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고 싶었어(4)


"털뭉치가 말을 한다!"

얼마나 놀랐으면 생각이 여과없이 그대로 튀어나왔다.
빛나는 털뭉치는 성큼성큼 이리로 걸어오고 있었다.

"털뭉치라니."

털뭉치의 빛이 움직인다.
이상한 이야기지 않나싶어 자세히보니 빛나는 건 털이 아닌 랜턴이었다.
거기에 털뭉치도 단순히 진짜 움직이고 말하는 털뭉치가 아니라.

"지금 누구보고 털뭉치라고 하는게냐."

사람이었다.
키가 작고 튼튼해 보이는 남자는 랜턴을 얼굴의 높이에 맞추어 들었다. 구불구불한 곱슬 머리카락이며 눈썹이 턱수염과 더불어져 얼굴을 온통 가리고 있었다. 살이 보이는 부분은 광대와 볼정도.
이건 그냥 갈색 털뭉치가 맞다.

"아... 죄송합니다. 너무 놀라서요..."

하지만 어찌되었든 아니라고 하는 것 같으니 일단 사과부터했다.
그 남자는 꽤나 허름해보이는 가죽옷을 입고 한 손은 랜턴, 다른 손엔 커다란 철집게를 드는 털뭉치가 이 세상에 존재할까.

"내가 털뭉치인건 맞지만 그렇게 말하면 상처받아."
"아... 네..."

그래서 털뭉치라는 건가요, 아니라는 건가요.

"나는 자랑스러운 호쿠마의 자손, 쿤투아마다."

호쿠마라면....
뭐였더라, 어 그러니까, 온 몸에 강철을 두르고 머리가 셋달린 도마뱀, 드워프들의 창세신화에 나오는 지각의 수호자이자 용암으로부터 태어나 드워프의 시초가 되었다는 '이름 기억 안나는 인물'의 아버지.
이건 나왔으면 틀렸겠네. 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게 아니라 호쿠마의 자손이라고?
어!?

"드, 드워프?"

이종인을 실제로 보는 게 처음은 아니지만 나는 멍청이처럼 더듬더듬거리다 말을 제대로 끝맺지 못했다.
왕국에는 다양한 이종인이 살아가고 있지만 고향인 아이힐데른에서는 그 수가 많지 않았다, 미크로셀에서는 달리 여러 사람을 만날 일이 없었고. 새삼스럽지만 내가 바깥을 자주 돌아다니게 된건 요 최근의 일이었으므로 아직은 좀 신기했다.
그렇데도 외국인만큼은 아니지만.

"그래, 넌 인간이구나."
"아, 네, 뭐 그렇죠. 저는 레이크 아이힐데른이라고 합니다."

"아이힐데른? 그건 지명 아닌가? 특이하군."
"네, 그런 말 자주 들어요."

그 말대로 아이힐데른은 지명이다.
고아원의 이름이 아이힐데른 고아원이었으니 거기 아이들은 모두 성이 아이힐데른이다. 다른 곳도 그런진 모르겠지만 우리집은 그랬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사사롭게 통성명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이 문제.

"자네는 여기 무슨 볼 일로 온건가?"

그래, 쿤투아마씨가 말하듯 내가 도대체 어디에 온 것인지가 중요했다.
그것에 관해서 하는 이야기인데.

"지금 제가 온 걸로 보여요? 누가봐도 사고잖아요!"

나는 일부러 보란듯이 머리와 옷의 물기와 먼지를 털어내었다.

"뭐 요즘 애들은 일부러 멋있게 등장하기도 하니까."

구르고 엎어져 떨어지는 게 멋있는 등장이라면 오늘 일만으로도 난 금세기 최고의 멋쟁이였다.
그 정도로 온 몸이 쑤신다는 뜻이다.

"그것보다 여긴 어디에요?"

나는 드워프 아저씨에게 휘둘리지 않고 내 갈 길 가기로 했다.
한참 이래놓고서 여긴 저승이야 이러진 않겠지.
쿤투아마씨의 눈썹이 미세하게 들썩인다.

"여긴 내 공방이야."
"휴..."

솔직히 살짝 쫄아있었다.
아무리봐도 이 드워프 아저씨는 전사들이 죽으면 간다는 곳의 전령 같아보였으니까. 혹시나 내 수련경력을 높이 사 그곳으로 데려가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아주 조금, 정말 아주 조금 해봤었다.
하... 이런 택도 없는 소리는 그만하자...

"그렇게 있지 말고 따라오게. 확실히 자네가 말한대로 꼴이 말이 아니군. 그건 그렇고 그건 싼거냐?"

그러고선 쿤투아마씨는 내 바지를 가리켰다. 이제보니 바지 한가운데에가 특히 많이 젖어있었다. 이게 뭔가 싶어서 손에 묻혀 향을 맡아보니 방울 토마토가 터진 찐득찐득한 잔해였다.
...먹으라 때 먹을 걸. 그거 왜 안먹는다 그래가지고.

"아, 이건... 방울토마토 두 개가 주머니에서 터져서..."
"뭐? 네 방울 두 개가 터졌다고?"

"저기요, 왜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불구로 만드려고 그래요?"
"아무튼 따라오라고."

혀를 차며 고개를 젓던 쿤투아마 씨는 내 대답도 듣기 전에 랜턴을 들고 앞서 걷기 시작했다.

"잠깐만요, 제대로 알아들은 거 맞아요?!"

그리하여-
나는 쿤투아마씨의 공방에 초대받게 되었다... 라고 하기에는 조금 뭣한 것이 드워프의 공방이라고 하길레 거대한 용광로까지는 아니더라도 제대로 구색을 갖춘 곳을 상상했건만 이 곳은 그저 지하 공동에 모닥불을 피운 게 전부인 곳이었다.

아, 저쪽에 용광로 같이 생긴 뭔가가 있긴하네.

그렇대도 역시 대장간보단 하루 노숙을 위한 캠프 같은 곳이었다. 실은 그보다 더 열악한 것도 같다.

"자 거기 의자에 앉게."
"의자요?"

그런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기에 나는 쿤투아마씨에게 되물었다.

"거기."

아저씨는 다시 한 번 말하며 집게로 평평한 바위를 가리켰다.
뭔가 딴지를 걸고 싶었지만 괜히 투정부리는 것 같아서 잠자코 바위 위에 앉았다.

"미안하지만 수건은 없고 이거라도 마셔."
"아 괜찮아요. 별로 젖지도 않았고. 아무튼 고맙습니다."

쿤투아마씨가 따뜻한 음료를 건네주었다.

컵을 옮겨받는 순간 나는 그 무게에 놀랄 수밖에 없었는데 이 컵, 돌을 깎아서 만든 물건이었다. 수제인건가?
컵이야 어떻든 중요한 건 음료였다. 별로 젖지 않았다고 해도 역시 동굴 안인지라 좀 서늘해서 마침 따뜻한 음식이 생각났는데 감사할 따름이다.
하여 경건한 마음으로 그 음료를 들이켰는데 참 기묘한 맛이 났다.
짭짤하고 씁쓸하고 뭣보다 향이 좀...

"이거... 뭐에요?"

나는 마시기를 멈추고 물었다.
잠시 집게의 상태를 살피던 쿤투아마씨는 간단히 대꾸해준다.

"아 그거? 박쥐 똥을 달여서..."

푸후우읍!
나는 입에 머금고 있던 남은 음료를 쿤투아마씨의 얼굴에 뿜어버렸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만약 척수반사로 안뱉었으면 고의로 뱉을 생각이었다.

"뭐하는 게냐 이 자식아! 그게 얼마나 만들기 힘든건지 알아?"
"알고싶지 않았어! 이거 뭘로 만든건지 알고싶지 않았다고!"

자동으로 반말이 튀어나왔다.

"이 녀석이, 지가 물어봐놓고 딴 소리를 하네!"
"아니 먹일게 따로 있지 이런 걸 먹여요? 누구 독 올라서 죽는 꼴 보실라고?"

"임마, 이게 수염관리에 얼마나 좋은건데. 자기 전에 수염에 이렇게 발라주면..."

쿤투아마씨는 얼굴과 수염에 튄 음료도 아닌 뭔가를 손으로 문질러 고루 펴발랐다.

"심지어 먹는 것도 아니었어!"
"먹어도 되고, 발라도 되고. 여러모로 좋다고. 너도 나중에 나한테 고마워하게 될거다."

고마움이고 자시고 박쥐똥 먹어가며 건강한 수염을 가지고 싶지는 않았다.

"전 수염 안기를 거에요. 절대, 절대로! 이 나라 공주님이 수염 있는 남자가 좋다고 해서 국왕폐하가 수염 없는 놈은 모조리 사형 시킨다고 해도 절대 안기를 거라고!"
"에효, 이 멋을 모르는구만. 남자의 멋이란 수염에서 오는 농밀한 남성의 향기다."

그거 박쥐똥 냄새!
...됐다. 저런 이상한 아저씨한테 내가 무슨 말을 더 하겠나.
줬다고 홀랑 받아처먹은 놈이 잘못한거지.

"하아... 그런데 아저씨는 왜 이런 곳에 공방을 차리신 거에요?"

더 이상 수염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아 아무렇게나 던진 질문에 아저씨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졌다.

"아주 중요한 걸 물어보는구나."

쿤투아마씨는 화덕 같은 곳에서 불씨를 가져와 흑목석에 불을 피우며 내 앞에 앉았다.
아, 저거. 나도 집에 있을 때 가끔 땔감 대신에 쓰던 건데.

"지금부터 그 내막을 이야기 해줄테니 거기 앉아봐라."
"이미 앉아있어요."

"넌 참 불만이 많은 녀석같구나."

아저씨가 날 이렇게 삐뚤어지게 만든겁니다.
그보다 뭔가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았다.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이것저것 걱정거리들을 만들게 될 것 같은데.

"갑자기 알고싶지 않아졌어요."
"딱 보면 알겠지만 나는 실력있는 대장장이였다. 아주 큰 대장간의 수장이었지."

"아니 저기요..."

그래, 그러고보면 이 마을에서 내 말 귀담아 들어주고 존중해주는 사람은 에반젤린밖에 없었다는 걸 새삼 다시 느끼게 되었다.

"내가 만드는 무기나 도구들은 너나 할 것없이 최고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모두 자식처럼 만든 것들이야. 품질이 떨어질리가 없지."

누구누구가 째려보거나 말거나 쿤투아마 씨는 옛날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무래도 쿤투아마 씨는 드워프들 중에서도 꽤나 실력이 좋았던 편인 것 같다.
큰 대장간을 운영하고 동료들의 신망을 두루 받는다는 건 드워프에게 더 없는 명예라고 듣기는 했지만 실제로 스스로 가지는 자부심을 보니 듣기보다 더 대단했다.

"달이 아주 밝은 밤이었어. 우리 집은 창이 높게 달려서 그런지 달빛이 아주 많이 들어오지..."

아저씨는 그즈음 그 집을 본인이 직접 설계하고 지었음을 강조했다.
그걸 왜 말하는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여 비위를 맞추었다.

"아무튼 나는 달빛을 보며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양질의 물건을 만들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마침, 왠지 푸풉푸푸 버섯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밤이기에 밖으로 나섰지."
"저기 잠시만요, 선생니임. 죄송하지만 달빛에서 버섯으로 넘어가는 부분이 이해가 잘 안되는데요?"

듣는 학생이 열의를 보이니 선생님은 기꺼이 부연설명을 해준다.

"푸풉푸푸 버섯은 굉장히 희귀한 버섯인데 재배가 불가능하지. 그리고 달여서 먹으면 수염이..."
"아니아니아니 푸풉푸푸 버섯이 뭔지는 알아요. 근데 그게 아니라 버섯이 왜 나온거냐고요."

"달이 밝은 밤이었다..."
"아니이이 그러니까, 아... 됐어요... 그냥 제가 알아서 들을게요..."

이러다간 날 샐 판이었다.

"어쨌든 나는 내 기술향상과 푸풉푸푸 버섯에 대해 생각하며 이 숲까지 오게 되었다. 그 무렵엔, 새로운 재료를 발견하고 다뤄보면 아마도 실력이 늘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다다르게 되었지. 슬럼프를 극복하는데 도전만큼 좋은 건 없으니까."

그래서 이런 곳에 비밀 공방을 차리고 혼자 연구를 계속하게 되었다, 라는 이야기 같았다.

"그러다가 발견해버린거야."
"오, 뭘 발견하셨는데요?"

나는 어느새 로망소설을 읽듯 아저씨의 이야기에 매료되어 가고 있었다.

"바로 사과나무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반전에 나는 턱과 입 언저리를 살살 문질렀다. 어쩐지 그것으로는 만족되지 않아 손가락도 깨물어보다가 이내 손바닥으로 뺨과 목, 목의 뒤편까지 문지르기 시작했다.
아...
그 후엔 양손을 갈퀴손으로 만들어 뒤통수를 긁다가.

"으아아악!"

괴성을 지르며 머리를 마구 헤집었던 나는 곧 다시 매무새를 정리하고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저기, 제가... 그러니까... 어느 부분에 집중해야하는지 모르겠는데요? 기술향상이랑 버섯이랑 사과나무 중에?"
"팬던트 두더지지."

...물어본 게 잘못이다.
그렇지. 이 세상에서 질문을 한다는 건 대역죄에 해당한다.
오늘은 그러기로 했다.

"이번엔 두더지... 라고요?"
"나는 내 실력의 벽을 깨는 방법을 생각하는 중에 푸풉푸푸 버섯을 발견할 것 같은 영감을 느끼며 발견한 사과나무의 밑동에서 떨어진 사과를 찾다가 팬던트 두더지를 발견했다. 팬던트 두더지는 혀 밑에서 보석을 만들어내는 특이한 종이야, 석주라고 하는건데 조개의 진주 같은 걸 생각하면 편할 게다."

팬던트 두더지가 뭔지도 알고는 있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고!

"그래서 여기서 그 석주의 재련을..."
"나는 그 녀석이 가지고 있던 사과를 빼앗기 위해 달려들었다."

아까부터 목적이랑 행동이 전혀 다르잖아!
그리고 이 이야기가 대체 뭔지 진짜 하나도 모르겠어!

"어떻게 녀석을 붙잡아 사과는 빼앗는데는 성공했지만 나는 큰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그 녀석의 굴까지 따라 들어가버리고 만거지."

타들어가던 흑목석이 불 튀기는 소리를 내었다.

"저게 바로 그 구멍이다."

나는 쿤투아마 씨가 가리킨 동공 천장의 구석진 곳을 보았다.
미세하게, 아주 미세하게 빛이 세어나오고 있다.

"팬던트 두더지는 하고 싶으면 바위까지 먹어가며 제 멋대로 돌아다니다보니 간혹 저런 구멍들이 생기기도 하지."

일직선으로 잘도 뚫었네...
그런데.

"아니 잠깐만요. 그럼 이런 데에 공방을 만들게된 이유가 폐관수련도 아니고 비밀연구도 아닌..."
"두더지를 쫓다가 떨어져서 그렇게 된거지. 처음에는 절망뿐이었지만 녀석의 사과를 먹고나서 나는 깨달았다. '그래, 사과가 이렇게 맛있는데 나는 대체 뭘 고민한단 말인가.' 그래서 여기서 눌러 살면서..."

아저씨의 이야기는 후로도 계속 되었다.
그냥 안듣고 옆에서 건강체조나 한다고 할 걸. 차라리 그게 나을텐데.

이런 거... 알고싶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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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2-08 06:58 | 조회 : 992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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