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셋째 날 밤

거짓말 이라는 것은 창세 이래 절대로 사라질 수가 없는 인류의 죄악이자 본성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제 겨우 말을 시작하기 시작한 유아기를 지난, 그러니까 조국어을 나름 유창하게 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은 자는 없을거에요.
하지만 거짓말이라고 해서 모두가 나쁜 것은 아니죠.

하얀 거짓말, 일명 white lie.
남들을 위해, 자신을 위해, 혹은 자신이 진실이라 믿는 거짓말.
하얀 거짓말만큼 진정한 거짓말은 없다고 생각해요, 저는.
대부분의 거짓말이 그렇지만, 하얀 거짓말은 상황을 묘하게 더 뒤틀거나 풀리게 하는 힘이 있으니까요.

자, 잡담은 충분히 떨었으니 오늘의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요?
자신과 남을 위해 하얀 거짓말을 하고 만 어리석은 라이어(liar)의 이야기랍니다.


A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의 이야기야.
A는 어느 동아리의 멤버였는데, 멤버들중에서 꽤 예쁜 외모를 가진 후배가 있었대. 다른 남자 선배들도 그 후배에게 작업을 걸어보려고 했지만, 걔는 평소에도 정말 필요한 일이 아니면 입조차도 열지 않는 애였어. A도 그 후배 (B라고 부르자) 와 친해지고 싶었지만, 같은 여자인데도 경계를 풀어줄 생각을 해주지 않았어.

그런데 어느날, 늦은 시간에 시장을 통해서 집으로 돌아가다가 누군가와 즐거운듯이 수다를 떨고 있는 B가 저 멀리서 보였대.
그런데 이상한게, B는 누구와도 이야기하고 있지 않았어.
그녀의 앞에는 사람이 있지 않았거든. B는 벽에 대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거야. 그때 A는 B가 '보이는' 사람이란걸 알아차렸대.
정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A와 B가 가입한 동아리는 오컬트부였거든. A 본인은 영적인 존재들같은건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꽤 큰 흥미를 가지고 있었어. 게다가 B가 '보이는' 인간이란걸 알아냈을때 이건 B와 친해질 계기가 생긴거라고 믿고 천천히 다가갔어.
"B, 저 분의 성함은 뭐니?"
"서, 선배...! ...이 분, 보이시는 건가요?"
물론 A한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 거짓말을 한거야. 자신도 B와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이란걸 인식하게 한다면 좀 더 쉽게 친해질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 일 이후로, B는 A와 엄청나게 친해졌어. A가 어디를 가든지 따라다닐 정도로 그녀를 따랐지. B의 말로는 그동안 그녀같은 체질의 사람과 한번도 만난 적이 없어서 정말 기쁘다고 했어. 그런데 아직 A는 B가 정말로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는 믿지 않았대. 그냥 자기만 특별한척 하고 싶어서 연기하는 거라고 넘겨짚고 있었지.
그런 건 A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었어. 아무도 따르지 않던 B가 A를 졸졸 따라다니니까 주변의 동기들이 부러운 시선을 보내왔거든. A는 그 우월감을 느끼면서 가끔씩 B의 장단에 맞춰주는 생활을 보냈어.

그러던 어느 날, 점심시간에 여느때처럼 B가 A에게 다가와서 옆에 앉으면서 말을 걸어왔어.
"어머, 선배! 같이 계신 그분은 누구신가요?"
물론, A의 주변에는 B외에는 아무도 없었지. A는 B가 또 도졌다보다-해서 대충 얼버무리기로 했어.
"아아, 얘? 아무래도 마음에 들어버린 것 같아서 말이야~ 친해졌어."
"후훗, 그런 것 같네요. 얼마나 선배가 좋으면 그렇게 찰싹 달라붙어 있는건지."
A는 B의 해맑은 미소를 보고 살짝 오싹했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어.

그런데 그때부터 문제가 발생한거야.
B가 그 발언을 한 날부터 A는 점점 수면부족에 시달리기 시작했어. 잠만 자면 가위에 눌리고, 깨어있을때도 어쩐지 어깨가 무겁고.. A는 설마, 라고 생각하면서 B와 평소처럼 대학에서 같이 활동했어

하지만 역시, 몇 주가 지나니까 A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져버린거야. 살도 몇키로나 빠져버렸고, 밤에는 잠에 드는 게 두려워질 정도였어. 결국 A는 B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대.
"B, 저기 있잖아..."
"선배, 다이어트 너무 심하게 하시는것 같아요.. 옆에 계신 그 분도 안쓰러워하시는 것 같은데."
"...내 옆에 누가 있어?"
"네? 무슨 말씀이세요? 몇 주 전 점심시간때 친해지신 분이잖아요? 지금도 떨어질 생각이 없는 것 같은데, 정말 친해지셨나 보네요!"
"...B, 난 내 옆에 있는 사람같은거 보이지 않아."
한동안 이해를 하지 못하는 듯한 B의 표정을 보다가, A는 결국 자신이 처음부터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는 걸 밝혀버렸어. B가 벽에 대고 말을 하고 있었을 때부터, 사실 사람같은건 보이지 않았다고.
그러자 B는 몇초동안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가, 실망과 당혹이 마구 섞인 표정으로 입을 열었어.
".....그렇다면 '그거', 이미 늦었어요..."

그 바로 다음날부터 B는 A를 아예 모른척하기 시작했대. 눈도 마주치려고 하지 않고, 동아리도 탈퇴해버렸고.
그리고 A는 몇달동안 '그것'에게 시달리다가, 결국 대학에서 퇴학당하고 자살을 해버렸대.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싶어하는 마음은 나쁘지 않은 거지만, 역시 이런 거에 대해서는 절대로 거짓말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


어떤가요, 순진한 하얀 거짓말이 불러온 잔혹한 끝이?

솔직히 말하자면, 왜 사람들은 이런 부류의 거짓말을 하얀 거짓말이라고 부르는 지 모르겠습니다.
조금만 들춰본다면 선의와 하얀 빛에 감춰진 것은 더럽고 추악하기 그지 없어
오히려 악의와 검은 빛이 상대적으로 더욱 순수해보이니까요.

네? 제가 이런 말을 하니 범죄자나 악마를 옹호하는 것 같나요?
하하, 여러분의 이해나 공감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에요.
물론 저도 사람을 여럿 죽이거나 강간한 후 실수로, 혹은 술을 먹고 저질러 버렸다고 거짓말 하는 사이코패스 같은 범죄자들은 감옥에서 평생 세상과 격리되어 시체가 되고 살이 썩어들어가 악취가 날 때까지 갇혀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악마에 대해서는... 주제를 너무 벗어나니 다음에 이야기하자구요.

아무튼, 거짓말은 그 의도가 어쨌든 대부분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 의도가 정말 '다수'를 위한 게 아니라면, 대부분의 거짓말은 찬사보다는 질타를 받죠.

아, 그럼 오늘의 마무리는 이런 질문으로 해 볼까요?
여러분은 '다수'를 위한 거짓말을 해 본 적이 있나요?
그 끝은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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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11-28 23:34 | 조회 : 871 목록
작가의 말
Beta

그러고 보니, 어제 '더 귀한 것'을 들고 오기로 약속했었는데, 잊어버리고 그냥 평범한 괴담 하나를 들고 와 버렸네요... 내일 그 '더 귀한 것'을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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