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진혁의 첫출근 뒤로 약 40일 후의 나른한 오후였다. 철구는 본가에 가서 길러지게 되었고, 아주머니가 퇴근한 오후면 하윤과 아기밖에 남지 않았다.

진혁이 없는 일상생활은 마치 평소처럼 반복되었다. 익숙함이란게 무섭다고, 처음에는 섭섭하던 하윤도 진혁과의 짧은 만남에서 헤어질 때 무감각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 느낌이 몸서리치게 싫으면서도 두려웠다. 하윤은 진혁과 자신이 점점 멀어지는 것만 같아서 두려웠다. 진혁은 그가 모든 것을 내어준 대상이었는데 이렇게 멀어지다가 자신이 건네준 모든 감정들마저 사라질 것 같았다.

그래서 무서웠다.

"콜록, 콜록... 진혁아, 오늘은 언제와?"

[미안. 좀 늦을 것 같아.]

"또?"

[......]

"그래. 알겠어."

하윤은 통화를 끊으며 쇼파 위로 굴렀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보내지 않는 거였다. 남에게 피해를 끼치고 진혁을 잡아두더라도 이런 상황은 너무나 싫었다.

"재림아."

하윤은 쇼파 가까이에 끌어놓은 아기침대를 향해 말했다. 다정다감한 목소리에 답변하듯 아기의 웅얼거림이 들렸다. 하윤은 아기의 이마에 뽀뽀라도 하면 기분이 나아지겠지, 하는 생각으로 쇼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려고 했지만 오히려 주르르 미끄러졌다. 엉덩방아를 찧으며 바닥에 늘러붙은 몸은 힘이 없어서 제대로 일어나지 조차 못했다.

"아..... 왜 이러지.."

하윤은 헛웃음을 지으며 쇼파 팔걸이를 짚고 겨우 일어났다. 오늘따라 몸이 물에 젹신 솜처럼 무거웠다. 그 덕에 완전히 무릎을 피지는 못하고 비틀거리는 어정쩡한 자세로 섰다.

"쿨럭...."

그러고보니 잔기침도 많이 나왔다. 열을 재봐야겠다는 생각에 뽀뽀는 뒤로하고 하윤이 급히 발걸음을 움직였다. 후들거리는 다리는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았지만, 다행히도 다시 넘어지는 일은 없었다.

삑-

짧은 소리와 함께 체온계가 숫자를 드러내었다.

"사, 사십...."

하윤은 순간적으로 눈 앞이 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히트싸이클은 한참 남았으니, 단순한 감기일 것이 분명했으나, 이렇게까지 아플 이유를 찾지는 못했다.

하윤은 멍청하게도 멀쩡한 체온계를 의심하는 듯 몇 번이고 온도를 재측정했다.

다섯번째 결과까지 변함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하윤은 급히 화장실로 달려갔다. 자기전에 꼭 챙겨먹으라고 했던 의사의 말을 기억하기 위해 자기 전에는 꼭 한번 들리는 화장실에 약을 배치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영양제일 게 분명했지만, 일단 그거라도 먹어야 할 것 같았다. 화장실 슬리퍼를 신고 하윤은 제 집 찬장을 뒤졌다.

"어디, 쿨럭...어디있지.."

그때, 겨우 하윤의 몸을 지탱하던 발목에 핀트가 나갔다.

"아."

하윤은 짧은 탄성소리와 함께 기울어졌다. 약해질 대로 약해진 몸은 충격에 대힌 대비를 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머리가 세면대에 부딪히며 큰 울림을 내었다.

하윤은 머리 앞이 뱅글뱅글 돌며 새하얘지는 느낌에 눈을 질끈 감았다.

"아.....아...."

바닥에 그대로 쓰러지면서도 하윤은 혹시 아기가 깰까봐 조금의 비명도 지를 수 없었다. 입에서는 멍청한 신음소리만 흘러나왔다. 이마를 타고 무언가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자, 하윤은 두려움에 몸을 움츠렸다.

말을 듣지 않는 몸은 이제 움츠려지지도 않는다. 손에 힘이 점점 빠지는 것을 느끼며 하윤은 미간을 찌푸렸다.

겨우 지탱하던 정신줄을 놓는 것과 동시에, 암전이었다.

***

"실장님, 수고하셨습니다."

"네. 여러분도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진혁은 서류가방을 정리하며 정답게 대답했다. 사실상 정리라기 보다는 종이 뭉치를 가방에 쑤셔넣는 거나 다름 없었지만, 딱히 상관하지 않는 듯 했다.

그는 현재 기분 상태가 매우 좋았다. 두달 걸러 해결할 줄만 알았던 프로젝트가 약 40일 만에 끝이 난 것이다. 모두 진혁의 능력에 감탄하며 회사에 이름을 알릴 기회라고 말했지만, 진혁은 그런 조건 따위에 관심이 없었다. 그가 기분이 좋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는 하윤에게는 늦게 간다고 거짓말 쳐놓고 깜짝 선물을 주면 좋아하겠지 하는 생각을 하며 웃었다.

"실장님, 이번 프로젝트 일은 정말 감사했어요!"

"네.네."

"마침 본래 실장님도 나으셨다고 들었어요."

"가준이 형 말입니까?"

"네!"

"그럼 앞으로 제 할일은 없겠군요. 이만 퇴근하겠습니다."

진혁은 프로젝트 인원 모두에게 나름 정중한 눈인사를 하고 난 후에 뛰쳐나오듯 회사를 나왔다. 운전기사가 달려오는 진혁을 보며 시동을 켰다.

"자택으로 가시겠습니까?"

"가는 길에 HM 샵에 들려주세요."

"예."

진혁은 뭐가 그리 급한지 허둥지둥 차에 올라타고 내렸다. 샵에서는, 본인을 밝히고 VVIP 전용 코너를 이용하지도 않고, 평범한 카드를 긁었다.

"대체 뭘...."

"하윤이 주려고요."

운전기사는 뒷좌석에 다시 올라탄 진혁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회사에서는 그렇게 차갑기로 유명한 도련님이 누구를 위해서는 평범한 청소년이 된다. 지금의 진혁은 애인을 챙겨주느라 들뜬 어린애 자체였다.

진혁은 손에 든 물건들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아기용 딸랑이 두 개, 하윤이를 위한 흰 곰돌이 인형 한 개, 그리고 하트모양 쿠션 한 개.

흰 곰돌이 인형을 든 하윤을 상상하면 심장이 휘몰아치듯 뛰고 설레었다.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지 못한채, 진혁은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피식- 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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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8-05-13 12:19 | 조회 : 3,055 목록
작가의 말
새벽네시

벌써 50화네요ㄴ!!! 그래두 50환데 뭐라도 해야 될 거 같닼ㅋㅌ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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