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함성이 울려 퍼지는 도쿄 올림픽 주경기장.

경기장은 한창 펜싱 경기를 치르느라 후끈 달아오른 상태였다.

고작 몇 초 되지도 않는 찰나의 시간이건만 관객들의 희비가 엇갈리는, 탄식과 환호를 자아내기에는 너무나 짧디 짧은 시간이었다.

몇분 뒤, 세미 파이널(Semi-Final) 경기가 모두 마치고 잠깐 숨 돌리는 시간에 앳되보이는 한 여성이 잠시 나갔다가 경기를 치르기 위해 경기장 안으로 다시 입성했다.

안그래도 시끄러운 함성이 그녀의 등장으로 더 열광적으로 울려퍼졌다.

그야말로 광란의 도가니.

"이제 곧 있으면 대한민국의 자랑, 고진희 선수의 결승전 경기가 시작됩니다!"

"이제 도쿄에서 대한민국의 새 역사를 쓸 수 있을지 기대되는군요!"

"펜싱계의 떠오르는 샛별, 펜싱요정 고진희 선수!"

저마다 리포터들은 선수에게 큰 부담이 되는 멘트들을 쏟아내었지만 정작 당사자는 긴장감 따위는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평온한 얼굴이었다.

대한민국 펜싱 사브르(sabre) 국가대표 고진희.

그녀는 고작 1년만에 전국체전은 물론, 세계선수권 대회 같은 메이저 대회에서 금메달을 싹쓸이 하면서 세계랭킹 1위에 당당하게 우뚝 솟아올랐다.

펜싱에 입문한지 고작 5년 밖에 되지 않은 신동 중의 신동.

선배들은 그녀를 부러움과 질투가 담긴 시선으로 바라보았으나 그녀도 나름의 사정이 있어서 여기까지 오기를 부단히 노력했다.

진희가 그간 스쳐지나온 과정을 생각하며 상념에 빠져 있을 때 그녀의 코치가 파란색 이온음료를 그녀에게 건네며 걱정스레 말했다.

"많이 떨려?"

"아니, 그냥..."

진희는 코치가 건네준 이온음료를 벌컥벌컥 마시며 얼굴을 붉혔다.

사실 지금까지 떨리지 않은 척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올림픽은 모든 체육인들의 꿈의 무대. 어찌 떨리지 않으랴?

더군다나 이번 경기는 여자 사브르 부문 결승전이었다.

'이번에는 절대 놓치면 안돼."

진희는 흘긋 옆을 바라보며 바지 속주머니를 살펴보았다.

"그거 뭐야?"

진희의 코치의 시선은 그녀의 바지주머니 속에 슬쩍 보이는 노란물건에 쏠려있었다.

그녀가 네모반듯하게 접힌 노란색 종이를 꺼내자 코치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하하. 부적이라도 지어온거야? 어디서 만들었어?"

진희는 따라 웃으면서 다시 부적을 곱게 접으며 말했다.

"저희 할머니가 만들어 주셨어요."

"할머니가 무당이었어?"

이어지는 코치는 화들짝 놀라면서 웃었고 진희는 그런 코치의 반응에 씁쓸하게 웃었다.

'아마도요.'

그녀의 할머니는 요즘 제일 잘나간다는 동춘동 선녀보살.

사람들의 미래를 콕콕 찝어내는 신통방통한 능력에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오지만 정작 할머니는 신기라고는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할 일반인 수준의 미약한 영력.

오히려 진희가 무당의 자질이 타고나서 할머니의 사업도 매번 도움을 주고 오늘 쓰게 될 부적도 직접 만들었다.

그녀의 타고난 신기에 많은 도사들이 신내림을 받을 것을 재촉했지만 진희는 그녀의 꿈을 포기할 수 없어서 올림픽 금메달의 꿈만 이루고 깔끔하게 은퇴할 예정이었다.

진희는 차마 코치한테 자신의 할머니가 사람잡는 선무당이라고는 말 못하고 그저 미소만 지었다. 그저 곧 이어질 경기에만 집중하겠다는 듯이.

"나중에 나도 한 장 부탁한다 말씀드려."

이렇게 불쌍한 영혼이 또 하나 늘었구나. 진희는 그냥 씩 웃으며 대답했다.

"예."

그렇게 잡담하고 있을 때, 상대편 쪽 선수가 준결승전을 마친 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도 슬슬 준비해야지?"

코치가 그녀에게 헬멧을 건네며 말했다.

이번 진희의 마지막 상대선수는 안나 하이드만(Anna Heidmann) 선수.

독일의 백전노장 선수이며 이제 그녀가 뼛속까지 탈탈 털어줄 상대였다. 그러나 절대 만만히 보아선 안 될 랭킹 3위 선수이다.

"잘 하고 올게요."

진희는 경기복을 온전히 갖춘 뒤, 코치에게 한쪽 엄지를 치켜들며 피스트(Piest:펜싱 경기무대)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아~고진희 선수! 이제 경기 시작한다고 발랄한 모습을 보이네요!"

"이번에는 하이드만을 상대로 또 어떤 명품경기를 보여줄지!"

리포터의 토해내는 코멘트가 진행됨에 따라 점점 경기장의 함성이 고조되어 맥시멈에 다다르기 시작했다.

"자! 이제 시작합니다! 대한민국의 고진희 선수!"

와아아아아!!!!!!!

진희는 이제 곧 자신이 역사를 쓰게 될 24m 길이의 피스트를 쳐다보았다. 반면, 그녀의 헬멧에 그려진 태극마크를 보며, 상대편은 무슨 생각이 들까.

"앙 가르드(en garde)!"

그때 주심의 경기 시작 바로 전을 알리는 목소리가 들려왔고,

"프렛(Pret) - "

꿀꺽.

"알레(Allez)!"

심판의 선고가 떨어지자 진희는 용수철 같이 튀어나와 선공을 시작했다. 싸움은 선빵이 경기결과를 좌우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기에.

그녀 나름의 신박한 개똥철학은 어찌 잘 먹히는 듯 싶다.

몇번 은빛 궤적이 흐르자 마자 먼저 점수를 얻는데 성공하고 진희는 승리의 사자후를 내질렀다.

"아아, 고진희 선수! 시작이 좋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실적을 극적으로 풀어내는 리포터의 양념같은 코멘트.

그런 리포터들의 기대에 화답하는 그녀의 화려한 몸놀림.

진희는 연이어서 치뤄지는 경기와 빡빡한 훈련일정에도 불구하고 어린아이처럼 팔딱팔딱 몸을 놀렸다.

어느덧 경기는 막바지를 달려가고 리포터는 그녀의 성과에 더욱 열을 올리며 울부짖었다.

"14점!!! 14점입니다!!!"

"이제 1점만 더 얻으면 금메달 확정입니다!!!

"역시 대한민국의 자랑, 펜싱요정 고진희 선수!!!"

경기장에서 그녀를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는 부모님, 바로 옆 한국에서 생중계로 환호하고 있는 그녀의 친구들.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들.

'예감이 좋아!'

진희는 애써 희열을 감추며 주먹을 불끈 쥐기 시작했고 코치가 잠시 틈을타서 잘하고 있다고 용기를 주었다.

'이번 판에 끝낼 수 있어...!'

진희는 땀으로 흥건해진 장갑을 무릎에 박박 닦으며 주심의 신호를 기다렸다.

"알레!"

이번엔 하이드만 선수가 바로 그 소리를 듣자 진희랑 동시에 몸을 튕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역시 나이 때문에 움직임이 둔해서인지 진희는 금세 동선을 간파하고 손목을 노렸다.

그러나 그녀의 검이 하이드만의 손목에 닿으려는 순간,

"으아아악!!!"

진희의 온몸에서 갑자기 하얀 전류가 흐르기 시작했고 그녀의 온몸이 순식간에 마비되기 시작했다.

관객들과 리포터들이 놀라며 하나 둘씩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경기장에는 함성 대신에 안타까움, 탄식이 여기저기 터지고 진희의 몸은 피어오르는 연기와 함께 서서히 무너져 내려가기 시작했다.

전류의 근원은 다름아닌 그녀의 바지주머니.

'뭐가 잘못된걸까?'

진희는 꺼져가는 의식 속에서 간신히 누군가 흔들면서 부르짖는 소리가 들였다.

점점 시야는 새까맣게 변했고 그녀는 그 와중에 마지막 1점이 너무나 아까워서 머릿속으로 계속 되내이고 되내였다.

'내 1점.....'

마침내 그녀는 새카맣게 탄 몸을 부르르 떤 뒤 기절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