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 미술관의 두 남자

전시관 곳곳에 포스터를 다 붙이고 난 뒤 직원 사무실로 올라가려던 중에
한 남자와 여러 여자들이 모여있는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한 가운데 서서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 훤칠하고 잘생긴 남자는 바로 성현이었다.
성현을 둘러싼 여자들은 그림을 설명하는 성현을 보고있다.

그림 앞에 그림이 서 있네.

유정도 다른 여자들처럼 성현을 보았다.

그리고 마치 퍼즐 조각이 맞춰지듯이 성현과 눈이 마주쳤다.
성현의 눈매가 부드러워지자 유정은 자신의 몸이 말랑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먼 거리에 있어도 성현은 쉽게 유정을 제압해 버린다.
더이상 버틸 수 없어 유정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사무실로 발걸음을 뗐다.

아직 개관 첫주인지라 찾아오는 관람객이 많아 정신이 없지만
허용 인원수를 제한하고 있어 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평화로운 오후이다.
모두 물을 마시거나 핸드폰을 하면서 10분간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슬그머니 정수기 앞으로 다가가 물을 마시려던 유정은
정수기 옆에 있던 여자에게 사람들이 몰리면서
복도에 있는 정수기가 떠올라 아예 사무실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아르바이트생들은 서로 얼굴도 익혔겠다, 말을 걸고 친해지려는 분위기인데
그 속에서 유정은 최대한 눈에 띄지 않으려 도망다니고 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드러내는 것보다 훨씬 쉽기 때문이다.

복도 끝까지 오면 열려있지 않은 곳이 한 군데 있다.
사람들의 소리가 잘 들리지않을 정도로 조용하고 창문도 있으며
정수기도 비치되어 있다. 계단 바로 앞이지만
전시는 4층까지만 진행되기 때문에 올라올 사람이 별로 없으니까
유정이 쉬기에 딱 안성맞춤인 곳이다.

쪼르륵
정수기에서 나온 물이 차가워 입에 머금고 창문을 바라본다.
아직 쌀쌀한 날씨인데 안에서 밖을 바라보면 햇살이 맑아 봄이 온 것처럼 보인다.
덜컥!
"헉!"
유정이 안심하고 닫혀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무거운 문이
소리를 내며 열어젖혀졌다.
문 사이로 성현이 나왔다. 몸을 잔뜩 웅크린 유정을 본 성현은
눈을 껌뻑이며 잠시 유정의 표정이 풀릴 때까지 가만히 있어주었다.
"괜찮아요?"
"네? 네!"
성현이 나온 곳에서부터 먼지냄새가 났다.
문 틈새를 살펴보니 큰 책장에 여러 조각상들이 줄을 서 있었다.
성현은 자신의 뒤를 살펴 보는 유정의 얼굴을 바라본다.
입술에 맺힌 물방울을 발견하는 바람에 성현의 손이 움찔거렸다.
"들어와 볼래요?"
성현의 손은 입술이 아닌 팔목으로 향했다. 다행이었다.
유정은 성현의 손길에 이끌려 무거운 문 틈 사이로 들어갔다.
성현의 말은 거부하기가 힘들다.



다비드상과 같은 석고상이 대부분이었고
쓰지 않는 곳이 맞는 지 한가운데에 길게 자리잡은 테이블 위에는
석면가루가 조금 쌓여 있었다. 먼지를 보자마자 유정은
성현에게 먼지가 묻지 않았는지 살펴 보았다.
그와 동시에 성현은 자켓을 벗어 먼지가 잔뜩 있는 테이블위로 던져놓아버렸지만.
"아, 아아.."
".....? 왜 그래요?"
성현은 테이블 밑에서 작은 의자를 빼 털썩 앉아버린다.
유정은 성현이 오늘 베이지색 정장을 입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오늘 끝나고 어디가요?"
성현은 유정과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손목의 단추를 풀어재꼈다.
"학교로 가려구요.. 과실에서 작업을 좀.."
"학기 중이니까 한창 작업 중이겠구나, 참.
바쁘겠네요, 유정씨."
성현은 멋드러진 머리를 넘기다가 이내 풀어 내리면서 얼굴을 쓸어 내렸다.
여전히 유정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있다.
생각에 잠긴 듯 조각상들을 바라보고 있지만 성현의 눈이 공허해 보인다.

"피곤..하신가 봐요."
아, 성현은 이제야 유정을 바라 본다. 유정은 성현의 눈길에 사로잡혀 서있다.
"그렇네요. 아직 개관 첫주이니까요."
성현이 웃으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성현은 유정이 자신의 시선이 닿으면 굳어 버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 연화작가님은 조각도 하시나요?"
성현의 시선에서 풀려난 유정은 조각상들을 둘러보며 조금씩 몸을 움직였다.
"작품이 몇개있기는 한데, 스케일이 커서 지금 여기에는 없어요. ...유정씨는요?"
"어... 지금 조소 수업을 듣고 있기는 한데, 어렵더라구요.
특히 사람 얼굴이요. 조금의 차이만으로도 다른 생김새가 되어버려서.."
"음, 그렇겠네요. 몇 mm, 각도만으로도 인상이 바뀌어버리니까요."
성현의 말에 공감한 유정이 성현을 향해 돌아 보았다.
어느새 성현과 꽤 가깝게 서 있었다. 성현이 갑자기 손을 뻗었다.
"....?"
성현이 손을 뻗었을 뿐인데 유정은 그 손길에 이끌려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덥썩
마르고 흰 팔목에 덜렁 붙어 있던 유정의 손이 성현의 큰 손에 붙잡혔다.
하지만 싫지않았다.
"예전에 어떤 조각가가 자신의 연인에게 조각을 가르쳐주었는데,
상대의 얼굴을 만들면서 기술을 익히게 했다고 해요."
유정의 손이 성현의 손에 의해 성현의 얼굴에 닿았다.
"눈을 감고"
유정의 눈꺼풀이 살짝 떨렸다가 이내 꼬옥 감겼다.
"손끝으로 골격뿐만아니라,
살결까지 느끼는 거예요."

유정은 스스로 성현의 이마에서 턱끝으로
손가락을 섬세하게 움직이며 훑어내려갔다.
성현의 눈썹은 보기보다 풍성했고 코는 매끈하면서 두껍게 느껴졌다.
광대는 깎은 것처럼 균형잡혀 있었으며 입술로 내려갈수록
까칠한 수염자국이 손끝을 자극하였다.
따듯하지만 말라있는 입술에서 서둘러 날카로운 턱끝으로 내려간 유정의 손은
이제 허공에서 남겨진 성현의 온기만을 매만지고 있다.

"어때요? 좀 감이 잡혀요?"
"....네"
유정의 입꼬리가 환희에 차 있었다.
"기분좋네요."
유정은 자신의 마음 속 말을 성현이 해버려 당황했다.

"전신을 만들 때에도 이렇게 직접 라인을 느껴보는 과정이 필요할 것같아요"
유정의 허리가 성현의 두 손에 잡혀 버렸다.
따듯함 이상으로 뜨거운 성현의 손에는 살짝 힘이 들어가 있다.
유정은 그 힘에 저항할 수 없었다.

"남자 몸이 여자보다 굴곡이 없어서 감동이 반감되지않을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남자든 여자든 사람마다 다 달라서
그 사람만의 살덩어리와 근육을 느끼고 나면
대상의 성별에 상관없이 관능적인 느낌을 재현해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뜨거운 손은 유정의 복부와 옆구리를 차근차근 더듬었다.

"이 얇은 허리에도 살과 근육이 붙어 있고.. 단단한 구석도 있네요."

드디어 유정이 용기를 내 뒷걸음질 쳤다.

성현의 손에서 뜨거움이 옮겨붙었는지 유정의 얼굴까지 화끈거리고 있었다.

"저, 전신은 아직 안 만들어봐서.."

"그래요? 만들게되면 누굴 모델로 할거에요? 남자? 여자? 아니면.. 본인?"
웃고 있는 성현이 짖궂어 보인다. 유정은 어쩔줄 몰라하며 두리번거렸다.
"여자가 모델이 된다면..
작품이 아무리 잘 나왔어도 흥미로울 것같지는 않네요."
웃으며 말했던 성현의 표정이 턱을 괴고나니 조금 변해있다.

"제가 여자를 잘 몰라서 작품이 재미없을거라고 하시는 말씀이신가요?"
유정은 성현의 표정변화를 보지 못한 듯 하다.

성현은 웃음이 터져나와 스스로를 진정시키려 이마를 닦으면서
유정에게 몸을 돌렸다. 유정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 보이자
성현의 얼굴에서도 웃음끼가 가셨다.
"유정씨는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지만 자기세계는 강하니까,
유정씨 자체를 소재로하면 분명 누구든지 흥미롭게 볼 수 있겠다..싶었어요."
유정은 성현의 말이 머리로는 이해가 되었지만 쉽게 표정이 풀어지지 않았다.

"꼭 보고 싶어요. 유정씨가 궁금하거든요."

유정은 입술을 더욱 앙다물었다.

겨우 사그라들었던 유정의 몸뚱이가 다시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유정의 낯빛이 변하지 않자 이번에는 성현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리고 아주 정확하게 성현의 손끝이 유정의 벨트에 걸리면서
유정의 몸이 성현에게 이끌렸다.
"말랐지만 다부진 느낌도 있고, 살도 질기면서.."
순식간에 성현의 손이 셔츠 안으로 들어와 등쪽으로 진득하게 타고 올라왔다.
유정의 몸도 성현의 손처럼 뜨거웠다.

"이 형상 안에 무언가 강한 것이,
아주 강력한 무언가가 들어있을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 있어서 굉장히 궁금해요."

성현이 큰 몸을 일으켜 자신의 손을 지지대삼아
부드럽게 유정을 테이블 위로 옮겼다.
반쯤 올라간 셔츠때문에 유정의 갈비뼈가 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쉽게 부러질 것같지만 부러뜨리고 싶지 않은..
그 안의 무언가가 소중하고 강력할 것같아서.."
성현은 그림의 느낌을 설명하기 전에 처음 느끼는
날것의 감정들을 나열해 볼때처럼 완전히 유정의 몸에 빠져들었다.

유정의 두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은 성현은 유정의 갈비뼈를 따라 손을 움직인다.

성현의 손끝에 의해 유정의 허리가 꺾이면서
성현의 허리에 유정의 두 다리가 닿았다.

이것은 마치..


그제서야 성현이 뒤로 물러났다.


두 사람은 온 몸에서 심장 박동소리가 울리고 있음을 느꼈다.

먼저 정신이 든 성현이 유정의 셔츠를 내려주었다.
유정이 아무렇지 않은 척 얼굴을 쓸어내리며 테이블에서 내려왔다.

"쉬는 시간..끝나서.."
유정은 뒷걸음치다가 얼른 문으로 향해 내달렸다.
성현이 소심하게 유정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손을 보자 유정은 또 다시 그 손길에 이끌려 방향을 달리한다.
유정이 자신에게 다시 다가오자, 성현은 자신도 모르게 유정을 불러세운 것에
스스로 당황하다가도 금방 침착하게 돌아와 손을 접었다.

두 사람 사이에 달콤한 숨소리가 흔들리는 눈동자에 의해 사방으로 진동했다.

"뭔가.. 필요한게 있으면.."
성현의 눈동자를 보고 유정은 오히려 진정이 되었다.
뜨거워진 몸이 따듯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끝나고..

끝나고 밥먹으러 같이 가실래요?"
부러질 것같은 몸 안에는 분명 강한 무언가가 있다.


"...좋아요."
굳어 서있는 성현을 두고 유정이 나가버렸다.




오랜만에 햇살을 잔뜩 받아 조각상들은 따듯하게 온기가 올라오는 것을 느낀다.

이곳은 뜨거워진 얼굴을 식히려는 남자에게는 좋지 않은 장소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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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2-11 14:03 | 조회 : 1,190 목록
작가의 말
nic62162067

본래 스토리와는 크게 영향이 없는 번외편 입니다. 두 사람 케미가 좋아 생각나는대로 써보았어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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