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그림의 작가

"연주씨는 관장님이랑 전시회 계속 진행해주세요."
유정은 지금 눈 앞에 보이는 차분하고 냉정한 남자의 모습을 보면서
기괴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남자의 모습이
현실이 아니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는지,
쓰러지지 않고 자리에 계속 서 있을 수 있었다.

"성현씨, 그럼 부탁해."
미술관 관장은 연주의 무전기 소리를 들으며 서둘러 함께 1층으로 내려 갔다.
"꽃이 다 엉망이 되었네."
검고 긴 생머리를 한 여자 아이는
오밀조밀 귀여운 생김새와 달리 만만치 않아보이는 분위기를 풍겼다.
여자 아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성현이 바닥에 흩어진 꽃다발의 잔해를 모아 벽쪽으로 치웠고
유정은 여자 아이가 매섭게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겨우 외면해야 했다.
"연화 미술관에서 일하고 있는 직원입니다.
저랑 같이 병원에 가서 이상 없으신지 진료 받아보시죠."
이마를 드러내고 단정하게 정리한 짧은 머리와,
시원시원한 이목구비에 넓은 어깨, 훤칠한 키..
성현이라는 사람은 같은 남자인 유정이 봐도 멋진 남자처럼 보였다.

유정의 귀에 성현의 낮은 목소리가
차분하고 절제된 그의 표정처럼 편안하게 들릴 정도로 말이다.

"성현."
여자 아이가 손짓으로 성현을 불렀다.
성현은 여자 아이에게 다가가 여자 아이의 키에 맞춰 최대한 몸을 낮췄다.
여자 아이는 성현에게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 속삭이는 듯했다.
연화 미술관이라고..? 저 여자 아이를 연화라고 부르지 않았었나? 작가의 딸인가?

유정은 빈 캔버스가 가득한 복도를 한번 더 둘러보았다.

"가시죠."
사람들의 소리가 미술관을 가득 채울때 즈음, 성현과 유정은 미술관을 떠났다.
유정은 병원으로 향하면서 혼란에 휩싸였다.

미술관을 나가면서 본 모든 사람들이
캔버스 앞에 서서 그곳에 무슨 그림이 있는 것처럼 감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열이 나셨다구요?"
고급스러운 벽지와 조용한 방 안. 나이 지긋한 의사가 유정을 살펴 본다.
"쓰러지셨을 때, 열이 많이 나시고 몸을 떠시더라구요."
"음... 특별히 알러지같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다만..
환자분, 영양상태가 별로 좋아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의사는 링거라도 맞고 가라며 창백하고 얇은 유정의 팔목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어느새 소매가 올라가 있었던 유정의 팔목에는
파스만큼 큰 거즈가 붙어 있었다.
유정은 얼른 소매를 내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유정이 서둘러 진료실을 나가려 하자
뒤에서 성현이 정중하게 의사에게 인사하고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늘 감사합니다, 김 선생님."
"아닙니다, 성현 선생. 근데 저 환자..."
재빨리 밖으로 나온 유정은 안에서와 달리
문 밖에서 떠나지 못하고 귀를 쫑긋거리고 서 있었다.

하지만 곧바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고
깜짝 놀란 유정은 무작정 병원 밖으로 나가기 위해 빠르게 걸었다.

턱!
"히익!"
유정의 몸이 너무 가벼워 성현이 유정을 붙잡자 마자,
유정의 몸이 성현쪽으로 요요처럼 돌아와 버렸다.
"유정씨, 진료비는 저희 회사에서 부담하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시간 괜찮으시다면
저희 작가님과 얘기 좀 나눠보실 수 있을까요."
"네?"
성현은 유정의 팔이 부러질 것만 같아 조심스럽게 놔주었다.
"작가님께서 유정씨와 얘기를 나눠보고 싶다고 하셔서요."
"작가님...?"
"아까 보셨던 연화. 그 아이가 저희 미술관 전속 작가님이십니다."
작가의 딸이 아니라 그 여자아이가 개인 미술관의 오너라고?
부러움도 잠시, 텅 빈 캔버스들이 생각나면서
유정은 소름끼치는 느낌에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 그 전에.."
성현은 진지한 표정으로 유정의 팔을 다시 감쌌다.





레스토랑에는 고소한 음식냄새 사이에 향긋하고 따듯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유정과 성현을 갈라놓은 큰 테이블 위에는 다양한 음식들이 가득 차려져 있다.
파스타, 스테이크, 샐러드, 한번도 못 본 음식들 모두.. 하나같이 맛있어 보인다.
"골고루 많이 드세요."
식사라도 하고 가시죠, 라는 말이 이렇게나 대단한 것이었다니.
예쁘게 반짝거리는 식기들과
맛깔스럽게 윤기를 내고 있는 음식들을 보고 있어서 인지
유정의 눈동자가 매우 빛나고 있었다.
"자, 잘먹겠습니다.."
설마 나도 돈 내야하는 건 아니겠지?
불안한 마음에 멈칫거리는 유정을 보던 성현이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종업원을 불러 왼쪽에 있던 영수증과 함께 카드를 건냈다.
"유정씨,"
한결 마음이 편해진 유정이 수프를 한 숟가락 떴다.
"빨리 드셔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작가님이 곧 주무실 시간이에요."
"...켁! 켁켁! 쿨럭!"
가야겠네.. 유정은 양 손에 포크와 나이프를 쥐고 스테이크로 곧장 달려들었다.


검고 잘 빠진 차. 세미정장 차림에 잘생긴 성현과 잘 어울린다.
검은 색 카라티에 소스가 묻었는지 뒤따라 나온 유정이
차 옆자리에 바로 타지 않고 옷을 털어내며 늦장을 부린다.
성현은 말없이 차에서 물티슈를 꺼내 유정에게 다가가 건냈다.
유정이 탈 옆자리 문까지 열어주었다.
유정은 성현이 차 문을 열어주면서 남기고 간 시원하면서도
가볍지 않은 성현의 냄새덕분인지 오늘 하루 중에서 가장 편안한 상태가 되었다.
"○○대학교에서 아르바이트 지원하셨던데, 미대생이세요?"
"아, 네.."
배가 부르고 차 안이 따듯하니 유정은 살짝 나른해지려 했다.
부드러운 성현의 운전실력에 유정의 눈꺼풀이 껌뻑, 느리게 감겼다.
"저희 작가님 그림 어떤가요?"
번쩍.

유정의 눈꺼풀이 활짝 떠졌다.
"연화.. 연화 작가님.. 그림이요?"
텅 빈 캔버스가 줄줄이 늘어서 있는 복도가 머릿 속으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좋.. 좋던데요."
"....."

어느새 깜깜해진 미술관 앞에는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만 있었다.
유정은 성현과 함께 머릿 속에서 펼쳐졌던 파노라마 속으로 직접 들어갔다.
"저희 미술관 6층에 연화 작가님 작업실이랑 사무실이 있어요."
유정은 성현의 보폭이 커서 엘레베이터로
빨리 향할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유정씨?"
다시 유정의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6층에서 엘레베이터 문이 열리자 어지러움은 냄새처럼 짙어졌다.
"으으.."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자신을 걱정하는 성현의 얼굴을 보니 유정은 다시 머리가 괜찮아지는 것같았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문 앞에 다다라 성현이 노크를 하자
그 노크 소리가 유정의 머리에 새겨지듯 울려퍼졌고
성현이 문을 열어젖히자
안쪽의 빛이 유정의 눈에 가득 들어와 빛이 부서지면서
온갖 색들이 허공에 날아다녔다.

아..

색들은 자유롭게 날아다니면서도 무언가 말하는 듯 하였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여자 아이가 있었고

이 느낌은..

유정은 어린시절로 돌아가 ''그 그림'' 앞에 서 있는 것같았다.

털썩_

"유정씨!"





살갗이 까칠해진 것이 느껴지자 유정이 눈을 뜰 수 있었다.
방 안이 어두워 잘 보이지 않지만
스산하고 날카로운 공기가 감도는 게, 새벽인 듯하다.

방 안이 대충 보일 수 있을 정도로 밝혀진 무드등이
유정의 시야를 밝혀주기 시작했다.
하얀 배게와 두터운 이불을 젖히고 일어나 주위를 좀 더 살펴보았다.
누군가가 쓰던 방같은.. 병원은 아닌 것같다.
"일어났어요?"
깜짝, 성현이 방 안의 어둠 속 어딘가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아.. 죄송해요. 그때처럼 갑자기.."
"괜찮아요. 여기는 미술관이에요. 6층에 작업실 옆에 있는 다락방입니다."
이렇게 좋은 침대와 예쁜 인테리어를 갖춘 다락방이라니,
유정은 자신이 사는 칙칙한 단칸방을 떠올렸다.
"그럼 여기.. 연화.. 작가님이 쓰시는 방 아닌가요?"
헉, 얼른 일어나려는 유정을 성현이 다가와 진정시켰다.
"가끔 작업하시다가 밤을 새시면 쓰는 방이긴 하지만.. 자주 쓰시지도 않으세요.
오히려 상담받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에 더 가깝죠."
"상담이요..?"
"저는 연화 작가님의 심리상담을 도와주고 있어요.
의료적인 처치도 어느정도 할 수 있구요."
"와.. 그렇군요.."
돈 많은 사람들이 담당 의료인을 데리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겠구나 싶었고,
성현의 부드러움에 이미 진정된 유정은
성현에게 참 잘 어울리는 직업이네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유정씨 쓰러지고 나서 몸은 괜찮다는 걸 확인했지만,
유정씨의 마음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어요."
"네?"
"유정씨, 팔에 그 상처들에 대해서 누군가와 말해본 적이 있나요?"
유정의 팔에 있던 거즈가 떼어져 있어
그 얇고 볼품없는 팔 안쪽에 층층히 새겨진 흉터가
무드등 빛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유정은 오늘 병원에서처럼 빨리 소매를 내리려했지만
아무렇지 않게 대답을 기다리는 성현과 눈이 마주치면서
천천히 소매에서 자신의 흉터로 손을 옮겨 흉터를 매만지기 시작했다.

한 흉터는 최근에 아물기 시작했는 지, 얇은 딱지가 느껴졌다.
유정은 흉터가 생기게 된 상황이 떠올라
목구멍까지 하고 싶은 말이 맴돌았지만 꿀꺽, 여느때처럼 잘 내려보냈다.
"저는 상담받을 생각.. 없어요."
성현과 다시 눈이 마주치면, 자신도 모르게 모든 것을 말해버릴 것만 같아
유정은 아예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 일어나려 했다.
"그럼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서 얘기해 보는 건 어떨까요."
성현이 침대 옆으로 의자를 끌고 와, 유정의 가까이에 다가와 앉았다.
"몸에는 아무 이상이 없는데, 너무나도 고통스럽게 두번씩이나 쓰러지셨어요."

고통스럽게..?

유정은 쓰러지던 순간들 속에서 뜨겁게 올라오던 달콤한 향이 기억났다.

그것은 가슴 깊숙한 곳에서 꿈틀거리다가
달콤한 냄새를 풍기며 올라와 정신을 아찔하게 만들었다.
처음엔 두려워서 끔찍한 기억처럼 느껴졌지만 그 여자 아이,
연화를 보았던 그 순간에는 그 달콤한 것이 완전히 퍼지면서
그 때 ''그 그림''을 봤을 때처럼 황홀하게 만들어주었다.

온 몸이 환희에 차 더이상 버틸 수 없었다.

"정말 좋아하는 그림이 있는데, 꼭 그 그림을 본 것처럼 기분이 좋았어요.
그 그림을 본지 꽤 오래되었어서,
처음 봤을 때 그 느낌을 나도 모르게 잊고 있었나 봐요.
그런데 오늘 그 그림을 처음 봤을 때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처음에는 소름이 끼치고 두려웠지만
두번째로 봤을 땐.. 그 그림을 봤을 때 받았던 느낌이라는 걸 알 수 있었어요.
..스탕달 신드롬 같은 걸지도 모르겠네요."
(스탕달 신드롬 : 뛰어난 미술품이나 예술작품을 보았을 때
순간적으로 느끼는 각종 정신적 충동이나 분열 증상_출처:두산백과)


유정은 ''그 그림''을 보고 난 후부터
자신이 스탕달 신드롬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지만
성현의 앞이기 때문에 멋쩍게 웃으며 말을 끝내버렸다.

"두번째로 봤던 건, 그림이 아니라 연화 작가님 아니었나요?"
"아, 그러게요. 그런데 이미 6층에 올라오면서 점점 어지러웠고,
작가님 계신 방 문이 열리면서 빛이 쫙 들어왔는데..
그 가운데에 서있었던 작가님과 그 광경이 마치.."

"''그 그림'' 같았나요?"

"네. 이상하네요.. ''그 그림''은 여자 아이가 그려진 그림이 아니었는데.."
유정이 살짝 성현의 얼굴을 확인했는데 성현이 미심쩍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이상한 말을 하고 있나? 나를 진단 하고 있는 건가?
유정의 머리 속도 성현의 표정처럼 복잡해져 갔다.

"...''그 그림''을 그린 작가의 이름이 무엇인가요?"
유정은 자신있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목소리가 콱, 막히고 혀가 움직이지 않았다.

머리 속에 떠오르는 이름이 있는데

아니야 그건. 그건 그 작가의 이름이 아닌데?

"연...화..."
자신도 모르게 뱉어낸 이름은 유정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마치 도움을 요청하듯 유정이 성현을 바라보았는데,
의외로 성현의 표정은 예상했던 말을 들은 것처럼 정리되어 있었다.

"''그 그림''이 정확히 기억나나요?"
유정이 대답하려 하는데 또 목이 막혀 왔다.
"괜찮아요, 유정씨. 무리하지 마세요.
느낌이 남아있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니까요.
''그녀''는 잊혀진 사람이에요.
아, 유정씨가 있으니 아직도 잊혀져가는 중이라고 해야겠네요.
''그녀''를 기억하고 있던 사람들은 이제 ''그녀의 그림''을 떠올리기도 힘들어요.
더이상 ''그녀의 그림''을 볼 수도 없는데 말이죠.."

성현은 유정을 상담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정말 순수하게 질문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연화로 새롭게 태어났어요.
그러면서 놀랍게도 온 세상이
''그녀''가 마치 오래전에 죽은 사람인 것처럼 잊어버렸죠."
성현의 표정은 슬퍼보였다. 성현이 ''그녀''라고 말할 때마다
유정은 ''그 그림''을 그린 작가의 이름이 생각날 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끝내 연화라는 이름말고는 내뱉을 수가 없었다.
"새롭게 태어났다는 게 무슨 말인가요? 연화, 그 아이가 그.. 그 분의 딸인가요?"
"아니요. ''그녀''에요. 연화가 바로 ''그녀''에요."
"무슨 말이에요? 그 분은 지금쯤 최소 마흔은 넘으셨을 거에요."
성현이 유정의 손을 덥썩 잡았다.

유정이 성현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만큼 성현이 가깝게 달라붙었다.
"''그녀''에 대해서 많은 걸 기억하나보군요..!"
달콤한 숨결.

유정은 이 달콤한 숨결이 어디로부터 나오는 지 알고 있었다.
익숙하고도 소름끼치는 이 달콤함이 유정과 성현을 잇고 있다.

"연화의 그림이 보이나요?"
정신이 아찔해진다. 흰색의 파노라마, 뜨거운 달콤함.

"아니요..."
유정에게 거의 매달리다시피 붙잡은 손이 살짝 떨렸다.
유정이 좋아하는 성현의 날카롭지만 깊은 눈매 주위가 서서히 붉어지고
물기가 감돌았다. 그 조각같은 얼굴에 뜨거운 눈물이 또르르 굴러 떨어졌다.

"''그녀''의 그림이 제 인생을 바꿨어요."
명료했던 성현의 목소리가 애달프게 변했다.
유정은 성현이라는 남자에게서
절대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모습을 본 것에 가슴이 뛰었지만
가슴이 뛰는 가장 큰 이유가 성현이 한 말 때문임을 곧 깨달았다.

자신이 늘 되뇌었던 말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녀''의 그림을 볼 수가 없어요."
성현의 얼굴이 구겨지면서 유정의 가슴팍으로 파묻혀졌다.

성현이 엄청나게 고통스러워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의 그림이 되기로 했어요.."

유정은 성현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지만,
일단 성현을 위로해줘야겠다는 생각에 ''그 그림''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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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2-07 18:21 | 조회 : 1,212 목록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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