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캔버스

나의 인생을 바꾼 그림이 있다.
예술을 하려면 이렇게 해야겠구나, 싶었다.


-
"야, 유정 또 그림 그린다!"
얇고 뽀얀 팔뚝 끝에 달린 보드랍고 작은 손이
연필을 쥐고 열심히 무언가를 그리고 있다.
아직 무엇을 그리는 지는 알 수 없지만
이 하얗고 작은 아이가 그림을 잘 그린다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다.
옅은 갈색머리에 창백해 보일 정도로 하얀 얼굴,
그림 그리기에 집중하고 있는 유정의 주변에 몰려있던 여자아이들은
유정의 얼굴과 유정의 손끝을 번갈아 바라본다.
그것을 눈치챈 다른 남자 아이들이 유정의 종이를 빼앗아 찢어버린다.
"여자같애"
"유정이는 여자야"
가만히 있던 유정이 갑자기 남자아이에게 달려들었다.

처음있는 일이었다.

모두가 깜짝 놀라 숨을 참았지만,
유정이 남자아이에게 쉽게 제압되면서 이내 시끄러워졌다.



유정의 엄마는 상처난 유정의 얼굴을 감싸며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아빠 왔다."
"아빠!!"
유정이 큰 소리로 아빠에게 달려갔다.
"너 얼굴이 왜 이래? 학교에서 싸웠어?"
유정은 순간 냅다 아빠에게 달려간 것을 후회했다. 싸웠다고 혼나면 어쩌지?
"이겼어?"
아빠의 질문은 조금 색다르게 느껴졌다.
"그 녀석은 너보다 더 많이 다쳤겠지?"
유정은 나오려던 눈물이 쏙 들어가버렸다.
흥미로워하던 아빠의 얼굴은 빠르게 굳어졌고
"약해빠진 새끼. 기지배같아가지고. 그럴 줄 알았다."
그는 유정이 걸리적거린다는 듯이 밀치고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덩그러니 남겨진 유정과
아무렇지 않게 유정의 귀를 내리치는 저녁식사 준비하는 소리.
어린 유정은 먹먹해진 가슴을 부여잡고
왜 가슴이 이렇게 답답하고 아린지 혼란스러워 했다.



부웅..
창백해보이는 하얀 얼굴에 칙칙한 눈가,
생기없는 갈색빛 머리가 찬 바람에 힘없이 나부낀다.
옆에서 같이 버스를 기다리는 여자보다 키는 훨씬 더 큰 유정이지만
여자보다 몸무게가 훨씬 더 가벼워 보인다.
그럼에도 유정의 어깨와 손에는 종이와 여러 도구가 담긴 가방이
잔뜩 엉겨붙어 있다. 겹겹이 껴입은 옷을 힘겹게 여미며
학교로 가는 버스가 오는 지 확인하는 유정.

퍽!
물감때가 묻은 붓과 재료들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남자는 유정을 치고 지나가 택시를 잡아 탄다.
유정이 남자를 쳐다보자 남자는 유정을 위 아래로 살피더니
아무렇지 않게 택시에 올라탔다.
"아니 저기요.."
유정은 욕을 삼키고 얼른 재료들을 주워담았다.
자신보다 훨씬 다부진 몸, 사나운 눈빛, 말이 통하지 않을 것같은 아우라.
유정은 갑자기 그의 아버지가 생각난듯 좌우로 고개를 흔든다.
마치 생각을 털어버릴 수 있다는 듯이.

유정은 20살이 되기 전에 딱 한 번,
부모님과 함께 서울에 있는 미술관에 간 적이 있었다.
방학이었고 방학 숙제 중에 여러가지가 있었지만
유정은 아빠와 엄마에게 미술관에 갔다오는 것이 방학 숙제라고 콕 집어 말했다.
아빠에게 말하면서 얼마나 가슴이 두근거렸는지 모른다.
그런데 미술관에 갔던 그 날,
아빠에게서나 느끼던 기분나쁜 두근거림에 자주 가슴을 부여잡던 유정은
황홀경에 요동치는 두근거림을 처음 경험하게 되었다.

활기차게 날아다니는 색의 향연, 색이 발라진 캔버스 위의 그 질감이
어린 유정의 몸에 닭살이 돋게 했고, 유정의 눈에 가득 들어차
시끄러운 미술관에서 다른 차원으로 이동한 것같은 그 느낌은
처음으로 유정에게 해방감, '자유' 를 맛보게 해주었다.

유정은 아버지의 말이 자신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할 때마다 그 그림을 떠올렸다.
그러고 나면 공부도 할 수 있고, 그림도 그릴 수 있었다.
살아갈 수 있었다.

원했던 대학 입학에 성공했고 20살이 다가오자 유정은
며칠동안 밤을 새운 끝에 아빠에게 자취를 하고싶다고 말을 꺼냈다.
"...그래. 사내새끼가 이제 다 컸지."
아빠는 의외로 흔쾌히 유정의 자취를 허락해주었다.
유정은 온 몸에 힘이 빠졌지만 아빠 앞이었기에, 씨익 웃어보였다.
그날밤 유정이 방 안에서 몰래 숨죽여 얼마나 울었는 지 모른다.

그리고싶은 그림을 그리려면 다양한 재료를 써봐야 하는 것처럼
다양한 것들을 경험해보아야 했다.
미친듯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고,
지금은 대학 졸업 후에 어떻게 돈을 벌 것인지를 가장 큰 걱정거리로 생각하고 있다.
바로 작가로 데뷔하는 건 힘들겠지..
유정은 어렸을 때 봤던 '그 그림'을 떠올린다.
그런 그림을 그릴 수 있을 때까지.. 아직 멀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사물함 앞에서 낑낑거리며 짐을 꾸역꾸역 집어넣는 유정.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얼른 버스정류장으로 향한다.
"아, 맞다"
지나가려던 버스를 겨우 붙잡고 올라 탄 유정이
자켓 주머니에서 목줄이 달린 카드를 꺼내어 목에 걸었다.
오늘은 미술관에서 스태프로 아르바이트를 한다.
"위치도 좋고.. 크기도 꽤 큰가 보네. 이게 개인 전시관이라니.. 돈 많은가 보다."
옆자리 여자가 스마트폰을 보며 중얼거리는 유정을 흘겨보다가
창가로 눈을 옮긴다. 오늘 일할 미술관의 홈페이지를 살펴보며 감탄하는 유정.
홈페이지의 갤러리 카테고리로 들어가보는데, 아직 작품 사진은 올려져 있지 않다.
"좋겠다~"



검은 카라티가 조금 헐렁해보이는 유정은 배고픈 토끼처럼
층마다 돌아다니면서 마지막으로 작품의 디스플레이(전시,설치)를 확인했다.
곧있으면 전시관 오픈 시간이다.
"저기!"
복도 저 끝에서 또각거리는 날카로운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분명 높은 구두는 아닌데.. 새빨간 입술 주변에
보톡스로 자연스럽게 자리잡힌 주름, 인위적으로 윤기가 나는
붉은 갈색빛의 칼단발이 찰랑거리며 다가온다.
존재감이 강한 사람이네, 유정은 다가가지 않고 제자리에 서서
그녀가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 칼단발의 여자는 단정해보이지만
고급스러운 블라우스와 슬랙스 차림이었다.
"이거. 저 그림 아래에 두세요."
도슨트는 아닌가 보네. 여자는 장미가 가득한 꽃다발을 내밀었다.
유정이 손을 뻗어 꽃다발을 건내받았는데
꽃다발 사이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
"뭐 해요?"

쑤욱_
손이었다.

장미 꽃다발 한가운데에서 손이 튀어나와
유정의 얼굴을 감쌌다.
유정은 너무 무서워 그대로 눈을 감았고

몸이 붕 떴다가 무겁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무거워진 눈꺼풀을 겨우 떴을 때, 복도에는 장미 꽃다발도 칼단발의 여자도 없었다.

"보여?"

유정이 소스라치게 놀라 뒤를 돌아보니
훤칠하게 잘생긴 남자가 기분나쁘게 웃고 있다.


악마같아.

심장이 두근거렸고 박동소리에 맞추어 머리가 울리면서
극심한 어지러움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대단해...!"
"멋져.. 감동적이야"
"슬퍼.."
장미 꽃다발을 두라고 했던 자리의 캔버스 앞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웅성거리면서도 캔버스 앞에서 좀비처럼 울부짖었다.
잘생긴 남자는 그런 사람들을 보며 더욱 더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유정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캔버스를 다시 한번 살폈다.



어?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어..!"

뚝.

사람들의 소리도, 남자의 웃는 얼굴도 갑자기 사그라들었다.
유정은 가슴에서부터 뜨거운 열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열은 어지러운 머리를 더욱 힘들게 했다.
"캔버스는... 텅.. 비었잖아..!"
텅 빈 캔버스 앞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잘 보이지않는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캔버스처럼 하얗고 아득하게만 보인다.

그 중에서 울고 있던 여성 하나가 앞으로 나와 유정에게 다가온다.
여자가 유정의 뒤로 가더니 유정의 머리를 잡아 내리며 유정을 무릎꿇게 한다.
엄청난 힘이었다. 어지러운 상태의 유정이 아니더라도
여자를 제압할 수 없을 것만 같은 힘이었다.
"끄으...으으으윽...! 으으으윽!!"
무릎꿇린채 열이 잔뜩 올라 숨을 헐떡이고 부들거리는 유정 앞으로
기괴한 웃음을 짓던 남자가 다가왔다.
"너.. 보이지 않는다고?"
남자의 얼굴이 코앞에 들이밀어졌다.
유정은 바닥에서부터 불길이 몸으로 옮겨붙는 듯한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이상하네, 너..."
남자가 유정의 얼굴에 손을 대자, 얼굴의 모든 혈관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온 몸에 불이 붙어 혈관들이 몸 밖으로 탈출하려는 것같았다.
"끄으으으으으으윽..!!!"
부들거리던 유정은 더이상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초록색의 무언가가 눈 앞에 아른거리기 시작했을 때,
유정은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고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꼈다.


몸을 감싸던 것은 불길이 아니었다.
억센 줄기들이었다.




"헉!"

유정은 가슴을 부여잡고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복도에는 희미한 잡음이 울리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각잡힌 정장차림의 여자가 중단발의 머리를 뒤로 깔끔하게 묶어 재껴
자신의 날카로운 인상을 더욱 도드라져 보이게 했다.
여자는 유정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손에 있던 무전기를 들어
'오픈하세요'라고 말한다.
"아우~ 정말!! 깜짝 놀랐잖아!"
붉은 머리의 칼단발 여성이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를 질렀다.
"일어나실 수 있으세요?"
정장을 입은 여성은 무전기를 뒷주머니에 넣고
초췌해진 얼굴의 유정에게 손을 내밀었다.

흠칫,

여성의 손은 징그럽고 큰 흉터가 가득했다.

여성의 가슴팍에는 'Security : 연주'라고 쓰여있다. 미술관의 경비원인 듯하다.
유정은 놀라지 않은 척 한 박자 늦게 연주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꽃다발받자마자 갑자기 쓰러졌어."
칼단발의 여성은 유정이 쓰러진 후 많이 놀랐는지
엉망이된 머리를 정리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혹시 꽃 알러지가 있으신가요?"
유정은 연주의 물음에 바닥에 떨어져있는 장미꽃다발을 보며 어리둥절해 했다.
"아뇨.."
"음.. 관장님, 아무래도 이분 병원에 가셔야할 것같습니다. 혹시 모르니까요."
"그래, 갔다 와."


"왜 여기 있어?"
칼단발의 여자 뒤에서 여자 아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연화야..!"
"관장님 지금 1층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어, 어.. 지금 가려고. 알바생 하나가 갑자기 쓰러져서.."
칼단발의 여자는 연화라는 여자 아이에게 쪼르르 달려가
조심스럽게 상황을 설명했다.
유정은 머리를 감싸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얗다.

모든 캔버스가 비어있다.

유정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머리를 얻어 맞았을 때처럼 마구 흔들렸다.
"저기요"
낮은 남성의 목소리가 침식해 들려온다.

"저기요, 유정씨."
두껍고 큰 손이 유정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정신을 차리려고 남자의 손에서 남자의 얼굴로 눈을 옮기는데

정신을 잃었을 때 봤던 그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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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2-07 18:04 | 조회 : 1,360 목록
작가의 말
nic62162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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