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도 때가 있어(2)

그리하여.
끌려가게 된 곳은 경비대가 아니라 웬 쓰레기 장이었다. 거대한 통나무와 철골들, 가만 보면 쓰레기라기 보단 어떤 기구의 잔해 같았다.
그렇다고 해봐야 중구난방으로 겹겹히 쌓여서 방치되어 있으면 쓰레기인건 매한가지지만.

"다 왔다. 이 안으로 들어가면 돼."

퉁명스럽지도 친절하지도 않은 어조.
위병은 그렇게 말하고는 나와 에반젤린을 내버려두고 제 길을 떠나려 하고 있었다.
아무런 설명 없이 댕그러니 남겨져버리게 된 나는 황급히 그들을 불러세웠다.

"아니 잠깐만요. 여기가 어딘데요?"

갈 땐 가더라도 어디로 끌고왔는진 알려주고 가야하지 않은가. 그것이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했지만.

"뮤리엘 비셔스 경께서 계신 곳이다."

내가 받은 답은 그것뿐이었다.
다른 부연 설명없이 명확하게 콕 집어 말해준 것일테지만 그러니 되려 더 혼란스러워졌다.
중앙기사단의 어디서 온 건진 몰라도 일반적인 말단 기사는 아닌 거 같은데 지금 눈앞의 집, 이라고 해야할까. 저택이라고 하기엔 좀 모자란 곳에서 지낸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중앙기사라면 못해도 하늘그림보다 다섯 배는 좋은 숙소도 충분히 구할 수 있을텐데.

"꽤나 파격적인 가드닝이네요. 그 비셔스 경이라는 분은 전위적인게 취향이신 걸까요?"

에반젤린이 입술을 말고 감탄의 탄성을 내질렀다.
좋게 좋게 생각하는게 너도 좋고 나도 좋은, 우리모두가 좋은 일이긴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었다.

"이게 무슨 가드닝이야. 그냥 방치지."

방치도 이런 방치가 없었다.
이 정도면 일부러 어지른 수준이다.

"잘 보면 나름대로의 규칙성이 느껴지는 걸요? 보세요. 저기 저 기둥이 어떻게 저렇게 서있을 수 있을까요?"

에반젤린이 가리킨 목재 더미 위엔 나무 봉 하나가 우뚝 서 있었다.
규칙성이라...
어쩌면 우리 둘 중 하나는 규칙이라는 단어를 잘못 배운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건 그렇고 그냥 이대로 계속 가도 되는거야?"
"음... 그래도 이 잔해들이 은근히 길을 만들어 주는 거 같지 않나요?"

확실히 에반젤린이 말한대로 잔해더미는 묘하게 구불구불한 길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꼭 숲의 오솔길처럼, 당장 지나가긴 해야하니 설렁설렁 치워낸 흔적이 남아있는 형태다.

지금은 그걸 사람이 왕래했다는 증거로 삼고 싶었다. 그래야 그냥 쓰레기라고 부르기엔 좀 과한 잔해 더미를 지나가는 것에 끝과 의미가 있을 거라고 믿을 수 있지.
하다하다 이제는 돌덩이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여긴 뭘하는 곳일까.

그래 대체 뭘하는 곳일까.
여태 한 줄이었던 길 앞에 갑자기 두 갈래 길이 나타났다.
그건 이상한 일이었다. 왜 두 갈래 길이 나오는 걸까.
필요없잖아, 이거.

"어느 쪽으로 가야할까요?"

갈래 앞에서 멈춰선 에반젤린이 말했다.
나에게 묻는다 한들 옳타구나 정답이 떠오를 일은 없었기에 대답은 뒤통수 긁는 것으로 대신하고 우선 관찰을 해보기로 했다.
처음 온 사람들을 위한 나름대로의 이정표가... 뭔가 쓰레기를 옮겨 표시를... 하다못해 나뭇가지라도 하나 꽂아 놓는...
단서 따위는 하나도 없었다.
이러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나는 근처를 둘러보며 적당한 길이의 나뭇가지를 찾았다. 워낙 이것저것 많은 곳이라 그리 오래걸리지는 않았다. 심지어 깨끗하게 닦인 가공된 나뭇가지를 주웠다. 그런 다음엔 그걸 에반젤린에게 쥐어주었다.

표정만으로 의문을 표하는 에반젤린.

"저번처럼 나뭇가지 한 번만 넘어뜨려주라."

검증된 방법이 있는데 굳이 돌아갈 필요가 있는가.

"레이크 님. 사람을 물건처럼 취급하는 건 나쁜 버릇이에요."

에반젤린은 고개를 저으며 나뭇가지를 사양했다.

"아니, 내가 언제 그랬어."

나는 다시 나뭇가지를 들이밀었다.
그냥 한 번 해달라는 것뿐인데.

"제 이름은 마법의 나침반이 아니랍니다."
"비슷하게도 그렇게 부른 적 없잖아."

"저희도 레이크님을 랜턴이라고 부르지는 않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언제 마법의 나침반이라고 그랬냐고."

"게다가 그렇게 말씀하셔도 그 기술은 1년에 한 번밖에 못 써요."
"그거 필살기야? 사제가 되면 성당에서 그런 거 익히는 거야?"

거기에 쿨타임이 1년이나 되다니 어딘가의 표현을 따오자면 가히 인과율을 망가뜨릴 수 있을 정도의 기술이 아닐까 싶다.
그래, 에반젤린도 저렇게 말하긴 하지만 그건 분명 농담일 것이다.
괜히 막대기 썼다가 우연찮게 방향이 뒤로 잡히면 거꾸로 집에 되돌아가기라도 할 건가...
어?

"그냥 집에 갈까?"

어느샌가 생각은 그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딱히 비셔스 경하고 계약서를 쓴 것도 아니니 내가 이런 대우 받아가면서 꾸역꾸역 찾아갈 이유가 없었다.
비록 비셔스 경이 어림잡아도 꽤 높은 지위의 사람이고 그 사람의 말을 멋대로 거역했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지만은 그건 날 소개한 기옌 경도 마찬가지였다.

근면성실히 열심히 살아가는 기사 한 명의 출세가도를 막아버린다면 동네 백수의 인생 하나쯤 희생해도 딱히 가격대비 효율이 떨어지진 않는 거 같은데...

"그러다가 꼬투리 잡혀서 경비대에 잡혀가셔도 전 어떻게 못해요?"
"갑자기 너무 현실적으로 얘기하지마. 무섭잖아."

기옌 경이 내 철천지 원수라면 모를까 이왕이면 둘 다 사는 게 낫지.

"안 그래도 일 거리가 필요하다고도 하셨고요."
"그건 그렇긴 한데..."

괜히 애꿎은 손톱만 물어 뜯었다.
이럴 거라면 그냥 아무대나 한 곳 골라 잡아 가보는 거였는데 한 번 걸음을 멈추자 이렇게 하기도 저렇게 하기도 뭣한 상황에 빠져 전진이 아예 멈춰버렸다.

비셔스 경의 목소리가 들린 건 에반젤린이 내가 손톱을 물어뜯는 손등을 때려 그만하게 만들었을 때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겁쟁이였네."

예고없이 들어오는 언어폭력에 발끈하여 돌아보니 어제와 같이 승마복 차림을 한 뮤리엘 비셔스 경이 있었다.
뒤에서 나타난 그 사람은 천천히 걸어와 여유롭게 인사를 건냈다.

"약속한대로 왔구나. 레이크 아이힐데른. 오늘은 좋은 날니다. 그리고 이쪽 사제님은..."

대체 언제 약속한거냐고 따져 묻지는 않았다.

"에반젤린이라고 해요. 안녕하세요... 뮤리엘 비셔스 경 맞으시죠?"

"그래요. 만나서 반가워요, 사제님."

비셔스 경은 미소까지 지으며 승마용 장갑을 벗어 주머니 안에 우겨넣었다.

"그 나이 먹도록 양 갈래 길이 무서우면 집은 어떻게 돌아갈텐가?"

그리고는 또 여린 내 마음을 찔렀다.

"돈 많이 벌어서 마차타고 갈건데요."

대답이 조금 삐딱선을 탄 건 덥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랬다.

"아하하. 그런데 그 말을 지키려면 우선 이 갈림길부터 해결해야 할거다."
"그럼..."

"내가 알려 줄 거란 기대를 하는 건 아니겠지?"

비셔스 경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것인지 내 말을 사전에 잘라먹었다.

"애초에 설명도 없이 이런 곳에 데려다 놨을 때부터 그런 건 털끝 만큼도 기대 안 했거든요?"
"좋아, 마음에 드는 대답이야. 그래서 어떻게 할 건가?"

"여신님한테 빌어야죠!"

나는 그 때까지 버리는 걸 잊고 있었던 나무막대를 땅에 짚었다. 그리고 땅이 파일 정도로 돌려 비비며 빌었다.
제발제발제발 부탁드립니다. 제발...!

손을 놓자 나무 막대기는 평범하게 오른쪽으로 쓰러졌다.쓰레기 더미의 산이 있는 그 방향이다.
음... 1년에 한 번 밖에 못 쓰는 기회가 이렇게 날아갈 줄이야.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이왕 만났으니, 그 시킬 일이라는 거 지금 알려주시면 안 되요?"

문득 그 사실을 알아차린 나는 곧장 비셔스 경에게 물었다.

"아하하, 그건 관사에 도착하면 알려줄 테니까 걱정말아."

비셔스 경은 웃음과 함께 질문을 밀어버렸다.
그렇게 나오신다 이거지. 이제와서 또 막대기를 쓰는 것도 우스우니 두 길 중 하나를 고르는 수밖에 없는데...
그런 이지선다의 행운에 맡기는 수밖에 없는건데...

틀리고 싶지 않았다.

그건 일종의 오기였다.
비셔스 경이 저런 식으로 나오니 뻔한 선택을 해서 뻔하게 틀리고 싶지 않았다. 나는 겁쟁이가 아니니까.

"그래서 어느 쪽으로 갈지 결정은 했나."
"막대기가 점지해준 곳으로 가야죠."

나는 막대기가 쓰러진 방향, 쓰레기 더미를 가리키고 말했다.

"음, 그래. 길을 모를 때는 높은 곳에 올라가서 먼 곳을 보는 것도 좋지. 나쁘지 않아. 네 선택을 존중하마."

비셔스 경은 먼저 오르라는 듯 잔해 위로 손을 뻗었다.
홧김에 지른 거긴 했지만 말을 뱉었으니 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돌무더기와 나무판자 위에 발을 올렸다.
영 발판이 못 미덥다.
한 서너 걸음 더 올랐을 때 나는 뒷 사람들이 잘 따라오나 뒤를 돌아봤다.

"그럼 사제님은 저랑 이쪽으로."

비셔스 경은 자연스럽게 에반젤린을 오른쪽 길로 에스코트하고 있었다.

"아니, 같이 가는 거 아니었어요?!"

나도 모르게 높으신 분한테 소리지르고 말았다.
내가 원래 성격이 이러지가 않았는데 최근에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은 모양이다.

"내가 왜 자네랑 같이 가나? 나는 고용주고 자네는 고용인인데."

비셔스 경은 비죽 웃었다.

"그냥 레이크 님도 같이 가는 게..."

그 와중에 에반젤린이 날 위한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다.

"아하하, 저것도 다 일에 포함되는 거니까. 급료를 받고 싶다면 저 친구가 알아서 해야죠."
"아...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에반젤린은 눈물을 삼키고고 결단을 내렸다.

"그럼 레이크 님 몸 조심하세요, 저 쪽에서 꼭 기다릴테니까 그곳에서 만나요...!"

누가보면 전란 속에서 뿔뿔이 흩어지는 가족인 줄 알겠네.

"왜 사람 사서 고생 시키는 거면서 어쩔 수 없다는 분위기를 내고 있는 거냐고!"

차마 비셔스 경에게 그렇게 말할 순 없어서, 잔해 속에 용케 깨지지 않고 살아남은 유리 창문에게 소리쳤다.

그렇게는 백날 떠들어봐야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기에 나는 쓸쓸이 내가 나아가야할 길을 바라보았다.

참 쓸데없이 험준하고 쓸데없이 높다.
한 내 키의 두 배가 좀 안 되려나.
그래도 실은 그렇게 위험하지 않아서 오르는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내가 오른 곳이 전체 중에 꽤 높은 곳에 속했기 때문에 이 이상한 공터의 전경도 어느정도는 그려볼 수 있게 되었다.

생각보다 더 넓은 곳이었다. 생각보다 쓰레기는 많지 않았고.
어쩐지 길을 만들기 위해 일부러 모아놓은 것도 같다.

그러니까 내가 가야하는 곳은...

관사. 비셔스 경은 그렇게 표현했다.
원래도 사람이 있을만한 곳을 찾으려고 했던거니 달라지진 않은 셈이다.
어디보자, 쭉 한 번 돌아본 결과 관사로 추정되는 건물이 보였다.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새 건물이었다.
아직 회백색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완전한 새 건물.
언듯 앞에 파고라 같은 것도 보인다.
하지만 먼저 간 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렴 어떠랴 방향을 알았으니 길이 험한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르고 내리고 오르고 내리고만을 반복하면 눈 깜짝 할 사이에 도착할 것이다.


오르락 내리락-

고향도 아니고 도시 소리 듣는 마을 안에서 등산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나는 겨우겨우 도착한 파고라 아래에 만들어진 나무 벤치에 몸을 뉘였다.

온 몸의 근육이 축 늘어져 진이 빠진다.
아마 지금 손바닥으로 누르면 다져놓은 생고기처럼 짓뭉개질지도 모르겠다.
손과 옷은 먼지 투성이에 땀에 절어 너덜너덜해졌고 옷이 젖어서 소매를 올리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러게 오늘 날씨가 좋아도 너무 좋았다니까...

그 강렬한 태양빛이 나무판자로 만들어진 파고라의 천장 사이로 스며들어왔다.
그마저도 조금 맞아보니 스며드는 정도가 아니라 내리찌르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눈을 감고 가만히 바람을 느끼고 있으니 조금씩 땀이 마르고 시원해졌다.

이제 앞으로 조금만 더 쉬었다가 관사 문을 두드려 봐야지. 그런 다음엔 얼른 일을 받고 얼른 헤치우고 얼른 집에가서... 아니 집에 갈 게 아니라 강가, 그게 아니라면 헤세가 있는 저수지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다.

상상 속의 행복, 그것만으로도 마음의 평안이 찾아온다.

그러나 그 행복은 곧 갈기갈기 찢어졌다.

"어머, 그러면 어마어마한 기사단의 어마어마한 단장님이신거네요?"
"아하하, 그 정돈 아니고."

응?
안에 있을 줄 알았던 두 사람의 목소리가 관사 반대방향에서 들리자 나는 눈을 뜨고 벌떡 일어났다.
잘못 들은 게 아니라 비셔스 경과 에반젤린은 정말 이제 오고 있었다.
그것도 한 손엔 헝겊을 기워만든 가방을, 다른 손엔 얼음과자를 들고서.

아니 누구는 태양에게 영혼을 빼앗기고 있는데 누구는 얼음과자!

"레이크 님! 레이크 님은 알고 계셨어요? 뮤리엘 경은 정말 대단한 분이셨어요!"

왠지 모르게 흥분한 에반젤린이 다가와서 묻고 있었다.

"아니. 몰라."

혼이 담기지 않는 대답을 넘어 비셔스 경이 천천히 걸어왔다.

"나태는 가장 큰 적이지. 거기서 뭐 하나? 도착했으면 들어가지 않고."

그 사람은 보란듯이 얼음과자를 퍼먹던 나무 수저를 입에 문 체 말했다.

"주인이 없는데 어떻게 들어가요오...!"

나는 성질아닌 성질을 내었다.

"아하하, 미안하게 됐어. 손님이 올 줄은 몰라서. 급하게 필요한 물건을 좀 사느라."
"아니죠. 저 데려오라고 공권력 썼잖아요. 오늘!"

그런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냐고!
하지만 정작 비셔스 경은 오른쪽 눈을 치켜 뜨곤 물고 있던 나무수저를 손에 쥐었다.

"자네가 왜 손님이야. 손님은 저쪽이지."

나무수저가 가리킨 건 에반젤린.

"나는 고용주, 자네는 고용인."

내가 오늘 어떤 취급을 받게 되는 건지 제대로 파악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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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2-20 07:37 | 조회 : 115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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