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 (3)



멈춰 있는 시간 속에서 나는 멍하니 허공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떨어져 내리는 그의 땀방울이 나를 수면 위로 이끌게 한다.

무언가 들썩이는 느낌에 깨어난 나는 그와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었다. 그래, 이것은 현실이었다.

나의 위에서 가쁜 숨을 쉬며 나를 애무하는 그의 모습은 가상이 아니었다. 더 이상 얼얼한 감각에 고통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것일까, 겨우 뜬 눈을 다시 내리감고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과거의 나는 이형이를 뒤로 하고 아침이 되자마자 그곳을 빠져나왔다. 혹시라도 그와 다시 마주칠 것만 같은 두려움이 앞섰기 때문이다. 급히 발걸음을 서둘렀다.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짧은 머리칼이 휘날리는 듯했다. 집에 들어오는 것까지는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다시 한 번 그를 마주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맴돌게 된 것은 말이다.

멍하니 그를 떠올려 보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여자를 불러 풍만한 밤을 보내는 그였다. 그 괴리감에 나는 그와 헤어졌던 것이다. 더 이상 그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다시 한 번 그런 그의 모습을 마주하니, 가슴속에 묵혀두고 있던 무언가가 비집고 올라올 것만 같았다. 찝찝하고 불쾌했다.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 그의 모습 때문이었을까.

메마른 눈물이 흘러내린다. 딱 한 방울이었다. 이것이 그와 나의 현재 거리였다. 더 이상 나는 그 때문에 하루 종일 펑펑 울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무언가 찝찝함이 몰려왔다. 이게 무슨 감정인지는 나도 선뜻 정의내릴 수가 없었다. 그저 그에 대한 실망감일 뿐이라고 선을 그으면 되었을 텐데, 나는 그런 선택지를 생각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멍하니 머리를 감싸 쥐고, 허공을 바라보고, 아직 그의 연락처가 남아있는 주소록을 보고, 그와 함께 찍었던 사진들을 찾아보았다.

미련은 점점 더 짙어지는 듯했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 답답함을 풀어내고자 황급히 외투와 지갑을 챙겼다. 그의 흔적이 남아있는 이곳을 서둘러 벗어나야만 했다. 그것이 최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집에서 빠져나와 시내로 향했다. 그러고 언젠가 한 번 가본 적이 있는 것 같은 바에 들어갔다. 술의 가격은 묻지 않았다. 그저 쓰면 쓸수록 좋다고 했다. 그러자 바텐더는 나를 흘끔 바라보더니 이내 아무 말도 없이 나를 받아들여주었다. 그러고 선뜻 건네오는 바텐더에 나는 잔을 받아 급히 들이마셨다. 활활 타오르는 기름이 목을 타고 내려가는 것이 선명히 느껴질 정도였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 때문인지, 술이 너무나도 썼기 때문인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소리 없이 눈물을 토했다. 그러자 바텐더는 조용히 과일 안주를 건네주었다. 나는 한참을 운 뒤, 뒤늦게 과일 안주를 발견하였다. 과일에 묻어있는 윤기 나는 광을 보이는 것은 과연 본래 과일의 것이었을까, 아니면 나의 눈물이 묻어 흘러내리는 것일까. 서러움에 더욱 울었던 것 같다.

술은 사람의 무의식을 끄집어낸다. 그래서 술을 마신 사람은 그 어느 때보다 솔직해지는 법이다.

나는 그를 잊지 못했던 것이다.
무의식중에 나는 그를 위해 눈물을 펑펑 터뜨린 것이다. 지금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려 오는 듯했다.


그러고 다시 과거의 기억을 짚어 보았다. 그렇게 하염없이 울기만 하던 나는 물품을 정리하고 온 것인지, 다시 카운터에 나타난 바텐더의 말에 그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손님, 이제 마감 시간이에요. 이제 집으로 돌아가셔야죠.”


바텐더는 나를 부축해 주며 우리 집까지 데려다 주겠다며 다정한 웃음을 흘렸다. 나는 그런 바텐더에게 업힌 채 집으로 향했다. 그의 등에서 술 냄새가 나는 듯했다. 모두 나에게 옮겨 붙은 것이겠지. 자제하지 못하는 내 모습이 한심해 헛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아직도 그를 잊지 못한 나 자신이 너무나도 역겨웠다.

그러고 마침내 도착했다는 바텐더의 말에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익숙한 그의 모습이 보였다. 그래 이때부터가 시작이었다. 나는 당황해 그에게 이곳이 우리 집이 아니라고 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런 나의 행동은 곧 다가오는 그에 의해 제재될 수밖에 없었다. 바텐더에게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나를 부축하는 그였다. 도대체 뭐가 고맙다는 것이었을까. 오히려 감사 인사는 내가 해야 하는 것이었다. 바텐더는 정중하게 그를 향해 인사를 한 후, 온 길을 되돌아가는 듯했다.

나는 황급히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나의 시도는 그의 입맞춤으로 인해 무산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때보다 격한 키스였다. 눈물이 절로 흘러내렸다.

그렇게 황급히 우리 집으로 들어가 서로 신발도 제대로 벗지 못하고 침대에 올라탔다.
쇼파에 나를 내려놓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에게 있어서 최고의 배려였던 것 같다.




그렇게 나의 기억은 이 부분까지만 선명히 담고 있었다.

아릿한 통증에 다시 눈을 떠 보았다. 그와 동시에 사정을 마친 듯, 긴장이 풀린 기색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가 보였다. 눈이 마주쳤다. 내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의 앞에서 내가 챙길 자존심이란 것은 더 이상 없단 말인가. 비참함에 몸 둘 바를 찾지 못했다. 그에게 이런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자 바로 위에서 그의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와 함께 몸이 움찔 떨리는 듯했다.


“젠장―!”


그와 동시에 순식간에 나의 팔을 낚아채는 그였다. 그러자 다시 한 번 그와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더 이상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다. 그러자 더욱 강하게 내 팔을 붙잡는 것이 느껴졌다.


“대체… 대체, 너란 녀석은―!”
“뭐가… 뭐가 문제인 거야…!!”


그의 말에 질 세라 나는 언성을 높여 외쳤다. 그러자 그가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가 금방이라도 무서운 말을 내뱉을 것 같아 먼저 선을 긋기로 결정했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줬잖아… 여태 당신이 다른 여자들을 만나도… 난 아무 말도 안 했고… 당신이 나를 싫어하니까… 헤어져줬잖아… 그리고 당신의 눈에 안 띄려고 하는데도… 왜… 대체 뭐가 문제야…!!”


말을 이을수록 눈물이 함께 흘러내렸다. 내 처지를 되뇔수록 내 자신이 너무나도 비참했다. 도대체 내가 지은 죄가 무엇이길래 그에게 이렇게 쫓겨 다녀야 했던 것인지 궁금했다. 되돌아올 그의 답변이 무서워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차라리 그가 욕을 하며 돌아가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나의 바람과는 반대로 그가 나의 뺨을 쓸어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도…, 날 모르겠어.”


차라리 욕이 나았을 것이다. 천하가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그는 아무 생각도 없이 나를 품고, 나를 탐한 것이다.


“당신은… 나를 끝까지 비참하게 만드는구나……”


흐느낌에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찬 눈물이 뺨을 타고, 그의 손길을 타고 흘러 내렸다. 그러자 그가 황급히 나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 느껴졌다. 그 손길이 마치 처음 만났을 때만 같아 나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 느꼈던 그의 다정함과 엇비슷한 감이 있었다.
눈물을 계속해서 흘러내렸고, 그는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렇게 반복되었다. 그러고 그와 나 사이에서는 정적이 흘러내렸다.

눈물로 흐릿해진 시야에서 그의 얼굴이 보였다. 다시 한 번 그를 마주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의 입이 천천히 벌어지는 것이 보였다.


“……알려줘.”
“…뭐?”


먼저 정적을 깬 것은 그였다. 나에게 알려달란다. 자기 잘난 맛에 살던 그가 나에게 알려달라고 한다.
마주한 얼굴에서는 분하다는 듯, 아니 답답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는 것이 보였다.


“젠장…! 어떻게 해야 될지도 모르겠어. 너와 헤어진 이후로 일이 제대로 진행된 적도 없고, 집에 가면 늘 텅텅 비어있는 것 같고…… 너는 다른 녀석이랑 잘 살고 있는데. 젠장, 젠장!”


그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의 복잡한 심정이 나에게 그대로 전해져 오는 듯했다. 내가 느낀 바 그대로였던 것이다. 나는 모순적이게도 그에게서 동질감을 느꼈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방금 전까지 내 뺨에 머물다 가버린 그의 체온이 선명히 느껴졌다.


“네 말대로, 나는 구질구질한 녀석인 것 같다.”


그의 말에 눈물이 더욱 차오르는 듯했다. 이젠 참을 수가 없었다. 목 놓고 소리 내어 울음이 터져 나왔다. 연신 그를 향해 나쁜 놈이라며 욕했다. 그러자 그가 나의 품을 비집고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머리를 꼭― 껴안아 보았다. 그러자 더욱 품을 파고드는 그에 나는 그의 머리에 고개를 묻었다.


“어제 그렇게 헤어지고 난 뒤에… 약속도 다 엎고 하루 종일 집에 박혀 있었어. 그러니까 아는 사람한테 연락이 온 거야…. 바에 네가 있다고―”
“…”
“거기가 우리 처음으로 만났던 장소였어.”
“…!!”


나도 잊고 있던 부분을 그가 기억해 주고 있었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자 그가 내 품에 기댄 채 툴툴대는 것이 살결을 통해 느껴졌다.


“나도 그런 건 다 기억해. …솔직히, 너를 싫어한 적은 없어. 그저… 너를 보면 볼수록 미칠 것만 같아서… 애초에 나는 여자를 좋아했는데. 젠장…, 너만 보면 내가 아닌 것만 같았어.”


솔직한 그의 모습에 나는 눈물을 그렁 단 채 그를 향해 웃어 보였다. 그러자 희미하게 마주보고 있던 그가 얼굴을 옅게 붉히며 고개를 돌리는 것이 느껴졌다.

서로의 사랑이 엇갈린 것이었다.


“…미안해. 너를 아프게 해서. 꽤 멀리 돌아온 것 같네, 우리.”


그가 흔히 볼 수 없는 환한 미소로 나를 향해 웃어 보였다. 나 역시 그를 향해 똑같이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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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5-26 18:51 | 조회 : 6,791 목록
작가의 말
자낳괴

후회는 이렇게 끝입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다들 감기몸살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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