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 재회



꿈을 꿨다.
너무나도 행복해서 깨고 싶지 않는 꿈. 내가 나를 버리기 전의 스스로를 간직하고 있던 시절의 꿈. 아득해진 시야 속으로 하원은 재민의 모습을 보았다. 이제 막 일어난 자신의 옆에서 책을 읽고 있는 재민. 자신의 옛 연인이자 자신이 과거 속에 박아준 사람이다. 그러니 이건 꿈일 것이야. 꿈일 수밖에 없어, 그렇게 되뇌어보니 묘한 자신감이 생겼다. 이런 꿈은 허구한 날 꾸었으니 익숙했다. 손을 뻗어 그의 이름을 간절하게 부르고는 웃어보였다. 아아……., 이런 것이 행복이지. 먼 과거에 두고 왔던, 이제는 까마득해서 꿈이 아니고선 무엇인지 떠올리기 힘든, 그런 것이지. 깨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다 문득, 입을 여는 재민에게 온 신경이 쏠린다.
“일어나지, 그만.”
어?
벌떡, 너무나도 생생한 목소리에 상체를 일으켰다. 지금 내 꿈이 말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머리가 미친 듯이 아파오기 시작했고 초점이 제대로 맞춰져 제 앞에 있는 사람이 뚜렷하게 보였다. 하 재민, 자신이 대학교 선배였으며 지금은 유명한 OO병원의 의사인 제 옛 연인이었다. 눈을 미친 듯이 비벼본다. 그와 자신은 2년 전에 헤어진 사이이다. 정확하게는 일방적으로 차였고, 자신이 도망쳤다. 눈을 열심히 비벼본다. 정녕 제 앞에 있는 사람이, 자신이 알던 그 사람이 맞는가? 꿈이라고 하기에 그의 표정은 너무나도 차가웠다.
…….
어제의 일을 곰곰이 떠올려본다. 평소와 다름없이 손님을 만나러 갔던 것은 기억한다. 그리고 그가 싸구려 약을 제 술에 탄 것도 기억한다. 약으로 하는 것은 가장 싫어하기에 억지를 부려 손님을 떨쳐내고 그리고……, 뜨거운 몸을 안고……, 어디로……, 왔더라?
그 생각과 동시에 그의 얼굴과 제 손바닥을 번갈아본다. 아, 세상에!
“……아, 안녕이야.”
제 같잖은 인사에 그는 잘생긴 얼굴을 구겼다. 순간적으로 머리를 최대한 굴려본다. 하원은 이런 것에 능숙했다. 아니, 능숙해졌다. 신세를 졌다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내리는 순간 무릎이 아프리만큼 바닥과 부딪힌다. 힘이 하나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덜덜 떨며 최대한 몸을 일으켜본다. 되도 않는 약은 생각보다 강했던 모양이다.
“내가 왜 여기에……, 있을까…….?”
“네 발로 직접 걸어왔으니까.”
아하, 그렇구나!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어본다. 정신이 하나도 들지 않는 상태에서 그의 집으로 걸어 들어왔다는 건가? 오, 세상에…….! 그건 더한 전개였다. 눈을 이리저리 굴려, 빠져나갈 상황을 만들어보자, 하며 이리저리 보다가 자신이 같이 있었을 때보다 더 휑한 집안의 모습에 고개를 그저 갸웃거릴 뿐이다. 아내 분은 어디에 있어? 자신의 질문에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없어. 파혼했으니까.”
아, 그랬구나. 그래서 혼자 있구나.
덤덤히 말한다. 이미 2년 전에 떼어버린 마음은 굳어버린 것 같다. 그의 얼굴을 보고 다시 뛰는가 싶더니 이제는 완전히 조용해졌다. 허전한 느낌에 제 가슴팍을 보다가 자신이 전라라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황급히 옷을 찾아 대충 입어낸다. 그에게 좋지 못한 모습을 보여줬다는 생각에 올려다보니, 그는 천천히 입을 연다. 밥 먹고 가.
…….
생뚱맞게 밥을 먹고 가라고? 우리가 그럴 사이었나, 싶었지만 최근 연이은 일에 제대로 된 밥을 먹지 못해 배가 많이 고픈 것은 사실이었다. 하원은 고개를 젓다가도 마침 울리는 제 배꼽시계에 그를 보더니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다. 느릿하게 몸을 옮겨 부엌으로 향했다. 한 발자국 옮길 때마다 머리가 아찔해진다. 망할 놈! 도대체 어떤 싸구려 약을 썼기에 이렇게 어지러워! 나지막이 욕을 지껄이고는 마지못해 의자에 앉는다.
“어디를 가서 무얼 하나 했더니……..”
…….
“고작 한다는 게, 약이야?”
이래서 의사들은 따분해. 자신이 술이 아닌 약에 취했다는 것쯤은 가볍게 알아버린 것 같았다. 재민은 조그맣게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고, 하고 중얼거렸다. 그 말에 어깨를 가볍게 으쓱거렸다. 아까부터 그가 자꾸만 얼굴을 찌푸리는 이유는 아마도 자신이 알던 하원이 제 앞에 있는 그와는 너무나 달랐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반 곱슬의 짙은 흑색 머리카락, 동그랗고 선명한 눈매에 웃는 것이 예쁘다는 소리를 종종 들었던 제가 알던 하원과 곱슬끼 다 빠진 금발의, 어디를 봐도 불량해 보이는 제 눈앞의 하원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특히……..
“그 멍 자국은 다 뭐야. 너, 무얼 하고 다니는 거야.”
그의 말에 제 몸 곳곳에 남은 멍 자국들을 바라본다.
“아, 이거…….. 손님들 중에 이런 플레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거든.”
말을 다 끝내고는 밥을 입 안으로 털어 넣는다. 몇 가지의 반찬과 따뜻한 밥이지만 굉장히 맛있었다. 대충 해결했던 편의점 간편식사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제 말에 재민은 입을 다문다. 열심히 먹던 그를 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몸을, 파는 건가?”
…….
“응. 병원비를 빌렸었거든. 아, 우리 엄마 병원비 말하는 거야. 돌아가시면서 이래저래 다 내라고 해가지고.”
 알아. 재민은 그 잘난 입술로 딱딱하게 말했다. 하원은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고, 깨끗하게 비워진 밥그릇을 보더니 만족한다는 듯이 웃었다. 자연스레 열어본 전화기에는 부재중이 15건이나 와있었다. 대부분 ‘그’였고, 난감하다는 듯이 전화기를 만진다. 지금 돌아가면 손님을 내팽겨 쳤다는 이유로 또 두들겨 맞을게 뻔했다. 부재중과 재민을 번갈아보던 하원은 서글서글하게 웃어 보였다.
“있잖아, 그래서 말인데”
“안 돼.”
에잉.
말을 꺼내자마자 재민은 단박에 거절한다. 하원은 할 수 없다는 듯이 최대한 몸을 구부려 동정을 구해보는 작전으로 넘어갔다. 새로 생긴 습관은, 나름대로의 애교였다. 딱 일주일만, 안 돼. 그럼 닷새만, 안 돼. 사흘만! …….. 오, 조금씩 통하는 것 같다.
“내가 말이야, 어제 손님을 퍽, 치고 왔단 말이지?”
…….
“그러니까 지금 가면 나 완전 혼난단 말이야…….! 혼나는 정도가 아니야. 엄청 얻어 맞아. 딱 한 번만 도와주라. 형아, 응?”
형아는 하원이 재민과 사귀었을 적에 불렀던 호칭이었다. 선배에서 형, 형아, 그리고……., 하원은 머리를 잘게 흔들어 피어오르는 옛 기억을 다시 묻어버렸다. 다 잘라냈다고 생각했더니, 아니었던 모양이다. 숨을 푹 내쉬고는 그에게 약조한다.
“집도 깔끔하게 청소해놓을게.”
“···무급이야”
“응. 내가 재워달라고 부탁 하는 거니까.”
결국 재민은 허락했다. 하원은 과감하게 휴대폰 전원을 꺼버렸다. 재민의 집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가면 그나마 덜 혼나지 않을까, 하는 꼼수를 써보기로 한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간만에 보는 저 잘난 면상을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괜찮아. 이미 감정이고 기억이고 뭐고, 다 묻었어. 저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다 묻고 버렸는걸. 이미 그건 내 기억도, 내 감정도 아니야.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저 사람은, 같은 대학을 다녔던, 잠깐의 선후배 사이였을 뿐이라고.

그것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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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4-19 03:35 | 조회 : 1,272 목록
작가의 말
MIRIBYEOL

안녕하세요. 많은 고민 끝에 준비했던 소설을 마지막으로 올리려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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