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스텔라의 고운 입술에서 묵직한 한숨이 새 흘러 나왔다.
조용한 방 안에서 짧게 내쉰 한숨은 세상이 망하기라도 한 듯 딱딱했다.
그녀가 스스로의 이마를 짚으며 미간을 찌푸리더니 한숨만 나오던 입에서
처음으로 말이 뱉어져 나왔다.

“ 뱀같은 놈.”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황실의 문장이 찍힌 편지 봉투였다.
그 속 내용은 황태자, 체르 핀이 건강이 우려된다며 황실 의원에게 검사를 받으러 오라는 내용이었다.
겉으로야 건강이 걱정되어 의원을 만나 뵈라는 이야기지
결국 그녀를 황궁으로 초대하기 위한 애 같은 뻔하디 뻔한 수작이었다.

‘ 의원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의원을 찾아뵈기 위해 황궁으로 오라...이건가 .’

사실 이번 편지가 첫 번째는 아니었다.
처음에는 안부를 묻더니 두 번째는 아켈리온 가에 찾아가겠다는 내용이 담긴 끔찍한 편지였다. 그녀가 가까스로 그것을 거절했더니 이번에는 의원을 뵈러 이쪽에 오라는 것이다.

‘의원만 보내는 것으론 큰 소문을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얼굴을 보려고 애쓰는군.’

황태자의 말을 두 번이나 거스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그녀는 결국 황태자의 통보인 내일 모레. 그 날 당장 그를 찾아뵙겠다고 전하였다.

***

“ 제국의 작은 태양.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

“ 어서 오십시오. 편지로는 괜찮다고 들었습니다만.. 역시 안색이 좋지 않네요. ”

“ 전하의 깊은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

체르 핀이 스텔라를 향해 손을 내밀자 그녀는 살포시 그의 손에 손을 올리곤
의원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스텔라가 눈을 천천히 굴리며 주변을 보자 유독 밖에서 대기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 시녀, 집사들이 많음을 볼 수 있었다.
그녀가 그렇게 높은 인물도 아닌데 이리 많은 이들이 줄을 서 고개를 숙이고 있음은
황태자의 명령하에 이루어진 것이 틀림없었다.

‘ 작정을 하고 꾀를 부리네..? ’

스텔라가 속으로 눈살을 찌푸리며 천천히 그를 따라갔다.
체르 핀을 따라 걸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의원이 그들을 맞이했다.

“ 제국의 작은 태양.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아켈리온가 4번째 영애. 스텔라님을 뵙습니다. ”

“ 이 분은 황실 의원. 빌리 의원입니다. 실력이 좋기로 유명하니.. 분명 영애의 안식에 도움 줄 것입니다. ”

그의 걱정 어린 눈동자가 스텔라를 향하자 빌리는 적잖게 놀란 눈으로 스텔라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찌푸려지려던 표정을 풀고 빌리의 의자 앞에 앉았다.
빌리가 곧바로 자리에 앉아 그녀의 체온을 재기부터 시작해 심장박동 수, 혈색, 피부를 세세하게 확인했다.

그것을 옆에서 쭉 지켜보는 체르 핀을 보고 있으니 괜스레 체하는 것 같았다.
저 가식적인 눈이 제 몸을 훑고 있으니 퍽 역겨웠으리라
속으로 올라오는 역겨움을 가라앉히려 스텔라는 조용히 두 눈을 빠르게 감았다.
길게도 느껴졌던 진료 시간이 끝나고 빌리는 안경을 올려 고쳐 쓰며 입을 열었다.

“ 잿빛 꽃을 만지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때문인지 근육이 매우 긴장되어 있군요. 그 뿐 아니라 이 손... 검을 잡은 것이 아니라면 이런 손이 될 리가 없습니다. 처음 보는 증상이..”

“ 검을 잡은 손입니다. ”

“ ..예? ”

“ 검을 잡은 손이 맞다고 말씀드렸습니다. ”

스텔라의 고운 목소리에 빌리는 벙 쪄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옆에 서 있던 체르 핀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스텔라를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켈리온가가 이상한 것이지 원래는 여성들이 가질 수 있는 위험한 물건이라곤 바늘과 식기도구 악세서리 정도다.

여성들이 가지지 않는 물건.
그것이 곧 검이었으며 검술은 가지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빌리의 눈에 비치는 스텔라는 그 어떤 여성들보다도 가녀리고 아름다웠다.
가장 큰 점은 그녀는 15살이었다.
빌리의 딸 정도 되는 그녀가 자신도 잘 잡지 않는 검을 쥐었다고 하니 황당하게 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 검을... ”

빌리는 몇 번이고 입을 달싹이다가 곧 입을 다물었다.
약간의 정적이 흐른 뒤 빌리는 정말로 검을 배운다면 특이점은 없고 단지 검을 다룰 때에는 근육을 충분히 키우고 휘둘러야 한다는 조언을 한 뒤 일어섰다.

스텔라는 진료를 마치자 의자에서 일어났다.
한 마디도 없이 쭉 멍 때리던 체르 핀은 그녀가 일어서자 곧 정신을 차리고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 별 이상이 없어 다행입니다. ”

“ 다 전하의 넓은 혜안 덕분입니다. ”

“ ... ”

체르 핀이 갑자기 말을 멈추자 스텔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 의문에 답을 해주듯 체르 핀은 나긋한 어조로 운을 띄웠다.

“ 검을...배우셨다구요. ”

“ 네, 그렇습니다. ”

“ 그러고 보니.. 아켈리온가는 검술도.. 유명한 가문이죠. 영애께서 검술을..”

체르 핀은 골똘히 생각하다 기분 나쁘게 눈을 휘며 웃음을 흘렸다.
흡사 원숭이의 재주를 보는 듯.

“ 그것 참.. 흥미로운 이야기군요. 꼭 한 번 영애의 검술을 보고 싶습니다.
성격도 차분하시고 몸가짐도 가지런하시니 검술을 배우는데 특히나 빛을 발하실 것 같습니다. ”

“ 과분한 칭찬 감사합니다. ”

스텔라가 짧게 고개를 숙였다.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그득한 스텔라는 짧게 대답하며 그가 얼른 이제 돌아가도 좋다는 말을 해주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우습게도 그는 스텔라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 영애 시간 괜찮으시다면.. 저와 산책이라도 조금 어떻습니까? ”

‘ 죽일까 ’

“ 영광입니다. ”

안타깝게도 그녀는 속으로만 그를 욕할 뿐 겉으로까지는 할 수 없었다.
말랑한 팔과 작은 체구의 스텔라가 나름 황태자라는 신분을 가진 저 남자에게
욕을 해 온갖 고문을 당해줄 만큼 그녀는 마음이 넓지 않았다.

체르 핀의 손 위에 최대한 손이 닿지 않도록 손을 올리며 그의 에스코트를 따랐다.
지금 산책인지 황궁을 활보하는 것인지 스텔라는 차마 알 수가 없었다.
물론 시종이 가장 많이 돌아다니는 곳이 황궁 내부지만 이건 너무 속 보이지 않은가.
이 정도면 입으로 자랑하고 다니는 모습과 다를 것이 없었다.

속으로 욕 짓거리를 내뱉던 스텔라가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 황태자 저하! ”

“ 무슨 일이냐. ”

“ 그것이.. ”

기사로 보이는 남자가 스텔라를 눈으로 흘겨보더니 체르 핀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스텔라는 픽 바람 빠진 웃음을 지으며 창문이나 바라보았다.

“ 그 괴물이........ 지하.....다 사라지고 있습... ”

드문드문 들려오는 기사의 말에 스텔라는 생각 중 걸리는 단어에 고개를 기울였다.

‘ 괴물..? ’

스텔라가 그 단어의 의미를 생각하던 중
체르 핀의 혀 차는 소리에 그를 바라보았다.
체르 핀은 진절머리가 난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그의 망가진 얼굴을 보니 한결 기분이 좋아진 스텔라는 어깨를 으쓱였다.

“ 지금 가지. ”
체르 핀이 스텔라를 향해 미안하다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 정말 죄송합니다. 영애.. 영애에게 먼저 산책을 권했는데 이렇게 급작스럽게 일이 생겨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돌아가시는 길에 에스코트도 해드리지 못 해 정말 죄송합니다. 기사를 동행 시킬 터이니 걱정 마시지요. ”

“ 아닙니다. 저하 그리 멀게 온 것도 아니니 굳이 다른 분이 에스코트 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하와 함께 할 수 있어서 무척 기뻤습니다. 밖에 제 시종도 마차도 있으니 걱정마세요. ”

“ ..알겠습니다. 그럼 후에 다시 만나기를 바라겠습니다. ”

체르 핀이 인사를 마치고 어지간히도 급한 일인지 몸을 빠르게 돌려 순식간에 사라졌다. 스텔라는 그가 지나간 길을 보며 콧바람을 내고는 발걸음을 뗐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천천히 보며 걷는데 어느새 그녀는 모르는 사이
복도 한 곳에 서 있었다.

“ ...? ”

스텔라는 본인이 길치였나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보는데 어딘가 익숙한 곳이었다.
다름이 아닌 연회가 있던 날 스텔라가 술을 마시고 무의식으로 왔던 곳이었다.
이상한 기운이 느껴지던 그 장소.
이상하게도 사람의 온기는 전혀 깃들지 않는 차가운 곳.
그녀는 그때도 지금도 무의식 속에서 마치 끌리듯 이곳에 서 있었다.
기묘한 기류가 흐르는 벽을 보며 스텔라는 눈을 가늘게 떴다.

“ 역시.. 뭔가 있어. ”

그녀는 천천히 벽을 향해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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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11-01 23:31 | 조회 : 1,399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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