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적인 삶


연지는 조금씩 정상적인 삶을 찾아가는 것 같았다.

엄마도 정신을 차리셨는지 집안 살림을 시작하셨다.

병원의 법무팀과 대신항공의 변호사들은 모종의 합의를 이룬듯 했다.

가해자로 지목되어 잡혔던 운전사는 초범이어서 불구속상태에서 과실치상으로 집행유예로 풀려났고 아빠의 사망에 대한 원인은 교통사고도 아니고 의료사고도 아닌 것으로 결론이 나버렸다. 분명 상대방이 와서 가만히 있는 차를 들이받아 병원에 실려간 것인데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없는,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얼마 후 집으로 변호사사무소 사무장이라는 사람이 찾아왔다.

엄마는 그래도 가장이라고 나와 동석한 상태에서 사무장을 만나려 늦은 밤에 부른 것이다.

“이게 민사로 하면 양쪽에 최소 2억씩은 받아낼 수 있어요 일단 수임료는 조금만 받고 나중에 승소하면 그때 20%만 주세요.”

얼굴에 기름기가 흐르던 남자는 마치 계약서에 싸인을 하는 순간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해결될 것처럼 말했다.

“어머니랑 애들은 그냥 하던 일 하세요 신경쓰지 마시고 나머지는 다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왠지 찝찝했지만 남자가 내민 ‘변호사수임계약서’에 날인을 하자 사무장이라는 사람은 사본 한장을 남기고 서류를 챙겨 사라져 버린다.

그때는 그것이 그렇게 심각한 일인지 몰랐다.

그저 형사재판으로 제대로 보상 받지 못한 것을 민사 재판으로 제대로 보상 받을 수 있을 줄 알았다.

세상은 선량하고 묵묵히 자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무참히 짓밟고 그걸 받아들이라고 한다.

예전의 나같으면 아무런 생각없이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권오성은 그럴 마음이 없다.

***

지현이 누나는 오후 3시에 와서 12시까지 일을 한다.

“모든 과목을 오전으로 때려 박았어.”

공부도 하면서 일을 한다는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닐텐데 지현이 누나는 성적이 좋아 장학금까지 받는다고 한다.

“너무 돈 밝히는거 아니야? 장학금까지 받으면 돈이 뭐가 필요해?”

내 질문에 지현이 누나는 한숨부터 쉰다.

“니가 아직 어려서 그런 소리 하는 거야! 잠은 어디서 자고 밥은 누가 공짜로 먹여준다던?”

매일같이 일하는 나와 달리 지현이누나는 일주일에 한번 일요일엔 쉰다.

시간이 날 때마다 남자친구와 전화를 하곤 하는데 옆에서 듣고 있기 민망할 정도다.

“안돼! 자기 난 내년에도 학교 다녀야 하잖아. 결혼은 나중에···”

전에는 타인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타인에게 관심을 가질 마음의 여유조차 없었고 내게 타인이란 잠재적으로 나를 괴롭힐 새로운 스트레스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현이 누나같은 사람 옆에서 함께 일을 하다보니 세상에 대해서 배우는 것도 많고 긍정적 에너지가 전달되는 것 같았다.

PC방 사장님도 알고보니 꽤 괜찮은 분이었다.

‘손님에 대한 서비스마인드는 잊지 마라! 그런데 손놈에겐 한방 받아도 돼!’

먼저번 손님하고 싸우다가 그만둔 직원도 자신이 계속 일을 하겠다고 했다면 그러라고 했었을 것이다.

세상은 무섭기만 한 곳이 아니라 이렇게 군데 군데 좋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예전엔 잘 몰랐었다.

아빠의 49제가 지나고 조금씩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가끔씩 농담도 하면서 지낸다. 내 표정이 어두우면 주변사람이 불편하다는 사실을 그전에는 몰랐었다.

마음속 한 끝이 절절히 시리지만 그건 내 다짐과 각오를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것이다.

다른 이들에게는 그들이 편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게 중요했다.

“어 당신 그때 그 오타구잖아!”

예쁜 아가씨 둘이 와서 내게 말을 건다. 얼굴이 낯익다.

“기억 안나? 그때 명함도 줬는데···”

그제서야 몇주전 일이 떠 올랐다.

“아~~아~”

“안녕하세요? 제대로 인사해요 유세진이예요.”

여우 이름이 진채영이었나? 여우 뒤에서 토끼가 고개를 내밀고 인사를 한다.

“여기 가이아스 안 왔어? 아직도 가끔씩 이쪽 IP가 잡힌다고 하던데···”

같은 리버스의 현실가상게임 버전도 아이디는 똑같이 잡히는 모양이었다.

“못 봤는데···”

내 대답에 두 여자의 얼굴이 실망한 표정으로 변했다.

?만원이나 줬는데 기태 이자식 그냥···”

두 여자가 내 앞에 머물러 있자 지현이 누나가 다가온다.

“무슨 일이세요?”

앞치마를 입은 지현이 누나를 보자 두 여자의 얼굴에 생기가 돈다.

“여기 리버스 게임하는 사람 못 보셨어요?”

“리버스라면 가상현실게임?”

지현이 누나는 말을 하면서 내 눈치를 본다. 이곳에서 리버스 게임을 하는 사람은 오로지 나밖에 없다. 나는 아무도 보지 못하게 빠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한명 있기는 한데···”

“누군데요 그 사람이..”

지현이 누나가 턱짓으로 나를 가르킨다.

그러자 여우가 나를 노려본다.

“잠깐 나와서 이야기 좀 하지?”

난 지현이 누나에게 원망의 눈초리를 보내면서 여우와 토끼에게 잡혀 끌려나갔다.

“당신이 사령관 가이아스 맞지?”

“···”

“정말 가이아스님 맞아요? 너무 어린거 아냐? 난 그래도 이십대 후반은 되었으리라 생각했는데···”

“게임에 나이가 어딨어? 잘하는 사람이 왕이고 신이지.”

“그래도 진두지휘할때는 50대 같은 베테랑의 노련미도 풍겼잖아.”

“야! 유세진 지금 그런 이야기 할 때야?”

“아니 난 가이아스님 이라기엔 너무 어리다 이거지···”

여우는 잠시동안 토끼에게 핀잔을 주더니 나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지금 콘키스타 길드 남은 성이 하나야! 가이아스가 없다면 남은 성마저 박살나고 길드가 사라져···”

2년동안 내 모든걸 갈아서 한 게임 [리버스]에서 내 뒤에는 나를 따르는 콘키스타 길드가 있었다.

내가 앞서고 정복하고 그 전리품을 나눠가졌었다.

내가 없는 동안 4개였던 성이 다른 길드에 함락당하고 이제 고작 한개의 성만 남은 것이다.

“나 가이아스 아닙니다. 괜한 사람 붙잡고 있는 거예요.”

“후후후 아직도 그 소리야? 너랑 일하던 알바생이 너라잖아!”

“내가 하는 리버스는 마피아 게임이라고요.”

“뭐? 리버스가 마피아 게임이라고? 무슨 소리야?”

“궁금하면 보여드리죠. 어차피 근무시간 끝났으니까.”

나는 다시 두 사람을 데리고 개인룸으로 향했다. 내가 장비를 다 착용하자 여우와 토끼는 뒤에서 날 지켜본다.

그리고 리버스에 접속했다.

***

나는 에스판자와 함께 차에 타고 있다.

“그런데 말이야! 자네가 나한테 와서 처음 말한 것처럼 치노와 모레티 파가 서로 싸워서 박살이 나면 우리 에스판자 패밀리가 뉴욕을 접수하라는 말 말이야. 마약하고 살인만 안하면 봐주겠다고 한 말이 난 마음에 들지 않거든, 우리가 무슨 주인 말 잘 듣는 개도 아니고 말이야, 마약같이 돈 많이 버는 사업을 하지 말라니 그건 개의 눈앞에서 뼈다귀를 흔들면서 먹지 말라는 거라고, 그건 참 잔인한 짓이지 그렇지 않나?”

에스판자는 시거를 물고서 내게 답을 구했지만, 뭐라고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한참 달리던 차는 안개가 자욱한 선착장 인근의 창고에 멈추고 앞서가던 차에서 세명의 졸개들이 나와 차 문을 열어준다.

에스판자는 부하가 열어준 문을 통해 힘겹게 버둥거리며 내리자 나도 뒤따라서 내렸다.

“치노가 아들 손을 잘라버린 모레티를 죽이고 때마침 그자리를 습격한 FBI 비밀요원까지 죽이는 거지. 그리고 마피아로 위장잠입한 FBI 요원이 자기를 죽이려하는 치노와 부하를 죽이고 달아나는 거고···어떤가 내 시나리오가?”

그러니까 거기서 살아남은 FBI 요원이 바로 나란말이다. 러키는 에스판자의 부하가 아니었던 건가?

만약 치노와 모레티를 에스판자가 죽였다고 하면 치노와 모레티의 부하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에스판자는 피로 범벅된 전쟁을 치룬 후에야 뉴욕을 차지 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일을 FBI가 했다면 보스를 잃어 힘이 약한 치노와 모레티의 부하들은 FBI를 증오하면서 에스판자의 밑으로 갈 수 있게 될 것이다.

“게다가 살인을 하지 말라는건 말이야 우리보고 마피아를 하지 말라는 것과도 같지 우리가 무슨 보이스카웃도 아니고 말이야. 어쨌든 난 내 시나리오에 문제점을 하나 발견했거든, 다른 사람은 몰라도 FBI 요원은 모든 걸 알고 있을 거란 말일세, 필요하면 치노파에 우리가 치노를 죽였다고 떠들어 댈 수도 있는 거고. 그냥 조용히 사라져주면 좋을 텐데 말이야. 그런데 사람이 어떻게 조용히 사라지냐고? 게다가 마피아를 담당하는 FBI가 말이야. 그놈이 살아있는 한 우리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는것과 같은데 말이야.”

“시나리오 괜찮네요. 그런데 FBI요원이 죽으면 FBI가 가만있을 까요?”

“하하하 죽었는지 살았는지 증거를 찾지 못하면 어떻게 하겠나? FBI는 항상 우리 적이었는데 뭘, 오히려 FBI와 결탁한 마피아가 있다고 하면 그가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아?”

대머리 에스판자는 머리에 모자를 쓰고서 씨거를 물고 여유있게 웃는다.

눈앞에 반으로 자른 기름통과 시멘트포대와 모레자루가 쌓여 있는게 보였다.

“에스판자 설마···”

“맞어! 자네 생각대로야. 조용히 사라지지 못한다면 조용히 사라지게 만들어 주면 되는거잖아.”

나는 게임속의 러키 데 폰티가 되어 입에 침을 발랐다. 가방은 전달했고 살아남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영혼을 쥐어짜 에스폰짜에게 사정을 해 보기로 했다.

“위대한 대부 에스판자님 조용히 입 닫고 살아갈테니 이번에만 봐주면 안되겠소? ”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에스판자는 단호하다.

“미안하네 러키 나는 치노나 모레티처럼 바보가 아니야.”

에스판자가 시거 연기를 내뿜으며 옆의 부하에게 고개짓을 하자 부하가 내 옆구리를 톰슨기관총으로 찌른다.

“아 산채로 바다에 던지는건 끔찍해서 못 보겠군, 머리통 날라가는걸 보는게 더 나아.”

에스판자는 위스키병이 있는 탁자의 의자에 앉고 에스판자의 부하들은 또다시 내 몸을 꼼꼼히 수색한다.

아무것도 발견되는게 없자 반을 자른 기름통으로 들어가라고 한다.

한명이 내게 톰슨 기관총을 겨누고 나머지 둘이 시멘트와 모레를 섞은 다음 물을 넣어 시멘트를 개고 있다.

“차라리 죽인 다음 넣지 그래?”

두 명의 부하가 두 손을 들고 통 안에 서 있는 내 다리 사이로 시멘트를 촘촘히 부어 넣고 있고 그 동안에도 부하 하나는 톰슨기관총으로 나를 겨누고 있다.

“얻어 맞아 기절하고 싶지 앟으면 가만히 있으라고.”

시멘트를 다 부어 놓자 다리를 꼼짝 할 수가 없었다. 에스판자는 앉아서 위스키를 마시고 세명의 부하는 담배를 나눠피면서 낄낄 거린다. 시멘트가 마를동안 기다리는 것이다.

“에스판자 대부님! 한번만 살려주세요. 살려만 주시면 FBI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가 조용히 살겠습니다.”

발을 계속 꼼지락 거렸지만 시멘트가 어느 정도 굳었는지 딱딱해져있다.

“러키, 이 친구야! 인생은 원래 이런거야. 한 순간도 방심하면 안되는 거라고 어디서 어떻게 죽을 줄 모르는게 인생이거든. 속고 속이는 세상에서 당하지 않으려면 항상 주변을 철저히 경계해야 해. 자네 인생은 여기서 끝이겠지만 말이야.”

에스판자가 위스키를 홀짝 거리자 부하 세 명은 담배를 피며 내 곁으로 다가온다.

“뭐라는 거야?”, “하하 살려달라는데”, “밑에 친구 많으니까 잘 놀아보라고 크크크, 설마 벌써 오줌지린건 아니지?”

세놈은 낄낄거리면서 농담을 한다. 많은 사람들을 이런 식으로 처리를 해 왔었던 것 같다.

“이거 좋은데···나한테 딱 맞잖아.”

한 놈이 내게서 모자를 벗겨가 자기 머리에 맞는지 쓰고있다.

난 얼굴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으흐흐흑”

“하하하”

내 우는 모습을 본 에스판자가 크게 웃자 부하놈들이 내게 다가와 놀린다.

“하하 이제 우는데..”, “엄마한테 말해봐! 마마 구해주세요.”

난 반쯤 주저앉은 모습이 되었고 녀석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낄낄거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팡! 팡! 팡!”

난 목덜미 뒤에 있는 총을 재빨리 꺼내 세 놈에게 각각 한발씩 먹여주었다.

웃고 있던 놈들은 웃으면서 죽을 수 있어서 좋았을 것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벨보이의 조언을 난 놓치지 않았다.

치노의 방문을 두드리기 전 벨보이가 총을 숨기라고 했을 때 난 목덜미 뒤에다가 리볼버 하나를 끼워 넣었었다.

누가 거기를 뒤지겠는가? 예상대로 겨드랑이와 허리와 사타구니를 뒤졌을 뿐 목 뒷덜미는 손끝도 대지 않았다.

시멘트에서 발을 빼려고 했지만 어느정도 굳은 상태였는지 무릎까지 빠진 발이 꼼짝도 하지 않는다.

에스판자는 놀라서 두 손을 들고 나를 바라본다.

“러키, 러키 미안하네 설마 그 총을 쏘진 않겠지? 자네가 말한 것처럼 자네는 조용히 고향으로 돌아가 난 자네를 못 본걸로 하겠네. 아니 필요하면 내가 여비도 넉넉히 챙겨줄께 50만 달러면 되겠나? 저 차 트렁크에 50만 달러가 있네.”

5미터정도의 거리, 난 대머리 뚱땡이 에스판자를 향해 총을 겨눴다.

“당신 말이 맞아 에스판자. 한순간도 방심하면 안되는게 인생이지. 당신은 좀 전에 내가 살려달라고 했을 때 살려줬었어야 했어.”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에스판자는 쓰러진 부하의 톰슨 기관총을 잡으려고 한다.

“팡!, 팡!”

첫번째 총알은 빗나갔지만 두번째 총알은 정확히 에스판자의 머리를 맞췄다.

그런데 그 바람에 나도 중심을 잃어 휘청거린다.

“으아 으아아아아”

중심을 잃은 바람에 바로 뒤가 바닷물이었는데 그대로 빠져버렸다.

물속에 들어가자 마자 콘크리트는 아래로 중심을 잡더니 빨려가듯이 바닥을 향해 치닫는다.

“턱”

내 손이 무엇인가에 걸렸다. 내 손을 잡은 무엇이 나를 강력하게 끌어 올린다.

“허푸푸”

물 밖으로 나오자 나를 끌어올린 것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그러길래 그 가방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했지. 누가 친구인지는 알아 볼 수 있어야지”

골목에서 총을 겨누던 그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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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2-07 09:26 | 조회 : 709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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