게든 울음을 참았겠지만 그 날 만큼은, 바다는 쉬이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조명도 없이 어두운 복도에서 바다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자리의 그 누구라도 바다의 눈물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 속에 희미하게 자리잡은 흐느낌을 알 수 있었다.

바다는 주저앉은 다리를 움직이려 했지만, 힘이 풀려버려 다시 쓰러졌다. 혜나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바다는 가까워진 혜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네가 보기엔 어때? 저 사람들은 어떤 심정일 것 같아?"

"엄청 슬프고 무섭겠지. 그러니까 우리가 구해줘야 해!"

"아니야. 그게 다가 아냐. 그래서 난 못 해."

바다가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머릿속에서 팽이가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같은 광경을 보아도 나가와 혜나가 자신만큼 충격을 받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혼혈의 이야기고, 영물의 이야기니까. 아는 사람이, 내 친구가, 가족이 경험한 일이고, 그들이 들려준 이야기니까. 그리고 그건 바다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단지 그게 이유였다.

"난 못 하겠어 혜나야. 저 방엔 들어가지도 못하겠다고."

떨리던 동그란 눈물이 말끔하게 쏟아졌다.


"....사이렌 소리."

혜나는 고개를 돌렸다. 빨간 사이렌 소리가 깊은 지하까지 들쑤셨다. 바다는 그 사이에 눈물을 꾹 눌러닦았다. 깊게 파인 상처처럼 눈물은 닦고 또 닦아도 금세 차올랐다. 혜나는 모른 체하며 말 없이 그녀의 곁에 섰다. 곁눈질로 바라본 바다의 눈동자가 푸르렀다. 곱게 내려온 머리카락은 유난히 비늘같았다.

'그렇구나.'

혜나는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1
이번 화 신고 2020-05-18 00:58 | 조회 : 932 목록
작가의 말
화사한 잿빛얼굴

TMI: 바다의 최애과목은 기하와 벡터입니다.

후원할캐시
12시간 내 캐시 : 5,135
이미지 첨부

비밀메시지 : 작가님만 메시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익명후원 : 독자와 작가에게 아이디를 노출 하지 않습니다.

※후원수수료는 현재 0%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