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하윤이 물기있는 머리를 털고 나올때, 진혁은 침실에 없었다. 어차피 배 안에 방은 몇 개 없으니 다 찾아볼 심산으로 하윤은 방문을 벌컥 벌컥 열었다.

진혁은 야외 테라스가 있는 방에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검붉은 와인을 담은 와인병 하나가 들려 있었다.

"와인 마시려고?"

"응. 앉아."

"우리 미성년자야."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썼다고."

진혁의 말에 하윤이 자리에 앉았다. 미니 쇼파처럼 구성된 의자는 하윤의 가벼운 무게에도 푹신하게 꺼졌다. 하윤은 테라스 밖의 호수를 둘러보았다. 밤이 되어 어두컴컴해 졌는데도 그 모습이 아름다웠다. 잔잔하게 물결이 이는 물에 빛이 아른거리며 비쳤다.

이런 배경에 술이라니, 하윤은 어이가 없어 푸시식 웃었다. 새벽처럼 감성에 젖어 헛소리라도 꺼낼까봐 걱정인 것이다.

"한 잔?"

"응."

진혁이 하윤의 유리잔에 와인을 따랐다. 하윤은 두 손으로 자신의 손보다 훨씬 큰 와인잔을 들었다. 입가와 코 가까이 가져다대는 순간 알싸하고 향긋한 향이 풍겼다.

한 모금 마셔도 목구멍이 뜨겁지 않았다. 하윤은 엄두도 못낼 고급 와인이 분명했다.

"그래서 할 말은 뭐야?"

"두 잔?"

"아, 말고. 할말 하라니까."

하윤은 한모금에 들이킨 유리잔을 톡톡 쳤다. 아직 취하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중요한 이야기라면 취하기 전에 듣고 싶었다. 진혁은 곤란하다는 듯이 어색하게 웃었다.

"여기 호수 배경 예쁘지?"

"자꾸 말 돌리지 말고. 중요한 거 말할 줄 알았는데...."

"알았어. 알았어. 할 말은 두 가지야."

"두 가지?"

진혁이 피식 웃으며 와인 한 잔을 들이켰다. 하윤보다 많은 양을 마셨지만, 전혀 취하는 기색이 없었다.

"첫번째는, 나 언론에 밝히려고."

진혁이 드디어 무겁던 입을 열었다. 하윤은 영문을 모른채 눈만 깜박였다.

"뭘 밝혀?"

"내가 극우성 알파라는 사실을."

"무, 뭐? 무슨...."

하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재차 질문해봤지만 진혁의 대답은 같았다. 그는 중대한 결정을 내렸고 그 결정을 바꾸지 않을 모양이었다.

"왜?"

"사실 네가 오메가인걸 밝히는 걸 지켜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어. 네가 생각하는 거보다 많이."

"......."

"너, 많이 달라졌어, 하윤아. 좋은 의미로. 자신감이 붙었고 꼭 너 자신을 바르게 알고 마주하는 느낌었어."

진혁의 칭찬에 하윤이 뺨을 붉혔다. 그에게 이런 소리를 들으리라곤 상상조차 못했다. 당혹스러운 동시에 자신이 정말 많이 성장했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난 진전이 없더라."

진혁이 말을 계속했다.

"나도 자신있게 나가야겠다고 생각했어. 네가 오메가란 걸 퍼뜨린 사람이 내가 극우성이라는 것도 퍼뜨릴 까봐 걱정하는 것도 이제 질려."

"......."

"너와 함께라면, 극우성인 걸 밝힘으로써의 어려움과 고통도 이겨낼 수 있을 것만 같았어. 네가 내 옆에만 있다면."

진혁의 목소리는 매우 낮았고 동시에 부드러웠다. 그 목소리에는 강한 의지와 진심이 담겨있었다.

"싫어?"

"아, 아니, 좀 당황해서..... 네가 원하는 선택이라면 사실 난 뭐래도 좋아. 네가 힘들어 할때 옆에 있어주는 건 쉬우니까...."

하윤에게서 원하는 대답을 얻어낸 진혁이 싱긋 웃었다. 그는 만족했다는 듯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도 제정신에 말하게 됬네. 네가 불편해 할까봐 일부러 와인 준비한 건데....."

진혁이 웃으면서 들고 있던 와인잔을 돌렸다. 붉은 와인이 유리잔에 부딪히며 찰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래서 두번째 할 말은 뭔데?"

하윤의 질문에 진혁은 기다렸다는 듯이 와인잔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하윤에게 저벅저벅 다가와 하윤마저 일으킨다.

"진혁아?"

"이리로 나와."

진혁이 하윤의 손목을 다정하게 답고 테라스 난간 쪽으로 이끈다. 하윤의 머리카락이 잔잔하고 고요한 바람에 이끌려 흩트러졌다.

"하윤아."

"응?"

진혁이 하윤의 허리를 잡았다. 얄쌍한 허리는 한손에 잡혀들어간다. 차가워진 귀는 온도와는 다르게 새빨갛다. 진혁은 하윤의 두근거리는 심장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를 안정시켜주고 환상과 낙원을 일깨워준 박동소리다.

"나랑 결혼하자."

진혁의 말에 하윤의 얼굴이 기다렸다는 듯이 화르르 타올랐다. 누가 뭐랄새도 없이 두 사람은 서로 엉겨붙어 깊은 키스를 나누었다. 가쁜 숨을 나누었고, 서로의 벌게진 뺨을 아릴 듯이 부여잡았다.

"대학 졸업만 하면, 바로 식을 치르자."

"응."

"반지도 집도 모두 내가 준비할게."

"으응."

"사랑해."

"흡.... 나도..."

하윤이 진혁의 머리카락 사이사이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따뜻하고 정겹다. 그의 향기가, 채취가, 이제는 없으면 두려울 정도로 정겨웠다. 진혁이 하윤의 허리를 가득히 둘러 감쌌다.

"결혼하자."

"그래...."

***

여행이 끝나는 화요일 밤, 하윤은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는 마지막 화요일의 꿈이었다. 아기는 재림이란 이름을 가지고 이미 뱃속을 나왔는데 마지막 꿈을 이렇게 꾸게 되다니,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다시 생각해보면 꿈의 내용 중 그 어떤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꿈이 그 무엇보다도 달콤하고 환상적이라는 것은 심장 속 깊이 기억할 수 있었다.

하윤은 자신이 꿈에서 깼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눈꺼풀은 올리지 않았다. 눈을 감은 상태로 부드러운 침대 위를 더듬었다. 진혁의 손가락이 잡히자, 그대로 하윤은 깍지를 끼었다.

온기있는 손가락을 맞잡으며 하윤은 다시 잠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눈을 감은 뽀얀 뺨 위로 복숭아빛 미소가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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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8-05-26 19:44 | 조회 : 3,874 목록
작가의 말
새벽네시

다음화는 에필로그입니다.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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