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네 번째 날 저녁

집착이란 참 흥미로운 것이죠.
모든 사람은 집착을 합니다.
게다가 그 대상은 참 많죠.
애인, 가족, 친구, 애완동물, 어릴 적 물건, 자신이 지금 가지고 있는 물건, 좋아하는 영화, 좋아하는 소설, 좋아하는 장르, 좋아하는 캐릭터....
우리는 모두 그런 것들에 집착하고, 집착은 삶의 원동력이 됩니다.
물론 심해지면 정신병으로 미쳤다고 '오해' 받지만요.

집착을 버린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글쎄, 겉으로는 인간이어도, 더 이상 내면은 '인간'과 같지 않겠죠.
그래서일까요, 인간을 벗어난 것이 되고 싶은 고대의 성인들은 모두 집착과 소유욕을 버리라고들 했죠.

전 잘 모르겠습니다.


그의 이름은 스벤, 나이는 스물일곱. 머리는 금발에다, 한때는 탄탄하고 균형 잡힌 몸매를 가졌더랬지.
나와 그는 삼 년 간 룸메이트로 지내왔어.
우린 밤이면 밤마다 맥주랑 땅콩을 꺼내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였어. 낮에는 내가 하는 일이 많다보니 서로 얼굴 마주하기도 힘들긴 했지만 말야.

그는 건축가야. 아니, 건축가였다고 하는 게 옳을까? 이젠 나도 잘 모르겠다.
어쨌든 작년 3월, 그는 평생 꿈꿔왔던 걸 드디어 실현하기에 이르렀어. 일본에 가게 됐던 거야.
삼 주 간의 일본여행 동안, 그는 거기서 찍은 길거리며 신사, 사람들 사진으로 페북 담벼락을 도배했어. 하지만 무엇보다도 많이 올린 건, 그곳의 집들 사진이었어. 크고 작고 넓고 좁은 주택이며 아파트의 사진 말야. 급기야는 내부에서 찍은 인테리어 사진까지 올라왔지.
사진 옆에는 이렇게 메모가 돼 있었어. "일본인들 진짜 맘씨 좋은 듯. 건축간데 집 구경 좀 해도 괜찮겠냐고 공손하게 묻기만 하면, 열이면 열 집안까지 초대해준다. 물론 실내에서 신발 벗는 건 깜빡하지 말아야겠지만ㅋ"

그때쯤이었겠지, 그 녀석의 집착이 시작된 건.

스벤이 일본에 있는 동안 우린 두 번인가 국제통화를 해봤던 것 같아. 통화내용으로 미뤄보건대 그는 새로운 '버닝거리'를 찾은 모양이었어.
왜, 미니멀리즘이라고 있잖아. 삶을 간소화하고 정리정돈하면, 마음 속도 간결하고 깨끗해진다는 가치관 말이야.
"있지," 스벤이 전화로 말했어. "여기 아파트들은 딱 대학생 자취방만한 사이즈인데도 갖출 건 다 갖추고 있다니까. 욕실에 부엌까지 너댓 평 안에 다 들어가는데, 어찌나 공간배치를 잘해놨는지 얼핏 봐서는 보이지도 않아!"

귀국한 뒤 스벤이 가장 먼저 한 일이 뭔지 알 것 같아? 그래, 그는 '정리정돈'을 시작했어.
여벌의 옷가지, 게임기, 텔레비전, 오래 전에 받은 선물이나 기타 등등의 추억들을 차곡차곡 박스 안에 쌓아 넣더니 분리수거함에 던져버리더라고.
일주일 쯤 지나자 더 많은 소지품이 그의 방을 떠났어. 생일 카드, 옛날 사진, 트로피, 거기다 집안 대대로 물려받았다는 할아버지 시계까지도.
모두 차곡차곡 길가에 버려졌고, 모든 게 사라졌지.
남은 건 거의 비다시피 한 책꽂이에 거의 비다시피 한 옷장과 한 대의 책상, 그리고 의자 뿐이었어.
"아름답지?" 스벤이 물었어.
그리고 나는,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 눈 앞의 광경이 너무나 간소하고, 너무나 깨끗하고, 너무나 평온해서. 혼탁한 물건도, 기억도, 걱정거리도 남지 않았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나까지 하룻아침에 변하지는 않았어. 내 방은 개판 오 분 전 그대로였거든.

"너 정말 정리정돈 좀 해라." 스벤이 그랬지. "나처럼 해봐. 이렇게 좋을 수가 없어."
그리고 그는 매일 더 행복하게, 더 간소하게 살기 시작했어. 그는 웃으면서 말했지. 이게 훨씬 더 편하다고.

간소한 식단.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야."
간소한 복장. "이제 옷 고르느라 고민할 거 없어. 세 벌 마련해놓고 돌려 입으면 그만이야. 알잖아, 과유불급?"
책상을 빼고. "그게 안 그래도 등뼈에 안 좋다 그러더라고."
책장도 빼고. "먼지만 쌓인다니까."
이불도 빼고. "추위에 맞설 줄 알아야 해."
매트리스도 빼고. "푹신한 건 척추에 안 좋아."
침대도 뺐지. "이러는 게 훨씬 낫다니까?"
"아, 그러니." 내가 대꾸했지. "근데 이제 잠은 어디서 자게?"
"방바닥으로 충분해." 스벤은 특유의 미소를 지었어. 평온하고 차분하고 고요하고, 말도 안 될만큼 행복에 가득 찬 미소 말이야.
"겨울에는 어쩌려고?" 내가 묻자, 그는 이를 활짝 드러내며 웃었어. "문제 없어. 장롱은 아직 안 뺐으니깐."

겨울까지 갈 것도 없었지. 8월 초, 스벤은 장롱 안에 들어가 생활하기 시작했고, 그 후로는 그 녀석을 다른 어디에서도 볼 수 없게 되었어. 과장하는 게 아니란 걸 알아둬. 정말로 집안 어디에도, 부엌에도 화장실에도 어디에도 없이 장롱 안에만 있었다니까. 낮에는 장롱 문을 열고, 밤에는 문을 닫은 채로.

스벤이 물었어. "너 정말 여기 들어와서 같이 살 생각 없니? 자리 되게 많은데."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
"어휴." 스벤이 말했지. "넌 '소유'하는 것에 애착을 버릴 필요가 있어."

그가 머리까지 삭발했던 8월 12일, 나는 내가 알던 스벤은 사라져버린 거라고 결론을 내렸어.
그 때 그는 이미 바싹 마른 상태였어. 도저히 건강하다고는 생각이 안 됐지.

난 이따금씩 음식을 날라다 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늘 같았어.
"아냐. 나 배 안 고파."
그리고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어. 장롱 안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스벤의 몸을 보면, 몸의 윤곽을 잡아주는 거라고는 한 쌍의 갈비뼈와, 살가죽을 뚫고 나올 듯이 선명힌게 비치는 뼈다귀 뿐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항상, 웃는 얼굴이었어.
"너 정말 이러다 큰일나." 내가 말했어. 그러자 그는 함박웃음을 지었는데, 벌린 입을 보니 잇몸에도 살이 홀쭉이 빠져있었어.
스벤은 아랑곳않고 대답했어. "내 걱정은 하지 마. 난 이 편이 훨씬 나아. 이때까지 살아본 방식 중에 최고로 나아."
"이거 건강에 안 좋다고."
"네가 사는 방식보다 훨씬 건강해. 너도 어서 들어오라니까? 두 사람 살기에 충분히 넓어."
"무슨 소리야. 여기 자리가 어디 있다고 그래." 내가 대꾸했어.
정말이지, 그 말을 하면 안 됐던 건데.

얼마 후, 스벤은 장롱 안, 자기가 누워있는 자리 바로 위에 나무판자를 덧대었어. 판자 위를 가리키며 그가 말했지. "너는 2층 살면 돼."
난 그 때까지도 걔가 농담하는 건 줄 알았거든. 그런데 그 다음날부터 매일매일 '2층'은 넓어만지고 스벤이 사는 '1층'은 좁아만지는 거야.
그래도 스벤의 몸은 거기 들어갈 크기가 됐어. 항상 말 없이 앉아서, 나한테서 빌린 책이나, 때로는 그것도 없이 순전히 자기 정신만을 가지고 시간을 보내더라고.

그리고 그 일은 9월에 일어났어.

"진짜, 진짜로." 스벤이 또 우겼지.
"2층 너 해도 된다니까. 너 들어가진다니까."
"글쎄, 그게 과연 그럴까."
"아이 참." 그가 말했어. "내가 좀 더 공간을 만들어 볼게, 됐지? 내일은 분명 들어가질 거야."

그 다음 날, 나는 그 장롱의 2층에 한 번 앉아봤어. 녀석이 그렇게까지 말했으니까 한 번 들어가보는 시늉을 해줬던 거야.
곧 스벤이 장롱 문을 닫자, 녀석의 숨소리와 내 심장박동 밖에는 무엇도 들리지 않았어.
"고요하지?"
"음," 난 잠시 생각해야했어. 그리고 말을 이었지. "그래도 난 좀 끼인다. 그리고 말인데, 무슨 냄새도 나."
약간 쇠못이나 철사 같은 냄새라고, 그때의 나에게 묻는다면 그렇게 표현했겠지.
스벤이 대답했어. "냄새는 가실 거야."

그 다음날이 되자 2층은 더욱 넓어졌고, 스벤의 자리는 더욱 좁아져서 그냥 작은 책받침 하나만한 높이가 돼버렸어. 그러니까, 두꺼운 책 대여섯 권을 눕혀서 쌓아놓으면 그쯤 됐을까.
그리고 그 냄새는 더 심해져 있었어. 썩는 냄새.

"걱정마," 그가 말했지. "곧 나아질 거야."
"스벤. 너 죽고 있구나."
그는 소리내 웃었어. "넌 육체에 너무 집착해."
"장난하는 거 아냐. 너 병원에 가봐야 해."
"난 안 미쳤어. 또 그 타령이야?"
"너희 부모님 전화번호 말해."
"싫어." 스벤이 굳게 말했어. 처음으로 녀석은 화가 난 얼굴이었어.
"제발, 스벤. 난 그냥 널 도와주고 싶은 거야."
"아니. 난 완벽하게 멀쩡해."
"네 몸에서 썩는 냄새가 난다고."
스벤은 다시 소리내 웃었어. "걱정마, 그건 자연 치유 과정의 일부니까."
나는 물었어. "치유라니?"
"상처 말야."
"무슨 상처?"
"아, 큰 건 아냐. 있으나 없으나랄까."
"보여줘."
"싫어."
"보여달라고!" 나는 스벤의 오른손을 꽉 움켜잡았어. 바짝 말라서 작고 차가웠어.
"그만 둬!!" 그가 외쳤지만, 난 그의 손을 쭉 당겼어.
내가 평소에 매고 다니는 책가방보다도 가벼웠어. 내 팔뚝에 스벤의 손톱이 파고들었어.
"그만 두라니까!!!"
스벤의 비명과 함께, 그의 온몸이 장롱에서 미끄러져 나왔어.

그래, 온몸이었지.
왼팔과 양다리가 없는 것, 그걸 빼면.

난 손을 놓았어.
스벤이 비명질렀어. "이 나쁜 새끼야!!"
내가 한 번 힘을 주어 밀치니 그의 몸이 도로 장롱 속으로 튕겨져 들어갔어.
"너 미쳤구나!" 내가 말했지.

하지만 스벤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어. "아니, 미친 건 너야. 넌 이 많은 게 있어야만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거야?"
나는 방문 쪽으로 뒷걸음질 쳤어. "다, 다리에 무슨 짓을 한 거야?"
"필요가 없더라고. 2주 전에 잘라냈어."
"세상에. 너 죽을 거야."
그 순간, 스벤의 눈빛이 다시 온화해졌어.
"정리정돈하라니깐." 그가 활짝 웃었어. "그럼 죽음 같은 건 걱정하지 않게 돼."

그때 쯤 난 구급차나 경찰차나 누군가를, 그래 정말 누구라도 불러야 했을 거야. 하지만 난 그러지 못했어.
왜냐면 내가 그를 볼 때마다 그는 화사하게 웃고 있었거든.

스벤은 행복해. 내가 살면서 보아왔던 그 누구보다도 행복해.

그 일이 있고서 나흘이 지났어. 스벤은 여전히 행복해 하며 그곳을 지키고 있어.
가끔 그가 노래를 흥얼거리는 게 들려. 노래를 부르지 않을 때면 그냥 얌전히 웃는 표정으로 앉아만 있지.

그걸 보면 나는 겁을 먹어야 해. 헛구역질을 해야 해. 공포에 사로잡혀야 해.

그래, 그래야 하지.

하지만 난 그런 대신 그저
고요함을
느껴.

힘들거나 걱정될 때 그의 웃는 얼굴을 보면 평안해져.

문득 정신차리고 보면, 나는 내 방을 깨끗이 청소하고 있어.

어떤 면에서, 스벤은 정말 옳았던 거야. 정리정돈을 하면 마음을 비울 수 있어.
나는 오늘 두 박스를 길거리에 내놓았어.
그리고 밤, 잠이 막 들기 직전, 나는 상상해.
그와 함께, 장롱 속의 이층침대에서 살면 어떤 기분일까.
눈을 감으면 어둠 속에서 하나의 기억이 떠올라. 내 심장박동과, 그의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지.
그럼 나는 내가 그 장롱 속에서 얼마나 행복했던가를 곱씹게 돼.

우리, 정리정돈하자.


탐욕은 죄악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소유욕은 죄악이 아닙니다.

고대의 성인들께 묻고 싶습니다.
죄악이 아닌 것을 버리면 무엇이 되는 겁니까?
인간도, 인간을 초월한 존재도 그 무엇도 되지 못합니다.

스벤의 미소가 아름다웠던 이유는 그가 인간이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인간을 초월했기 때문일까요.

'보통'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추악하고 충격적이고 '미친' 사람일 텐데.
왜 '나'와 고대의 사람들은 그것이 아름답다고 느낀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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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12-29 20:53 | 조회 : 1,481 목록
작가의 말
Beta

사람들은 옛말이 틀린 것 하나 없다고 합니다. 저는 때때로 의구심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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