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레이시&쟈크 생일 [살고 싶은 날]

“레이시, 생일 축하해!”

쟈크가 활짝 웃으며 축하인사를 건네자 뒤돌아본 레이시가 웃음으로 화답한다. 하늘색 고깔모자를 쓴 쟈크는 레이시에게 붉은색의 고깔모자를 씌워줬다. 어색하게 씌워진 붉은색 고깔모자를 레이시가 다시 고쳐 썼다.
오늘은 1월 17일. 일 년에 단 한 번뿐인 레이시의 생일이었다.

“고마워, 쟈크.”

레이시는 눈매를 늘어뜨리며 다시 미소 지었다. 천사와도 같은 미소. 그러나 온전히 기뻐하지 않는, 허울뿐인 미소였다.
아무도 레이시의 생일을 축복해주는 이는 없었다. 그녀의 앞에 서 있는 쟈크 말고는. 레뷔는 종종 잊어버리고, 그녀의 오라버니인 오즈왈드는 매번 생일 축하한다는 한 마디만 건네준다.
이런 적도 정말 오랜만인 것 같네-. 그렇게 생각하며 턱을 괴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평소와도 같이. 쟈크가 씌워준 빨간색 모자는 벗지 않은 채 시선을 밖으로 두었다.
생일을 축복해주지 않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레이시의 곁으로 쟈크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는 레이시가 보는 풍경을 눈에 담았다.

“붉은 눈을 가진 아이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게 이상하지 않아?”

중얼거리듯 속삭이는 레이시에 쟈크가 동그래진 눈동자로 그녀의 옆모습을 시야에 담았다. 레이시의 얼굴에는 표정변화가 없었다. 입가에는 자조적인 웃음만이 걸려 있다.
레이시- 너는 얼마나 많이 멸시를 받으며 살아왔으면 자신에게 상처 주는 말을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런 모습마저도 사랑스러워.

“내가 죄의 아이라는 걸 알면서도 너는 어째서 내 생일을 축복해주는 거야?”

“레이시니까.”

레이시는 쟈크를 또렷하게 마주보았다. 레이시와 쟈크의 귀에 각각 하나씩 달린 귀걸이가 잔바람에 흔들렸다. 쟈크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런 나라도 온전히 봐주고 칭찬해준 레이시니까.”

“쟈크는 여전히 변함없네. ‥…나는, 생일을 제대로 축복받아본 적이 없어. 오히려 생일에 축하받는 게 더 이상한 걸?”

“나도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우리, 오늘만큼은- 조금 더 특별하게 보내는 거야!”

쟈크가 순수하게 웃는다. 몇 년 전과 다름없이 맑았다. 레이시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내키는 대로 하자면 쟈크의 의견도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그래.”

“그럼 레이시, 잠시만 기다려 봐! 내가 다과를 가져올게!”

손을 흔들며 다과를 가져오겠노라 뛰어가는 쟈크였다. 레이시는 손을 낮게 흔들어주며 쟈크의 분위기에 맞춰주었다. 하나로 땋은 금색 머리카락이 벽 뒤로 모습을 감추었다.
레이시는 소파에 앉아 숄을 둘렀다. 눈이 내려서 추운 날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런 날에 밖에서 쟈크를 처음 만났지. 돌이켜보면 며칠 전인 것 같은데 벌써 몇 년 전의 일이 되어버렸다.
시간은 참 빠르다. 죽을 날도 이제 곧 머지않았다. 죽을 날을 정확하게 알 수 있다니- 죽을 날이 언제일지 불안에 떨지 않아도 되어서 참 좋다고, 레이시는 실없는 생각을 했다.
한참동안 멍하니 앉아 있자 쟈크가 들어온다. 그는 어떻게 설득했을지 모를 두 사람과 함께 들어왔다. 바로 각각 다른 색의 고깔모자를 쓴 레뷔, 오즈왈드와 함께였다.

“풋, 둘 다 그게 뭐야!”

레이시는 소리 내어 깔깔거렸다. 오즈왈드는 부끄러움에 레이시를 외면하기 바빴고, 레뷔는 작은 수레에 담긴 케이크를 들어올렸다. 케이크에는 초가 꽂혀 있었다.

“뭐, 오늘 하루는 즐겁게 보내자고.”

수레에는 케이크 말고도 간단한 다과가 들어있었다. 잔과 주전자, 그리고 과자들을 탁자에 올려놓자 소박한 생일상이 완성되었다.

“레이시, 생일 축하해.”

오즈왈드가 레이시에게 다가와서 축하한다는 인사를 건넸다. 생일의 주인공인 레이시는 가장 가운데에 위치한 소파에 앉았다.

“쟈크는 생일이 1월 19일이지?”

“레이시가 내 생일을 알아준다니 기쁜 걸?”

레이시는 쟈크의 생일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옷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물처럼, 쟈크가 언젠가 말해주었던 생일의 날짜가 레이시의 머릿속에 스며들어 있었다.

“그럼 쟈크의 생일도 미리 축하하자. 쟈크, 내 옆에 앉아.”

“응?”

“지금 내 생일파티를 하면, 모레인 쟈크의 생일은 못 챙겨줄 게 뻔해. 그러니 차라리 오늘 생일을 축복하자.”

레이시가 자신의 옆자리를 손으로 두드리자 쟈크가 머뭇거리며 소파에 앉았다. 레이시는 쟈크의 귀에 걸린 귀걸이를 톡 건드렸다.
조용하고 나긋한 목소리로 레이시가 쟈크의 귓가에 속삭인다.

“생일 축하해, 쟈크.”

레뷔와 오즈왈드가 케이크의 초에 촛불을 붙였다. 귤을 장식한 케이크에 꽂힌 촛불은 새빨간 혀를 날름거리며 타올랐다. 레이시는 제 앞에 놓인 찻잔을 집어 들었다.

“오늘만큼은 축복받지 못하는 두 사람의 생일을 축하하지. 한 번쯤은 그러는 것도 재밌잖아?”

레뷔의 말에 레이시가 작게 키득대었다. 촛불은 쟈크가 불어. 레이시가 양보한다. 레이시의 뜻대로 쟈크가 후, 하고 촛불을 불었다. 촛불이 꺼지며 연기와 함께 매캐한 연기가 감돌았다.

“해피 버스데이(Happy Birthday).”

건배하는 것처럼 찻잔을 높게 치켜들었다. 네 사람의 찻잔이 동시에 부딪친다. 레이시와 쟈크는 편안하고 안온한 웃음을 지었다.
죽을 날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레이시는 문득 이런 생각을 떠올렸다. 오늘만큼은 살고 싶은 날이라고. 오늘 만큼은, 정말로 살고 싶다고.
선반 위에 놓인 검은색 토끼인형과 흰색 토끼인형이 미동도 않고 네 사람의 생일파티를 바라본다. 조촐한 생일파티가 지금 막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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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2-09 23:34 | 조회 : 1,444 목록
작가의 말
유렌54

날짜가 지났지만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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