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째 날 저녁

항상 그랬듯 운명처럼 태연하게 찾아온 월요일입니다.
반가워요.

지난 주에도 말했던 것 같네요.
월요일은 정말 짓궃어서 당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운명처럼 찾아오리라고.

한 주를 시작하며 저도 이것 저것 할 게 많으니 간단히 괴담만 풀고 갈까요?
저번 주에는 돌아오는 남자였다면 이번에는 운명을 흉내내는 괴이에 관한 이야기랍니다.
자, 그럼 녹음기를 준비해 주실래요?


자, 이제 말하면 된단다.

"네... 그 전에 한 가지 부탁드려요 될까요?"

음? 뭘 말이니?

"제가 만약에 이야기를 하다가 잠들 것 같거든, 절 때려서라도 깨워주세요."

뭐, 별로 상관 없긴 하다만... 그러고 보니 많이 피곤한 것 같구나. 이야기 하다가 잠들 걸 걱정하는 정도면 일단 한숨 자고 시작하는 게 어때?

"아뇨!! 절대로 안 돼요!!! 무슨 소리 하시는 거에요, 지금?!?!"

(잠깐 침묵)

"저... 죄송해요..."

...아니, 오히려 내가 미안하구나. 여기 차 한 모금 마셔보렴. 잠이 좀 깰거야.

"네... 감사합니다..."

어떻니? 좀 낫지?

"...네. 훨씬 낫네요..."

자, 그럼 네 부탁은 들어줄 테니까 이제 이야기를 시작해 주겠니?

"네... 그럼. 제 이름은 최소라라고 해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평범하게 학교를 다니던 여고생이었는데... 제가 이렇게 되어 버린 건 제 꿈 때문이에요..."

꿈이라...

"네. 자면서 꾸는 꿈 말이에요. 처음 그 꿈을 꾼 건 한 달 쯤 전 일이었어요. 그날 평소와 다른 것이라고는 이상한 사람 하나를 만났을 뿐인데..."

그 이상한 사람에 대해 조금 말해줄래?

"아.. 네.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이었어요. 별 생각없이 걸어가고 있었는데 맞은편에서 오는 그 사람을 봤어요. 상복같이 검은 옷을 입고 있는데다가, 검은색 중절모를 눌러써서 얼굴도 잘 보이지 않았지만 정말 '어둡다'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사람이라 오히려 눈에 확 띄였어요. 그 사람을 보고있자니 왠지 기분이 나빠져서, 일부러 바닥만 보고 걸어갔어요. 조금 뒤에 그 사람이 제 옆을 지나쳐 가는걸 느꼈어요. 한숨 돌린 전 다시 집으로 갔어요. 그런데 조금 뒤에 또 그 사람을 만났어요. 처음에는 잘못 본 줄 알았는데 그 어두운 분위기는 좀 전에 저를 지나친 그 사람이 확실했어요. 하지만, 하지만 만약 제 맞은편에서 다시 그 사람이 나타나려면 멀리 돌아서 절 앞선 다음 다시 돌아와야 하는데 그 사람이 그럴 필요가 없잖아요? 뭔가 이상했지만 전 다시 그 사람을 무시하고 지나쳤어요. 그사람도 절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지나쳐 갔고요."

그럼 별 문제 없는 거 아냐?

"저도 그럴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 사람을 조금 뒤에 다시 만난 거에요. 그 사람을 두 번째로 지나친 후 그 사람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정신없이 걸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간 후 정신을 차려보니 똑같은 사람이 똑같은 모습으로 앞에서 다가오고 있었어요. 전 그 자리에 얼어붙었고, 그 사람은 제 옆을 또 아무 말도 없이 지나쳤어요. 정말 믿을 수가 없었지만 이미 세 번이나 제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라 무시할 수도 없었어요. 그래서 전 일부러 집으로 곧장 가는 길을 벗어나 조금 돌아가는 길로 들어갔어요. 왠지 그렇게 하면 그 사람과 만나지 않을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정말 그 사람과 마주치지 않고 길을 갈 수 있었어요. 저 멀리에 집이 보였고, 전 집에 들어가면 더 이상 그 이상한 사람과 마주칠 일이 없을 것 같아 안도하며 조금 뛰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바로 맞은편에서, 그 사람이 다시 나타났어요. 정말 천천히, 우연히 그 길을 지나간다는 듯 유유히 제 쪽으로 오고 있었어요."

...길을 가는데 같은 사람과 네 번 만났다...라.

""저는 그 사람과 다시 만나기 싫어서 집을 향해 뛰어갔어요. 하지만 아무리 뛰어도 집에는 더 이상 가까워 지지 않았고, 그 사람만이 더욱 빨리 제 쪽으로 다가올 뿐이었어요. 결국 지쳐버린 전 그 자리에 주저앉았고, 그 사람은 제 앞을 지나쳐갔어요. 그..그런데... 이번엔 절 쳐다보면서 지나가는 거에요... 그것도 아주 기분나쁘게 웃으면서요..."

흐음...

"그리고 그 사람이 지나가자 마자 전 다시 일어나 집으로 재빨리 뛰어들어갔고, 이번에는 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어요. 그리고 그 사람을 만난 그 날 밤부터, 전 그 꿈을 꾸게 된 거에요..."

음... 그 사람... 아니, 그 '괴이'에 대해선 충분히 알겠으니까, 이젠 네 꿈 이야기를 해 줄래?

"네... 처음 그 꿈을 꾸었을때에는, '이게 뭐지?'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어요. 제가 꿈을 꾸고있다는걸 꿈 속에서 알아차린 건 그때가 처음이었거든요. 그걸... 뭐라더라..."

루시드 드림. 또는 자각몽이라고도 하지.

"네. 그거요. 전 분명히 꿈을 꾸고 있는걸 알았지만, 자각몽과 다른건 제 몸을 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것 정도였어요. 저는 길게 줄서있는 사람들 중간에 껴 있었고, 제 앞에는 세명의 사람이 있었어요. 앞 사람들이 뒤를 돌아보지 않아서 뒷모습밖에 볼 수 없었지만, 분명 낯이 익은 모습이었어요. 제가 그 뒷모습을 어디서 봤는지 생각하고 있는데 앞에 이상한 가면을 쓴 두 사람이 나타났어요. 한 사람은 오래되어 보이는 책과 펜을 들고 있었고, 한 사람은 천칭을 들고 있었어요. 그 중 천칭을 든 사람이 주위를 잠깐 둘러보고는 목을 가다듬었고 곧 이렇게 말했어요. '첫 번째 제물, 교수형.' 그러자 펜을 든 사람이 책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고, 갑자기 아무것도 없던 공중에서 밧줄이 날아왔어요. 그리고 맨 앞에 서 있던 사람의 목을 거칠게 휘감더니 공중으로 끌어올려버렸어요. 밧줄에 묶여져 올라간 그 사람은 처음엔 격렬하게 발버둥치더니, 곧 축 늘어져서 움직이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 시체가 제 쪽으로 조금 돌아가서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잘 보니 제 친구인 정미였어요. 전 놀라서 비명을 질렀고, 곧장 잠에서 깼더니 아침이더라구요.

흐음..

"제가 원래 꿈 내용을 잘 기억하는 편은 아니거든요? 그런데 그 날 꾼 꿈은 완전히 잠에서 깬 뒤에도 잊혀지지가 않더라고요. 목을 맨 정미의 처참한 모습이...그건...마치, 마치 머릿속에 새겨진것마냥 잊혀지지가...."

자, 조금 진정하고. 차 한모금 더 하렴.

"네.... 전, 전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무슨 꿈을 이렇게 더럽게 꿨지...'라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기분은 엄청 나빴지만, 그것 때문에 학교를 쉴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학교에 갔는데... 진짜 지옥은 거기에 있었어요.... 꿈.. 꿈 때문에 제가 좀 일찍 깼었거든요... 그래서 평소보다 일찍 학교로 왔어요. 학교 정문에서 교실을 봤더니 불도 꺼져있고... 그래서 행정실에서 교실 키를 빌려서 올라갔어요... 그런데 교실에 도착해 보니 커튼이 쳐진 창문 앞에 누군가가 서 있었고, 교실 문도 열려 있었어요. 전 '누구길래 교실에 불도 안 켜고 저렇게 있는건가...'라고 생각하며 교실에 들어가 불을 켰는데..."

...켰는데?

"...처음에는 제가 본 게 뭔지도 몰랐어요... 힘없이 늘어진 손과 발... 그리고 익숙한 실루엣... 생전 느껴본 적이 없는 데자뷰가 느껴졌고 때마침 꿈처럼 줄이 살짝 돌아가며 매달린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정미...정미였어요.. 정말 그대로... 꿈에서 본 그 얼굴 그대로... 정미를 본 순간의 충격이 너무 커서 제가 뭘 어떻게 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아요... 다만, 비명을 지르며 교무실에 달려가 일찍 출근한 선생님을 붙잡고 계속 울었던 것만 흐릿하게 기억이... 그리고 전 정신을 잃었어요..."

그렇구나...

"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제 방이었어요. 아마 선생님이나 경찰이 절 제 집으로 데려다 줬던것 같아요... 한참 정신을 잃었었지만, 전 너무나 지쳐서 그대로 다시 잠들었어요. 그런데... 그 꿈이 다시 이어졌어요..."

꿈이..이어졌다...라.

"네... 제가 딱 깨어난 그 부분부터 다시 이어졌어요... 이번에도 꿈이란건 알고 있었고, 몸도 제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어요. 그리고 정미... 정미의 시체는 여전히 공중에 매달려 있었지만, 곧 줄이 위로 올라가면서 정미도 같이 사라졌어요... 그리고 천칭을 든 사람이 말했어요. '두 번째 제물, 참수형.' 이라구요. 그러자 손에 펜을 든 사람이 책에 뭔가를 적었고, 적는게 끝나자마자 이번엔 두번째 사람이 뭔가 커다란 손에 잡힌 것처럼 거꾸로 뒤집혀져서 점점 위로 올라갔어요. 그리고 까마득한 높이에 올라갔을때, 뭔가에 패대기쳐진것처럼 무서운속도로 떨어지더니 곧 '콰직'하는 소리와 함께 목이 떨어져 나갔어요... 제 쪽으로 뜨거운 피가 튀었고, 전 비명조차 나오지 않아 벌벌 떨고만 있었어요... 그런데 떨어진 목이 제 쪽으로 굴러오다가 제 발치에 멈췄는데... 제가 오늘 아침에 정미를 보고 교무실에 달려갔을때 계셨던 선생님이었어요... 전 그제서야 비명을 질렀고 꿈에서 깰 수 있었어요. 일어나 봤더니 아침이더라구요..."

그럼...

"네... 그 날 학교에 갔을때 그 선생님이 자살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정미의 유서가 발견되었는데 그 선생님을 짝사랑 했었고, 얼마전에 선생님에게 고백했었대요... 선생님은 정미의 고백을 받았지만 거절했고 정미는 그것 때문에 자살을 하게 된 거였다더라구요... 그리고 선생님은 정미가 자살하자 죄책감에 사시던 아파트에서 투신자살을 하셨다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머리부터 잘못 떨어졌는지 사람들이 발견했을때 선생님의 머리가 잘려 있었다고..."

흐음...

"그 말을 친구에게서 듣고는 전 잠을 자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제가 잠들면 제 앞의 사람은 죽게 될 것이고, 그 다음에는 제 차례잖아요? 그러나 3일째 되던 날, 전 다른 생각을 하게 됬어요. 만약, 만약 3번째 꿈을 꾸고 난 다음 그 사람이 죽지 않게 할 수 있다면, 이 꿈의 저주도 풀리지 않을까, 하고요. 하지만 그러려면 잠을 자야 했고, 또 다른 사람의 죽음을 제가 봐야만 했어요. 전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가 결국 제 꿈과 싸우는 걸 선택했어요. 전 제 꿈과 싸우기 위해 잠들었어요. 또 그 익숙한 꿈이 시작되었고, 꿈 속에서 제 발치에 굴러왔던 선생님의 머리는 곧 스르륵 녹아서 없어졌어요. 제가 앞을 보자, 천칭을 든 사람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어요. '세 번째 제물. 사지절단형.' 이라고. 펜을 든 사람이 뭔가를 책에 적었고, 이번에는 커다란 칼이 나타나 제 앞의 사람을 망설임 없이 토막내기 시작했어요. 피비린내가 진동을 하고, 제 온 몸으로 피가 튀었지만 전 그 사람은 꼭 살려야 했기 때문에 비명을 지르지 않고 버텼어요. 이윽고 칼이 난도질을 끝내고 사라져버렸고, 시체도 곧 사라져 버렸지만 전 제 앞의 사람이 누군지 알아낼 수 있었어요. 아니, 처음 그 꿈을 꾸었을 때부터 알고 있었어요. 첫번째 꿈을 꿨을 때부터 제 앞사람에게서 나던 여러가지 꽃의 익숙한 향기... 제 주위에 그런 향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꽃집을 하고 있던 제 오빠 뿐이었어요. 전 빙글빙글 웃고있는 천칭을 든 사람을 노려보며 비명을 질렀고, 곧 꿈에서 깨어날 수 있었어요.

그 다음 넌 어떻게 했지?

"전..전 일어나자마자 오빠에게 전화를 했고, 오빠가 전화를 받았을때 얼마나 안심했는지 몰라요. 그리고 오빠에게 말했어요. "오늘은 절대로 날붙이같은거 만지지 말고, 위험한 일이나 장소에 갈 일이 있으면 절대로 가지 마"라구요. 오빠는 갑자기 제가 그렇게 말하자 의아해했지만 알았다면서 집에서 보자고 전화를 끊었죠. 전 일단 오빠에게 전화를 하긴 했지만 오빠가 걱정되어 참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오빠를 마중가기로 하고 오빠가 가게 문을 닫을 때쯤 오빠 가게가 있는 쪽으로 갔어요. 골목길을 걷다가 모퉁이를 막 도는데, 누군가 절 뒤에서 덮쳤어요. 뭔가 천 같은걸로 제 입과 코를 막았는데, 놀라서 숨을 들이쉬었더니 온몸에 힘이 쭉 빠져 버렸어요.. 그리고 절 누군가가 어딘가로 끌고 가는 게 느껴졌고, 전 뭔가 일이 크게 잘못되고 있다는걸 알아차렸어요. 이렇게 되면 제가 죽는건데, 분명 꿈대로라면 오빠가 죽는거잖아요? 그래서 전 오빠가 죽는 것을 막은 대신 그 운명이 저에게 온 줄 알고, 오히려 안심했어요. 아무 잘못 없는 오빠가 죽는것 보다는 제가 죽는게 마음이 더 편했거든요.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오빠가 "거기 당신!!! 뭐야!!"라며 소리치는게 들렸고, 절 끌고 가던 사람은 놀라서 도망치기는 커녕 오빠에게 달려들었어요. 잠깐 치고박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고, 누군가가 제 쪽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어요. 전 오빠가 그 사람을 때려눕히고 제 쪽으로 다가온 줄 알았어요. 그래서 제게 괜찮냐고, 어디 다친데는 없냐고 물어볼 줄 알았어요. 하지만 제게 다가온 그 사람은 한숨을 내쉬더니 제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였어요.
'내가 저 남자인 줄 알았지...? 나라서 안 됐네...?'
그... 그 철판이 찢어지는 듯한 여자의 목소리... 차라리 제가 죽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얼마 뒤 오빠의 시체가 발견되었고, 오빠는 정말 토막토막 잘린 채였어요. 전... 전, 오빠가 죽는 걸 막으려다 오히려 오빠를 죽게 만들었어요... 제가, 제가 제 꿈을 너무 얕봤던 거에요.... 그리고 이제는 제 차례에요... 오빠가 죽은 그 날 이후로 전 절대로 자지 않고 있어요... 지금은 이렇게 겨우겨우 버티지만, 언제까지나 잠들지 않을 수는 없을거고 결국엔...결국엔 저도..!! 저... 저 좀 제발 살려주세요!!"


어떤가요?
하루에 네 번이나 만난 네 사람.
그리고 이어진 세 번의 죽음.
아마 그 다음은 소녀의 차례겠지요.

여러분이 운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 지는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괴담 속에서는 저 괴이가 운명을 흉내낼 뿐이라는 거죠.
마치 드라마에서 '아앗, 자꾸 이 사람과 엮이네? 게다가 엮여도 뭔가 이상하게 엮이네? 내가 왜 이러지? 아아, 그래! 이건 운명! 사랑이야!!" 나 다름 없다는 거죠, 제게는.

신나게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새 늦은 시간이 되었네요.
갈 때 가더라고 여러분께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여러분은 운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운명을 믿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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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11-23 21:08 | 조회 : 1,059 목록
작가의 말
Beta

가끔씩 보면 이 세상을 마치 거대하고 위대한 각본대로 돌아가는 이야기라도 말하는 사람들도 적지는 않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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