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세 번째 날 저녁

전에 인터넷의 익명성에 대해 말해본 적이 있었죠.
오직 사람의 것만이 아닌 인터넷의 익명성.

익명성이 진짜 무서운 이유는 사람들의 가면이 익명성이라는 물을 만나 벗겨지며 드러나는 그 끔찍한 본성.
실제로 현실의 왕따만큼이나 인터넷의 마녀사냥은 굉장하죠.
그 여파도, 본질도 서로 다를 게 없습니다.


자, 이제 말씀하시면 됍니다.

"하...하지만 이건...."

아, 이건 신경쓰지 말고 이야기하면 됍니다.

"그, 그래도...."

'당신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대신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할 권리를 받는다.' 이게 저희 계약 아니었나요?

"....하아... 알겠어요. 대신..."

당신의 지인들에게 당신의 이야기가 알려지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네. 그럼 당신을 믿겠어요."

그럼 일단 자기소개부터 하시고 이야기를 해 주시면 됩니다.

"제 이름은 하린이라고 해요.
전 옛날부터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하는걸 정말 좋아했어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 사람에 대해 그 누구보다 더 많이 알게 되거든요. 어쩔때는 그 사람 본인보다 제가 그 사람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게 되었죠."

그건 당신의 자...크흠.

"네?"

아뇨, 아닙니다. 이야기를 끊어서 미안해요. 계속 이야기해 주세요.

"네... 그럼.
제게 사람을 알아간다는건, 그 사람을 친구로 둘지, 또는 적으로 둘지를 결정하는 하나의 과정이었어요. 그래서 전 항상 상대와 어떠한 관계를 맺기 전 그 사람과 충분히 이야기한 후에 그 사람과의 관계를 결정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꽤 괜찮은 친구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버리게 되었어요. 잃어버리기 정말 아쉬운 친구여서 친구와 마지막으로 만났을때 이제 어떡하냐고 바보처럼 조금 울었었죠. 그때 친구가 알려줬어요.
메신저. 컴퓨터에 메신저 프로그램만 있으면, 세계 어디에 있어도 상대와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심지어 화상 카메라만 있으면, 서로 얼굴을 보며 이야기를 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했어요."

메신저라는 프로그램이 있다는걸 그때까지 모르셨던 거에요?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었던것 같아요... 제 집에 컴퓨터는 있었지만 일때문에 주고받는 메일 외에는 전혀 쓰지를 않았거든요.
일단 친구와 헤어져서 컴퓨터에 친구가 알려준 메신저 프로그램을 인스톨했어요.
그리고 계정을 만들고 로그인을 한 순간, 제가 단순히 우물 안의 개구리였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어떤 의미죠?

"그러니까, 사람이 아무리 많은 사람을 만난다고 해도, 결국 자신이 갈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한정되잖아요?
그런데 메신저는 제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줬어요. 시간의 제약도, 공간의 제약도 없는, 그야말로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과 만날 수도 있는 새로운 세상을요.
전 곧 메신저에 몰두했고 겨우 한달만에 제가 이전까지 만들어왔던 인간관계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과 친해지게 되었어요. 그들은 모두 친절했고, 정중했으며, 제가 기쁠때 같이 웃어주었고 슬플때는 같이 슬퍼해줬어요.
전 저를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는게 정말 기뻤고, 서로의 소소한 소식을 들으며 채팅하는 시간들이 너무 행복했어요.
그런데 그저, 그저 그렇게만 지냈어야 했는데..."

뭔가 일이 생기셨군요.

"YellowCap5208이라는 채팅친구가 있었어요.. 본명은 최문식이었고, 아이디처럼 택시를 몰고 있는 친구였죠.
어느 날 그 친구가 제게 말실수를 했어요. 뭐라고 했는지는 이제 와선 기억도 나지 않지만, 그 때 전 꽤나 충격을 받았어요. 그 친구는 곧 제게 실수한것 같다고, 미안하다고 했지만, 전 이해를 할 수가 없었어요. 한참을 이야기했던 친구지만, 그런 식의 말실수를 할 친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거든요...
그래서... 다른 채팅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했어요..."

어떤 이야기를?

"그러니까... YellowCap5208이 내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너무 충격이었다... 뭐 그런 이야기를요.
그랬더니 채팅친구들이 YellowCap5208이 그런 사람인줄 몰랐다면서 떠들어대더군요... 그러면서 저를 위로해 줬어요.
거기까진 좋았는데..."

좋았는데..? 뭐죠?

"점점 더 이야기가 이상하게 커져갔어요... YellowCap5208이 절 무시하고 사과도 하지 않았다는 둥, 입에 담기 힘든 욕을 했다는 둥, 심지어는 성희롱을 했다고...
저는 아니라고 했지만, 제가 어떻게 하기에는 일이 너무 커져버렸어요..."

...흐음...

"제, 제가 너무 주제넘은 짓을 했다는 건 알아요... 그 친구는 분명 제게 사과했는데... 제, 제가...
하지만 일이 이렇게나 되어 버릴 줄을 몰랐단 말이에요... 그냥 속상하기도 해서 가볍게 이야기한 거였었는데... 그렇게... 일을 그렇게 만들 생각은 없었어요...
저기... 제 말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알고 있습니다. 조금 진정하시고, 계속하세요.

"그...그런 이야기가 돌고 돌다가 결국 YellowCap5208, 그러니까 문식씨도 그 이야기를 듣게 된 거에요... 그 사람도 아니라고 했지만, 이미 주변 채팅친구들에게 문식씨는 상종하지 못할 인간이 되어버린 후였죠...
결국 얼마 후 문식씨는 메신저를 그만두게 되었어요. 그런데 문식씨가 사라지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실제로 문식씨를 알고 지내던 채팅친구가 말했어요.
'YellowCap5208이 자살했습니다. 이제 다들 속이 후련하십니까?'라구요.
그 친구는 모두가 문식씨를 욕할때도 YellowCap5208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다니면서, 제게도 "사실이 아닌걸 알고 있다면 어떻게 좀 해 봐라"라며 화를 내던 사람이었어요...
그 사람은 그 말만을 남기고 더 이상 메신저에 접속하지 않았고, 남은 저희들은 서로 그 말이 사실일까 아닐까 수근대기만 했어요."

그럼 당신은...

"물론 제게 왜 진작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냐며 말하던 멍청이들도 있었지만, 제가 수십 번 말했는데 너희들이 본척도 하지 않았다며 채팅 기록을 보여주니까 조용해 지더군요.
한동안은 분위기가 정말 안 좋았었는데, 몇 달쯤 지나자 슬슬 안정되어갔어요."

안정...요.

"네... 언제까지고 그 일에 매달릴 순 없으니까요.
며칠 전에 평소처럼 메신저에 접속했어요. 보통 메신저에 로그인하면 현재 제 친구가 몇 명 접속해있는지 알려주거든요. 거기에 딱 한 명이 접속하고 있다는 거에요.
평소엔 대여섯명은 접속하고 있는데 왠일인가, 싶어서 접속자 명단을 봤더니..."

YellowCap5208이었나요?

"네... 자살했다고 한 사람이, 로그인이 되어 있는 거에요..
누군가 장난치고 있는건가, 싶어서 채팅을 걸어봤어요.. 그래서 몇 번 너 누구냐고, 누군데 죽은 사람의 아이디를 해킹해서 장난을 치냐고 물었지만 아무 대답도 없었고, 심지어 읽은 흔적도 없었어요...
그래서 당장 로그아웃하라고 말하곤 채팅창을 껐어요.
그...그런데..."

...그런데?

"YellowCap5208에게서.. 영상채팅이 걸려있었어요... 제가 채팅창에 신경 쓰는 사이에, 어느 샌가 걸려 있었나봐요... 제가 이야기 했었던가요? 화상 카메라가 있으면..."

네. 말했었어요.

"영상채팅창을 띄웠더니... 상대방 화면은 어두컴컴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요.
저는 그때까지만 해도 누군가의 장난이라고 생각하고 대체 너 누구냐고 큰소리를 쳤어요. 하지만 상대는 아무 말도 하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짜증을 내며 화상채팅창을 끄려고 했는데... 뭔가 작게 말소리가 들어오고 있었어요... 뭐라고 말하는지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작게... 그래서 스피커를 키웠는데... 소리가 작은데다가 잡음도 있었고, 억양도 없었지만 분명히 예전에 영상채팅을 할 때 들었던 YellowCap5208의 목소리였어요."

상대가 뭐라고 말하고 있었죠?

""네가 죽인 그 사람"이라고... 아주 낮고 빠르게 그 말만 반복하고 있었어요...
저는 깜짝 놀라서 화상 채팅창을 껐는데, 하나를 껐더니 두개가, 두개를 다 껐더니 네개의 화상 채팅창이 나타났어요. 모두 검은 화면인데 소리만 겹쳐서 웅웅 울려댔어요... "네가 죽인 그 사람"이라고...
저는 컴퓨터의 코드를 뽑아버렸고 컴퓨터는 꺼졌어요.
그..크훕...그런데..."

자. 조금 진정하시고. 이야기를 시작했으니 끝을 맺으셔야죠?

"그..그런데... 분명히 전원을 뽑아버린 스피커에서...
네가 죽인 그 사람.네가 죽인 그 사람.네가 죽인 그 사람.네가 죽인 그 사람.네가 죽인 그 사람.네가 죽인 그 사람.네가 죽인 그 사람.네가 죽인 그 사람.네가 죽인 그 사람.네가 죽인 그 사람.네가 죽인 그 사람.네가 죽인 그 사람.네가 죽인 그 사람.네가 죽인 그 사람.네가 죽인 그 사람.네가 죽인 그 사람.네가 죽인 그 사람.네가 죽인 그 사람.네가 죽인 그 사람.네가 죽인 그 사람.네가 죽인 그 사람.네가 죽인 그 사람.네가 죽인 그 사람.네가 죽인 그 사람.네가 죽인 그 사람.네가 죽인 그 사람.네가 죽인 그 사람.네가 죽인 그 사람.네가 죽인 그 사람.네가 죽인 그 사람.네가 죽인 그 사람.네가 죽인 그 사람.네가 죽인 그 사람.네가 죽인 그 사람.네가 죽인 그 사람.네가 죽인 그 사람...."

저기, 잠시만... 진정 좀 하시구요...

"그 날부터 제 귀에 일분 일초도 빠짐없이 들리고 있어요... 지옥에서 들려오는것 같은 말소리가... "네가 죽인 그 사람."이라는 말이... 숨쉬고 있는 시간이라면 언제 어디서나...
지...지금도 제 귀에 들리고 있어요... "네가 죽인 그 사람.네가 죽인 그 사람.네가 죽인 그 사람.네가 죽인 그 사람.네가 죽인 그 사람.네가 죽인 그 사람.네가 죽인 그 사람.네가 죽인 그 사람.네가 죽인 그 사람."이라고... 끊임없이... 빠..빨리 자기가 있는 곳으로 오라고 하는 것처럼...
저, 저 좀 구해주세요... 이 소리... 제 목을 조르고 있는것 같은 이 소리 좀..."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봅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과는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의 뜻을 묵살하고 자기 좋은 대로, 자기 편한 대로만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또한 그것이 사실이든, 거짓이든 전혀 상관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타인을 깔보는 것 역시 좋아합니다.
아니라고 말해보았자, 여러분은 이미 삶에서 한 번씩 다른 사람을 까내리거나, 무시하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설사 그 사람이 당신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 않았다고 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 사람을 무시하고 까내리고 흉보고 거짓 소문을 만들고 뒷말하고 죽입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두 본성이 모두 끝을 보았을 때, 사람들은 불안감을 느낍니다.
나 때문에 사람이 죽었어. 이렇게 크게 일을 저지르고 싶지는 않았는데.
하지만 원인은 당신이야.
당신이 죽인 거야.

만일 진심으로 죽길 바라셨다고 해도, 막상 그 사람이 죽으면.

행복하시나요?
당신이 원하던 일이 진짜로 일어난 것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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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12-28 21:01 | 조회 : 1,289 목록
작가의 말
Beta

괴담 속의 죽은 남자도, 여자는 그럴 의도가 없었단 걸 알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단지 복수할 대상이 필요했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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