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있잖아

나 조금

지친 것 같아

여기 생활 자체가 나쁜 건 아닌데

여러가지 것들이 나를 너무 힘들게 해

사람

언제나 사람이지

가장 진절머리가 나는 건

내가 가만히 있으면 무엇을 해도 괜찮은 줄 알고

내가 가만히 있지 않으면 지랄 맞다고 뒤에서 지들 마음대로 씹어대

애초에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가

그런 진절머리 나는 것들과 항상을 함께해야하니

어찌 지치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 반에 어떤 애가 있어

내 옆자리 앤데

내가 자리를 비우기만 하면 내 자리에서 노트북을 하다가

내가 자리에 돌아오면 하던 걸 마무리하고 다른 자리로 옮겨가

그럼 난 그걸 옆에서 멀뚱 보고 있는데

그래도 사과 한 마디를 안 하더라

그게 벌써 여러번이야

나는 평소 착한 척을 열심히 하는 편이고

착한 척을 열심히 하니까

애들은 내가 병신으로 보이나봐

기분 더러워

사실 모둠 수행같은 것들만 아니면 다 뒤집어 엎고 싶은데

내가 여기서 공부를 잘 하는 편도 아니라 그럴 수도 없어

그 놈의 공부

새벽부터 밤까지 해도 시간이 부족한 양의 숙제를 하고

그러고도 수행 준비에 시험대비

뭘 어쩌라는 거야

오늘만 해도 6시에 일어나서 준비하고 나왔어

일요일인데

정식적으로는 자유시간이지만

열등생이 뭘 어쩌겠어

자유시간이라도 불태워서 0.1점이라도 올려야지

있잖아

요즘 라틴어 수업이라는 책을 읽고 있어

간단한 에세이인데

거기 이런 말이 있더라

요즘 사회는 청소년, 청년들에게 청춘을 모두 불태워 미래를 보고 살아가게 한다고

내가 전에 쓴 글이랑 똑같지 않아?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꽤 놀랐어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구나 싶어서

하고 싶었던 얘기는

왜 나도 알고,

저 책의 저자도 아는 것을

사회는 모르냐는 거지

매일이 불태워질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그 속에 뛰어드는 게

우리가 어리석다 칭하는 부나방과 다를 게 뭐가 있을까

그러니 부디 내게

불태우지 않아도 괜찮은 하루가 생기게 해줘

열등감에 찌들지 않은 하루가 생기게 해줘

그게 아니라면 죽여줘

어차피 부나방의 끝은 자신의 몸이 스러져 끝나는 것

어차피 나도 곧 그렇게 스러지겠지

그렇다면 일찍 스러지는 게

덜 고통스러우니

더 이득인 것 아닐까?

아 맞아

여기 있다보면

애들이 자퇴나 자살 얘기를 참 많이 해

그럼 난 그걸 들을 때마다

비웃음이 흘러 나오는 걸 참을 수가 없어

진짜 죽으려고 해본 적은 있을까?

정말 자퇴하려고 고민한 적은?

없겠지

있다면 그렇게 가볍게 말하기는 상당히 힘든 일이니

난 둘 다 있어서

가볍게 말해서 농담처럼 들리도록

혹은 절대 농담처럼 들리지 않도록 매번 노력하고

그런 농담을 들었을 때 구역감이 치솟으니까

기만,

내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가볍게 하는 건 기만이야

그리고 나는 나를 기만하는 수많은 이들 사이에서 살아가고 있어

어찌 힘들지 않을 수가

그러니 부디

구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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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0-07-12 07:12 | 조회 : 483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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